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하착(放下着)
노병철
“형님, 시님이 자꾸 방아착 뭐라고 하는데 방아 찧는거요?”
“시님이 아니고 스님이다.”
“그건 별 중요치 않고, 핵심만 간단히 꼭 찝어서 알켜 주소.”
“공(空)의 의미를 아느냐?”
“그렇게 존나게 어렵게 이야기하려면 난 집에 가고....”
“색은 공이고, 공은 색이며...”
“형님 다음에 봅시다. 안 그래도 요즘 머리 복잡한데...”
“대가리 안 돌아가는 시키.”
‘방하착(放下着)’에서 ‘방하(放下)’는 내려놓다, 또는 놓아버린다, 버려라, 비우다 하는 뜻이고, ‘착(着)’은 명령형인 방하를 강조하기 위한 어조사이다. 따라서 ‘방하착’은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는 마음을 “놓아버리라. 집착하지 말라. 마음을 비워라. 아집을 놓아버려라.”라는 뜻이다. 이는 당나라 조수 선사의 가르침이다.
중생은 마음이 흐리다고 할 때는 온갖 잡스러운 때가 묻어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중생에게도 원래 부처와 같은 마음인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데, 마음이 흐려있어 그 불성이 가려져 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바로 불성이 가려져 있느냐, 완전히 드러나 있느냐의 차이다. 가리는 것이 ‘번뇌’란 이야기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먼저 ‘마음부터 비워라.’, ‘마음을 내려놓아라.’ 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의 물정이나 돌아가는 형편을 사리에 맞도록 헤아려 판단하는 것이 ‘분별’이라고 말하고 나와 너,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따위를 헤아려서 판단하는 마음을 ‘분별심’이라고 한다. 번뇌 망상 속에는 집착심. 근심. 걱정. 불안 등 모든 중생의 분별 때문이다. 이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과 같고 마음을 항상 억누르고 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무소유’, ‘무집착’이란 개념이 나오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어떤 고정관념이나 집착심, 욕심, 어떤 선입견도 품지 말고 ‘나(我相)’조차도 놓아버리라는 말이다.
“물레 다방 김 마담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만 해야지. 집착하지는 말란 말이다. 내 여자 내 남자라고 하는 순간 골치 아픈 일만 생기게 된단 말이다. 상대방이 '내 것'이라는 생각, 나 좋은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아집(我執)'이 오히려 둘의 사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이야기다. 물장사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 품에 한 번 안기기 여사이지 그걸 보고 눈 뒤집혀 지랄하면 사랑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애당초 그런 여자를 가까이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이미 분별심을 잃었으니 남은 생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 같다만, 나랑 절에 가서 마음을 다 내려놓고 수행 정진하다 보면 큰 바다와 같은 고요함으로 매사에 흔들리지 않는 여여(如如)한 마음을 얻게 될 것이야.”
긴 문자를 어렵게 보냈는데 읽지를 않는다. 나보다 더 무식한 시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