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한결같이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
생명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교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흐르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인생의 다양한 문제와 맞닥뜨리지만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주시고자 계획하신 영생 누림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생명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7.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그 뒤를 쫓아가며 이르되 그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그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28. 그의 신복들이 그를 병거에 싣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다윗 성에서 그들의 조상들과 함께 그의 묘실에 장사하니라
29. 아합의 아들 요람의 제십일년에 아하시야가 유다 왕이 되었었더라
30. 예후가 이스르엘에 오니 이세벨이 듣고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에서 바라보다가
31. 예후가 문에 들어오매 이르되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하니
32. 예후가 얼굴을 들어 창을 향하고 이르되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하니 두어 내시가 예후를 내다보는지라
33. 이르되 그를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
34.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이르되 가서 이 저주 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 그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35.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그의 손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36. 돌아와서 전하니 예후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같이 밭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하였더라
(본문 주해)
27~29절 : 요람과 함께 있던 남왕국 유다의 아하시야 왕은 요람이 살해된 것을 보고 벳하간(정원의 정자)으로 가는 길로 도망하였다.
아하시야도 죽이라는 예후의 명령에 도망가던 아하시야가 부상을 당하고, 므깃도까지 피해 갔으나 결국 그곳에서 죽는다. 아하시야의 부하들이 그를 병거에 실어 예루살렘으로 운반하고 그를 다윗성에 있는 그의 조상들의 묘지에 함께 장사지낸다.
아합의 아들 요람 왕 제11년에 아하시야가 유다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지만 불과 1년 만에 죽어버린다.
아하시야는 요람의 조카이다. 예후는 복수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함께 처단하였던 것이다.
아하시야는 악한 왕 요람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 요람과 같은 날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30~33절 : 예후가 이스르엘에 이르렀을 때 이세벨이 소식을 듣고 눈 화장을 하고 머리를 아름답게 꾸미고 창문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예후가 반란을 일으켜 아들 요람을 살해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세벨이 화장을 하고 몸단장을 한 것은 그녀의 독함과 자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제 주인을 살해한 시므리 같은 자야, 그게 평화냐?”(31절, 새번역)
예후가 문 안으로 들어오자, 이세벨이 소리쳤다.
이세벨이 예후를 보고 시므리라고 경멸한 것은, 예후가 반역자임을 지적한 것이다.
시므리는 엘라와 바아사 가문의 생존자들을 살해하였으나, 7일 천하로 그의 통치는 끝났다. (왕상16:9~15).
따라서 이는 예후도 시므리같이 불행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라는 이세벨의 악담이다.
이때 예후가 자신의 편이 될 자를 외치자 내시들이 내다보다가 예후가 시키는 대로 이세벨을 창문 밖으로 지체없이 던져 버린다.
그렇게 나라를 쥐고 흔들던 이세벨이 창밖으로 던져지니, 그 피가 튀었고, 예후가 탄 말이 이세벨의 주검을 밟고 지나갔다.
이어진 예후의 식사는 그의 냉담한 무관심으로 비쳐지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후와 지방 유지들의 공동식사는 서로의 결속과 호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34~35절 : 예후는 이세벨을 왕의 딸로 보고 최후에 관용을 베풀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세벨의 시체는 해골과 손발 외에 발견할 수 없었다. 나머지는 개들이 먹은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평생 부와 권력과 영예를 누렸던 그녀는 비참하게 죽고 그 시체는 개들이 먹고 밭의 거름(똥)처럼 되고 말았다.
36~37절 : 이것을 예후는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한다.
예후는 두 번이나 이세벨의 최후가 어떻게 될지를 들었다.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왕상21:23)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그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니라”(왕하9:10)
(나의 묵상)
요람이 죽고, 아하시야가 죽고, 이세벨이 죽는다.
오늘 본문은 이세벨의 죽음에 초점을 둔다.
북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남유다까지도(아달랴를 남유다에 시집보냄으로) 바알 숭배의 바람을 불어 넣고, 남편과 아들을 조종하며 권력을 쥐고 흔들던 이세벨의 허무하고 비참한 최후를 본다.
아들 요람의 죽음 소식에도 화장을 하고 단장하는 그녀는, 과연 술수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죽인 것처럼 끝까지 독하고 모질다. (이 여자가 이세벨이 아니었다면, ‘죽음 앞에서도 참으로 당당하다’고 좋게 표현하지나 않았을까?)
화장하면서 눈썹을 그리고 머리를 매만질 때 가끔씩 이 장면의 이세벨이 떠오르며 혼자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 ‘이세벨은 우상숭배하는 여자였지만, 나는 아니지’ 하며.....
하지만 꼭 우상이 우상만을 뜻하지 않음을 알기에, 이내 심각해진다.
결국 외모를 치장하는 나, 사람들에게 그럴싸하게 보이기를 원하는 나의 밑마음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복음과 십자가를 입에 달고 살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의 유혹을 받고 살고 그것에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는 사실이다.
입에 맛나는 것을 찾고, 몸에 좋은 것을 찾고, 눈에 즐거운 것을 찾고, (진리가 아닌) 재미(fun)로 내 마음을 기쁘게 해 줄 것을 나도 모르게 찾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주님 앞에 기특한 생각을 했다 싶어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나의 만족과 유익으로 이어지니 말이다. 사탄은 ‘순간’이라는 그 짧은 시간에도 내 마음을 재빠르게 낚아채어 침묵의 자기자랑으로 이어지게 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세상 것을 향한 마음이니 어찌 내가 이세벨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세벨은 대놓고 술수를 부렸지만, 나는 겉과 속이 다르니, 어쩌면 이세벨보다 한 수 위인 존재가 아닐까?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를 보이시고, 그 길을 따르게 하시니 정말 감사하다.
묵상의 시작 기도에 ‘십자가 보혈을 의지한다’는 표현을 늘 쓰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그렇게 배웠기에 형식적으로 쓸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주님의 보혈이 아니면 답이 없기에, 주님의 보혈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을 향한 내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표현도 거의 매일 쓴다. 그것을 지겹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진심이고, 또 다른 표현을 찾아내지 못하니, 늘 십자가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세벨보다 음흉하고 위선적인 나이지만, 그런 내게 말씀의 은혜를 주시고, 십자가를 붙들 수 있도록 성령이 함께 하여 주시니 이보다 더한 복이 없다.
이세벨의 최후에서 건져주신 은혜이다.
오늘도 나는 눈썹을 그리고, 머리를 매만질 것이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이세벨을 십자가에 못 박으니, 나의 대한 사탄의 정죄가 쓸모없게 된다.
(묵상 기도)
주님,
이세벨보다 더 가증스러운 존재를
그 처참한 최후에서 건져내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보혈로 구원하여 주시고,
십자가로 달려가게 하시니, 날마다 정결함을 입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오직 십자가만 붙들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