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이 수상 영광은 엄청난 우연-직관-노력의 결과”
[‘수학 노벨상’ 한국계 첫 수상]
허교수 지도한 김영훈 서울대 교수
“2002년 서울대에 부임해 맡은 첫 학부 수업 ‘고급 수학’에서 당시 허준이 학생을 만났습니다. 1학년인데도 단연 눈에 띄었죠. 수강생 40여 명 중 눈빛이 가장 반짝였으니까요.”
김영훈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사진)는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와의 첫 만남에 대해 6일 이같이 말했다.
김 교수는 허 교수가 대학 시절 ‘D’와 ‘F’가 즐비한 성적을 받으며 우울증도 겪었다고 알려진 것과 관련해 “허 교수가 D와 F 성적을 받은 과목은 물리 과목이었고 복수전공으로 선택한 수학 성적은 아주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일각에서 ‘수포자’로 부르던데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허 교수가 중고생 시절 충분한 정보를 갖고 대학 입학 때부터 수학을 주전공으로 택했다면 필즈상 수상 업적인 ‘리드 추측’ 등 난제를 훨씬 일찍 해결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며 “우여곡절 끝에 돌아오긴 했지만 늦게나마 자신의 길을 찾은 것도 본인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허 교수는 대학생 때에도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학업을 쉰 적이 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위상수학이라는 강의를 들으며 수학의 매력에 빠졌고 학부 3학년 때 김 교수에게 지도교수를 맡아달라고 했다. 김 교수는 당시를 떠올리며 “흔쾌히 지도교수를 맡겠다고 했다. 훌륭한 학생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대수기하학 분야인 특이점의 ‘밀너 수’에 관해 연구하면서 1970년 필즈상 수상자인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토대 명예교수의 초청강연을 듣게 됐다. 이를 계기로 조합론 공부를 하고 싶다고 얘기하자 김 교수는 “좋은 생각”이라고 말해줬고 허 교수는 학업을 이어나가 결실을 맺었다. 필즈상 수상의 영광을 안은 ‘조합 대수기하학’ 연구를 시작하게 된 의미 있는 출발점인 셈이다. 김 교수는 “허 교수가 히로나카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본인의 길을 찾은 건 엄청난 우연과 직관과 노력의 결과”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허 교수는 동료나 선배들과도 굉장히 잘 어울리는 훌륭한 학생이었다”며 “차분하고 내세우지 않고 조용하면서도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확실히 밀고 나가는 내면의 힘이 강한 학생이었다”고 덧붙였다.
김민수 동아사이언스기자
“아들 준이, 윷놀이 등 변형해 창의성 키워… 자유롭게 놔뒀다”
[‘수학 노벨상’ 한국계 첫 수상]
‘필즈상’ 허준이 교수 키운 부친-지도교수 인터뷰
부친 허명회 고려대 명예교수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그의 과거 현재 미래 즉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라는 시(詩)가 있다.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39·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가 5일 한국계로는 처음으로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을 받은 데에는 자율성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부모, 공동연구를 통해 수학의 즐거움을 알려준 동료들, 관심 갖는 연구의 길을 걷도록 독려해준 스승, 그리고 ‘엄청난 우연과 직관과 노력’의 영향이 작용했다. 허 교수의 아버지 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와 지도교수였던 김영훈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유치원 참관수업에 갔는데 다른 아이들은 글쓰기를 했더라고요. 그런데 준이는 (한글을 잘 몰라) 이름만 써 놓고 있었어요. ‘이’는 ‘ㅣㅇ’로 써 놓고…. 여러 번 가르쳐줬는데 잘 모르더라고요.”
한국계 최초로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39)의 아버지 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67·사진)는 6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준이는 어릴 적) 어수룩한 편이었다. 그래서 좀 답답했다”고 회상했다.
○ “수학 직접 가르쳤는데 못 따라와”
허 명예교수는 한때 아들을 영재로 키우겠다는 욕심을 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저도 수학 전공인 만큼 중학교 때 직접 데리고 수학을 교육시킨 적이 있다”며 “과학고등학교에 가고 국제올림피아드에서 메달을 따는 것에 욕심을 냈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기대했던 만큼 따라오지 못했다. 허 명예교수는 “아버지한테 수학을 잘하는 인상을 줘야 하는데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에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나 싶다. 심리적 반발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 대신 아들은 창의적인 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허 명예교수는 “윷놀이나 사다리타기 같은 게임을 다양한 버전으로 만들어 변형시키면서 놀았는데 준이는 창의적으로 변형시키는 습관을 보였다”고 했다. 버섯을 수집·촬영해 분류하는 등의 ‘프로젝트’에서도 재미를 느끼는 모습이었다. 허 교수는 “아들이 창의적으로 놀도록 더 권하고,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밝혔다.
허준이 교수는 중학생 시절에는 글쓰기에 빠져 지냈다. 허 교수는 “아들은 시를 잘 썼고, 소설도 썼다”며 “아내(이인영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명예교수)의 전공 분야인만큼 함께 보며 칭찬이나 비판을 했다”고 돌이켰다.
○ “자퇴도 새 아이디어, 아이를 자유롭게 놔줘야”
허준이 교수가 상문고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치르겠다고 했을 때도 허 명예교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했다. 허 명예교수는 “준이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수업) 50분, (쉬는 시간) 10분을 반복하는 것을 진득하게 참아내지 못했다. 가혹하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기에 집에서 공부하는 것도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자퇴한 아들은 당시 집에서 멀지 않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독서를 많이 했는데 이는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허 명예교수는 어떻게 하면 허준이 교수 같은 자녀를 키울 수 있느냐는 질문에 “상당히 자유롭게 놔 줘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저는 절대적으로 사교육에 반대한다. 선행학습도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는 다양성이 인간의 가치를 부여할 것인 만큼 일타강사의 명료하고 효율적인 일방통행식 강의 대신 유연하고 자유롭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허 명예교수는 선배 수학자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저도 열심히는 했지만 준이 같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만큼 선배로선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다만 “(아버지로서는) 지금까지처럼 일상 속에서 꾸준히 정진하고 두 아이도 잘 키우는 균형잡힌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권구용 기자
허준이 “한국 학교 단체생활이 공동연구 자양분”
[‘수학 노벨상’ 한국계 첫 수상]‘필즈상’ 수상 온라인 기자간담회
“내 인생 롤모델은 친구와 선생님, 난 수포자 아냐… 그런 표현 부적절”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화면 왼쪽)와 금종해 대한수학회장이 6일 서울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온라인 화상 간담회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내 인생의 롤모델은 주변 친구들과 선생님이었다.”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는 6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서 열린 필즈상 수상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허 교수는 “한국에서 초중고를 거치며 한 반에 40∼50명과 함께 생활하며 서로를 알아간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든 자양분이 됐다”고 했다.
필즈상 수상을 가능케 한 연구성과에도 이런 경험이 녹아 있다는 설명이다. 허 교수는 “현대 수학에서 공동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며 “다른 동료들과 함께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며 깊은 연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공동연구 과정이 수학 연구자에게는 큰 즐거움”이라며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문제도 풀어낼 수 있게 된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 허 교수를 두고 표현한 ‘수포자(수학포기자)’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허 교수는 “수포자였던 적은 없으며 그런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강조했다.
허 교수는 “대학교 3, 4학년에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학업을 쉬다가 우연한 기회에 수학을 만나 매력을 느끼고 아직까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필즈상이란 큰 상을 받게 돼 기쁘다”며 “부담감은 있지만 억눌리지 않고 앞으로도 찬찬히 꾸준히 공부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허 교수는 자신의 일상에 대해 “연구활동은 하루에 4시간만 집중해서 하고 나머지는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집안일도 많고, 아이들 공부를 봐주기도 하며 머리를 식히고 다음 날 다시 공부하는 매일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다”라고 전했다.
고재원 동아사이언스 기자
NYT “중학생때 체스퍼즐로 수학적 사고 키워”
[‘수학 노벨상’ 한국계 첫 수상]
nyt 캡처
5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수학계 노벨상인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가 중학생이던 1990년대 컴퓨터 게임 ‘11번째 시간’을 하며 수학적 아이디어를 얻던 순간을 소개했다. 학교 수학에는 뛰어나지 못했지만 퍼즐과 씨름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학문으로서 수학을 경험했다는 것.
허 교수는 ‘11번째 시간’ 가운데 독특한 모양의 체스판에서 규칙에 따라 검정 나이트 2개와 흰색 나이트 2개의 위치를 서로 바꾸는 문제를 일주일간 골몰했다. 그는 체스판 각 칸을 번호를 붙인 그래프로 재구성해 답을 구했다. 이처럼 문제를 단순화하거나 재해석해 직관적으로 이해한 것이 진전의 열쇠였다고 NYT는 전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수학 웹진 ‘플러스 매거진’은 허 교수가 “(일본 유명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 수업이 기계적 학문이 아닌 인간 활동으로서 수학과의 첫 만남이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허 교수는 “수학은 인간 사고와 감각의 경험을 담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