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인 부르심』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1-3).”
사도행전을 보면, 마티아를 사도로 뽑기 전에
베드로 사도가 ‘사도의 자격’에 관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루카가 복음서에 여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그 여자들이 열두 사도만큼이나 ‘사도의 자격’을 갖추었고,
사도들보다 더 ‘부활의 증인’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음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여자들은
실제로 ‘부활의 첫 증인들’입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이라는 말은,
여자들의 ‘믿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여자들의 관계는 은총과 믿음으로 일치되어 있는
관계였음을 나타내는 말이고,
또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인간적인 존경심이나 호감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자들이 특별한 은총을 ‘체험’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라고 설명하는 이가 있는데,
‘체험’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은, 또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은
믿음 때문에 하는 생활입니다.
언제나 항상 체험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체험하려고 애쓰지 말고 믿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름이 맨 앞에 있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만났고,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첫 번째로 전한 ‘특별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앞의 7장에 나오는 ‘죄인인 여자’와 마리아 막달레나를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두 여자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중을 들었다.” 라는 말은, 음식을 드렸다는 뜻인데,
아마도 ‘옷’도 마련해서 드렸을 것입니다.
시중을 들었다는 말에서 바로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이 말씀에 대해서,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시중을
들었다면, 예수님이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처지였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상황을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자들 덕분에 예수님과 사도들이 궁핍한 생활을 면하게 된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는’ 생활에
동참한 것이라고...
‘자기들의 재산으로’ 라는 말만 보고
여자들을 부자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억측입니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남편이 있는 여자들이 과연 재산을 얼마나
마음대로 쓸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남편이 없는 과부라면, 거의 대부분 재산도 없었을 것입니다.
<명단에는 없지만, 라자로의 동생 마르타와 마리아도 포함시켜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루카 10,38).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의 집에 들르셨는데, 그때마다 그들 남매는
정성껏 예수님을 대접했습니다.>
여자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으로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시중을 들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내적인 부르심’에 응답한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겉으로 표시 나게 여자들에게 직책을 맡기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르심’과 ‘응답’이 작용한 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했던 그 일은 나중에 교회의 공식 조직과 직책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사도 6,2-5ㄱ).”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여러 가지
‘직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1코린 12,4-6).”
교회의 공적인 부르심이든지 개인의 내적인 부르심이든지 간에,
또 교회가 맡긴 공적 직분이든지 개인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는 봉사활동이든지 간에, 공동선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하시는 일이라는 점에서는(1코린 12,7)
‘같은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공식 직책을 맡은 것이 아닌데도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봉사자들이 하는 일들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는 ‘거룩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