추석 달빛에 대한 또 한 장의 그림엽서.
몇 년 전 서울 아차산 밑에서 살 때 야간 등반으로 산에 올라가 구경하던 그 달빛.
추석 다음 날이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달그림자와 함께 걸었다.
낮에 산에 올라가 한 바퀴 돌아 내려왔건만 밤이 되자 또 슬금슬금 좀이 쑤시기 시작한다. 습관이라는 게 참 묘하다. 취미는 중독이라고 했던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집에서 나섰다.
내가 야간 등반으로 자주 찾던 바윗길을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달은 주로 나뭇가지 사이에서 언뜻언뜻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팔각정 바윗길을 택했다.
나는 거기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고운 달빛을 만났다.
정자 아래쪽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바위에는 달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바윗길은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투명한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다른 날은 늘 켜져 있던 정자 앞의 가로등도 오늘은 꺼 놓았다.
제대로 된 달빛을 감상하라는 뜻이었을까.
비탈길을 따라 주춤주춤 걸어가는 내 곁에는 그림자도 함께 하고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런 그림자와 함께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나는 어느 새 호롱불로 밤을 밝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때 하늘에 반짝거리던 달은 지구에서 저 멀리 떨어진 물체가 아니었다.
바로 우리 머리 위에서 우리와 함께 달리고, 함께 웃음소리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던 친구였다. 여름 밤 더위를 피해 멍석 위에 펼쳐 놓았던 저녁 밥상에서도 달은 함께 했다. 초가지붕 마루를 따라 한 줄로 늘어선 박꽃 위에 내려앉던 달빛은 이 세상 어느 것 보다도 순수하고 투명하던 하얀 빛이었다. 금방이라도 고개가 땅바닥에 닿을 듯 익어가는 벼이삭 위에 내려앉던 달빛도 풍년의 기쁨을 함께하는 우리의 이웃이었고, 벼 베어낸 논바닥에서 밤이 늦도록 그림자놀이를 할 때에도 달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고교 시절.
어느 날 갑자기 버스를 타고 친구네 집으로 불쑥 찾아 간 적이 있었다. 낮에 날마다 같은 교실에서 만나던 친구였는데 왜 갑자기 그 친구가 그렇게 보고 싶었을까. 그 친구는 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꽤 먼 거리에 있었다.
저녁을 먹고 그 친구가 안내 해 갔던 곳은 근처에 있던 정자였었는데, 물 위에 우뚝 서 있는 정자 마루에서 본 달빛은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다.
하늘에서 밝게 웃고 있는 달빛도 아름다웠지만, 물에 퐁당 빠진 채 밀리는 물결 따라 살랑거리는 달빛은 티 한 점 없이 환하게 웃어주는 웃음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을 꼬박 샜다.
우리 가슴에서 풀어내는 꿈과 우정과 사랑 이야기에 달빛도 함께 했다.
어느 날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어쩌다 도시에 있는 친척집에 갔을 때 너무 밝아서 잠을 못 이루게 하던 그 전등이 시골집 천정마다 매달리게 되었고 스위치 하나로 어둠을 쫓아냈다. 골목 여기저기에 가로등도 생겼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편리함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대신 잃는 것도 많아졌다.
노란 호롱불이 만들어내던 정겨운 그림자가 사라지고, 껌껌하던 골목길을 촐래촐래 비추며 지나가던 초롱불도 사라졌다. 전기밥솥은 가마솥을 앗아갔고, 텔레비전 때문에 겨울 사랑방이 사라졌다. 그 중에서도 우리들의 가장 많은 것을 잃게 한 것은 가로등 불빛에 쫓겨난 달빛이었다.
달빛.
단순히 물리적으로 멀어지거나 사라진 달빛이 아니었다.
그 빛을 잃으면서 우리는 멋과 낭만, 여유와 그리움과 소박함과 정겨움 같은 것을 모두 잃었다. 꿈과 정서도 함께 잃었다.
“물속에 거울을 놓고 달을 비춰보면 선녀가 그네 뛰는 모습이 나온다.”
이웃집 아줌마의 말을 듣고 정말로 그럴까 싶어서 실험을 해 보았을 때 선녀 대신 나타나던 빨강, 노랑, 파랑의 황홀한 삼원색.
이런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 같은 것도 모두 잃었다.
야간 등반 바윗길에 질펀하게 펼쳐진 달빛 바다는 혼자 보기 아까웠다.
비스듬한 바위 위에 가만히 주저앉아본다. 그림자도 내 곁에 살그머니 함께 앉는다.
바로 앞에 있는 솔가지 가느다란 잎사귀도 그림이 되어 내 곁으로 다가온다. 바위틈에서 용케 꽃을 피운 억새 몇 포기가 그림 속으로 들어선다.
무엇에 놀랐는지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개를 치더니 달빛 속으로 사라진다.
세월을 조율하는 풀벌레 소리가 달빛에 섞여 마음을 더 서늘하게 만들어 준다.
아름답다,
고요하다.
한적한 행복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두텁게 밀려온다.
문득 밤을 지새우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가 그리워진다.
첫댓글 감사~
항상 건강 조심 하시고 멋과 맛 향기로 아름다운 인생 삶 행복 가득 하시길~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