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카테고리 이동 kimkwangsooblo 검색 MY메뉴 열기 사진 태극기는 휘날리고 프로필 별명없음 2017. 1. 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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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는 휘날리고
늦을까 급하게 집을 나셨다. 실내체육관 연도에서 출발한다기에 핸들을 돌리면서 오늘은 나에게는 어떤 역사적인 상황이 올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해병전우회 실내 주차장에서 차를 놓고 연도에 있는 버스에 올랐다. 대부분이 낮선 분들이고 군대 군대 빈 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며칠 전에 한영기 장로님께서 카톡으로 출발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어 오늘 행사에 참석키로 결정하였다.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오늘 행사에는 기독교에서 목사님들이 1000명과 성가대원들이 뒤를 잇는다는 기사를 본 봐가 있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기독교인들이 가는 모양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차를 타고 보니 아는 사람이 없어 무슨 일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뒤편 버스에 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인솔자는 노승일라는 젊은 분으로서 간단한 인사를 하면서 지난번 까지는 버스 한 대로 참여했는데 오늘은 두 대로 참여한다고 했다. 이 규모는 중소도시로는 처음이며 강원도 도 단위규모가 간다고 하였다. 지역 내에 애국시민이 많다는 것에 흐뭇한 마음도 있었다. 비용은 1인당 만원으로 정하였다고 하며 두툼한 비닐봉지를 받아들었다 무엇인지 속을 들려다 보니 김밥 1줄 하고 흰떡 한 뭉치와 식수 1병 그리고 귤, 과자, 우유 한 팩이 들어있었다. 이것이면 오늘 내개 필요한 열량은 충분하다고 생각 하였다. 차는 서서히 시내를 지나 탄금호를 거쳐 북 충주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에 올라 달리기 시작하였다. 오늘의 행사는 무역회관(COEX)앞 연도에서 한다고 하였다. 본 행사는 오후 2시부터이며 우리는 늦어도 오후 1시 반까지는 도착할 것이라 예고하였다. 인솔자는 마이크를 돌려가면서 각자인사를 하기 시작하였다. 차창 밖의 풍경은 텅 빈 들판을 지나 낙엽 진 앙상한 기지를 바라보니 을씨년스러운 겨울 풍경이다. 지금의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어찌하여 우리나라가 이지경이 되었는지 답답하고 안타까움이 연속이었다. 그래서 오늘 집회에 선뜻 나서게 된 동기다. 아무리 선의로 생각하여도 이것은 아니지 않은가.
잘살아보자고 1970년 4월 22일 대구 지방장관회의 때에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새마을 운동을 재창 하였다. 1961년 5월 16일 혼돈스러운 이 나라를 구하고자 군사혁명을 주도하고 6대 혁명구호를 발표하였다 그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이 “빈곤을 타파”하는 문제는 하루 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의 국내외의 경제학자 30명을 초청하여 국가최회의 의장실 바로 옆에 방을 만들어 그들에게 주문하기를 3달 내에 각자 한국 경제발전 계획을 수립해 오라는 지시를 하였다고 비사는 전한다. 때가 되어 그분들을 모아 연구한 보고를 받는데 참석한 모든 분들이 계획을 세울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왜 그르냐는 답변에 통계수치가 하나도 없어서 계획자체를 세울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럼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는 물음에 각자 앞으로 10년 후에 우리나라가 이정도 쯤은 발전을 했으면 좋겠다는 스케치를 해왔다는 이야기다.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소장은 지금 와서 이 보다 더 좋은 안은 없다는 판단에 그 분들이 계획도 아니고 다만 10년 후에 우리나라 경제가 이정도 되었으면 한다는 꿈을 국가 계획으로 받아들려 발표하고 그 이듬해인 1962년부터 제1회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체계적인 계획이 아니어서 수십 번 계획을 수정하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나라구하겠다는 일념하나로 시작하였으나 국내외의 여건은 너무나도 냉혹하였다. 그래서 하면 된다는 의지를 국민들에게 심어 주자는 생각에 새마을운동을 재창하였다. 한마디로 잘살아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마을에서 직장으로 각 기관단체로 농촌에서 도시로 요원의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것이 국민들의 마음을 모을 수 있는 동인이었으며 이는 곧 경제개발성공을 지원하는 주요한 후원자가 되었다. 우리에게 풍부한 시멘트를 이용하여 각 동마다 300포대를 무상 지원한 것이 시초였다. 그 300포대를 각 마을에 나누어주고 부엌도 바르고 장독대도 보수하게 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경제 개발에 세계 10위권의 무역거래 국이 되었다니 춤추고 축하 일인데 어찌하여 계층 간의 골이 깊어지고 지역 간의 갈등이 노정되며 동서남북이 갈가리 찢겨진 오늘이 이 상황을 접하는 심정은 피를 토하는 심정이다. 나는 그 어려웠던 초기 새마을 운동을 직접 담당하여 추진해 왔기에 누구도 이 사업에 시비를 건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막을 각오가 되어 있다. 어느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5천년의 썩어 문드러진 초가지붕을 개량하였겠는가. 나라가 개국한 이래 이런 일들이 한번이라도 있었으면 말해보라고 외치고 싶다. 나라를 더불어 경영하는 정치인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반대만하여온 우리의 정치는 지금도 계속되어 악랄하기가 극에 달하고 있다. 죽기 아니면 살기식이다.
나라의 대통령은 하늘이 낸다고 하였다. 유권자 51%의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을 신문 전단지(찌라시)로 탄핵을 하였으니 이일을 어찌 할꼬 죽어 조상님들을 어찌 뵈올 런지 입은 있으되 말문이 막히는 지경이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법을 가장 많이 위반하니 이런 국회 그냥 보아야 하는지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가 오늘 이 행사에 참여한 동기가 이것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차는 계속 달려 어느 간이 휴게소에서 정차하였다가 계속 달려 목적지에 도달하니 정확히 오후 1시 25분경이 되었다. 하차하여 돌아보니 수많은 태극기 물결이 넘실거린다. 간단한 사진 촬영을 하고 대열에 합류하였다. 인솔자는 앞에서 들고 있는 횡으로 된 현수막에 종북 좌파 척결해야 후손 미래 보장된다. 글을 쓰고 그 밑에 충주의병단 이란 참여주최를 밝히고 있다. 또 하나는 준동세력 몰아내어 후손에게 민주국가 물려주자 는 글씨 밑에 역시 충주의병단이란 현수막을 보고 인솔자의 유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참여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단상에서는 전철역에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나와 감당을 못하니 경찰에게 도로 반을 열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나는 태어나 정말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처음 보았다. 식전행사로 연사들이 나와 규탄 연설을 하고 숙연해지는 노래를 심수봉 가수가 부른 무궁화를 불러 참가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였다. 참여자는 대부분 성인으로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며 젊은 층도 전번 보다는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어린 아이들도 부모님과 함께 참여하여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학습을 목도하고 있다. 여러 구호들도 나타나났다 “탄핵원천무효” “탄핵기각” “국회해산”등등 수많은 구호들을 단상에서 선창하면 참여자들이 모두 복창한다. 행진곡이 울러 펴지기도 하면서 분위기는 점점 익어만 갔다. 참여자들이 너무 많아지니 경찰들의 폴리스라인도 무너져 결국 중앙선을 경계로 하여 한쪽편이 넓혀지고 인도에도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태극기 바다를 보았다. 가슴 심박이 뛰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하였다. 시간은 자꾸 흘러 본 행사를 알리는 사회자의 안내 말씀에 따라서 몇 분들의 연사들은 기독교 목사님들과 장로대표자 말씀과 기도가 있었다. 그리고 전 국방부장관 이였으며, 전 국가정보원장 이였던 권영해 원장의 개회사 및 개회 선포식을 거행하였다. 이어서 기독교 찬양대원들이 찬양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행사가 진행되니 사람들의 발을 움직일 수 없이 많이 몰려와서 이러다가 사고는 나지 않을까하는 우려마저도 들었다. 행사를 주최하는 탄기국(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는 코엑스 앞에 제8차 태극기 집회를 열고 있다. 주최 측 추산으로 120만 명이 참여하였다고 하고 경찰은 3만7천명으로 발표하였단다. 젊은 청년 하나가 단상에 올라 “종북을 반드시 척결하게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다. 만은 참석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주최 측에서는 정치 검찰은 물러가라 또한 수사권을 경찰로 넘겨 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에서는 군인들이 여 일어나라 계엄령이 답이다. 등의 촉구하는 피켓도 눈에 뛰었다. 조작 날조 언론들에 대한 규탄도 이어 졌다. 권영해씨는 이번 사건의 핵심이 JTBC에서 보도한 태블릿PC라고 일갈하였다. 정광택 “탄기국” 회장은 정치검찰의 농간과 언론의 선동 왜곡으로 나라가 누란에 쳐하였다고 규탄하였다. 오후 4시가 넘어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감당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각 지역에서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은 크고 작은 태극기와 피켓과 현수막의 물결은 정말로 장관이었다. 선두 차 안내에 따라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규탄구호는 계속 이어지고 코엑스에서 대치동소재 박영수 특검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한 시간 가량 박영수 특검은 물러가라는 규탄집회를 마지막으로 서울시청 앞에서 행하는 집회에 참석코자 이동하는 중에 우리는 가는 길이 멀어서 기다렸다가 버스에 올라 귀향하기 시작하였다. 집에 도착하니 저녁 9시 30분이되었다. 동행하시 모든 시민들에게 감사한 인사를 올립니다. 둔한 필력으로 두서없이 생각나는 되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할 말은 너무 많아 몇 년을 두고 이야기 하여도 부족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인사에 갈음 합니다.가내 행복하시기 기원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