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민님제공]
<역사속 전라도>
(꽃)엄마야 누나야 돌아오다(꽃)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소월 ‘김정식’의 싯구에
작곡가 ‘안성현’이 곡을 붙여
동요 ‘엄마야 누나야’가 탄생했다.
김소월은 금잔디, 진달래꽃, 개여울, 산유화 등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김소월은 식민지 백성으로 고단하고
외로운 삶을 살다가 32살에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안성현이 월북하여
금기의 인물이 되자 ‘엄마야 누나야’는
20여 명의 작곡가들이 편곡해 민족적인 애창곡으로 불려졌다.
안성현이 처음 곡을 만들 때의 4/4박자의 웅장한 노래였으나
2/4박자, 3/4박자로 편곡되어 경쾌한 동요가 되었다.
앞뜰에는 석양의 황금색 모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뒤뜰에는 마른 나뭇잎이 바람에 나뒹굴며 노래한다.
하지만 소년은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소년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아버지와 형이 일제 탄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소년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만주로 떠나려는
엄마와 누나에게 강변의 오두막에서 살자고 애원했다.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식민지 민족의 아픈 현실을 김소월은 시로 남겼다.
안성현이 드들강변에서 슬픈 사연에 장엄한 곡을 붙였다.
작곡가 안성현 드들강변서 나고 자라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시인 ‘박기동’이 싯구에 작곡가 ‘안성현’이 곡을 붙여
오랫동안 금지곡이 된 ‘부용산’이 탄생했다.
박기동은 폐결핵으로 요절한 여동생을 그리워하며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를 썼다.
다시 안성현이 제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부용산에 곡을 붙였다.
부용산은 지리산에서 빨치산들이 불렀고
유신정권에 반대하며 저항가요로 다시 불렀다.
부용산을 빨치산이 불렀고 작곡가도 월북하자
박기동은 권력으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부용산은 오랫동안 작사 미상,
작곡 미상의 곡으로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다.
박기동은 견디지 못하고 이민을 갔다가 귀국했다.
세월이 흘러 부용산이 재조명 되면서 숨겨진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다.
전라도 화순과 나주를 흐르는 지석천은
남평에서 영산강과 합수한다.
홍수를 막기 위해 드들처녀를 제물로 바쳐
둑을 쌓아 ‘드들강’이라고 한다.
지금도 강물이 범람하면 드들드들 하는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전한다.
드들강변은 30년 전까지만 해도 물이 맑고 금모래가 많았으나 대부분 훼손되었다.
최근 드들강변을 따라서 청보리와 유채꽃이 만발하고
솔밭이 우거져서 사람들이 다시 찾고 있다.
작곡가 ‘안성현’은 전라도 남평 드들강변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일본 도호 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귀국하여 향도여중, 전남여고, 광주사범, 조선대 등에서 음악 강사 겸 작곡가로 활동했다.
안성현이 작곡한 ‘엄마야 누나야’가 초등학교 교재에 실렸고
‘진달래’가 중학교 교재에 실렸고
‘봄바람’이 고등학교 교재에 실렸다.
안성현은 한국전쟁 때 월북하여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고 반세기 동안 금기의 인물이 되었다.
노래비 세우고 음악제까지 열어
반세기 동안 금기의 인물이 된 안성현의 숨겨진 흔적을 찾기 위해
중흥초등학교 최정웅 전교장이 고향 선배이자 모교의 스승인 안성현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 건립 추진위원회’ 최정웅 위원장은
남평의 드들강변 솔밭 끝자락에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를 세웠다.
안성현이 월북의 굴레를 벗고 우리의 곁으로 다시 돌아와 ‘안성현 음악제’까지 열었다.
노래비 옆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가득하고
400년 전에 지암 ‘윤선기’가 지은 정자 ‘탁사정’이 남도의 역사를 증거한다.
‘부용산’을 모르면 전라도 사람이 아니다.
‘엄마야 누나야’를 모르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전라도 사람이다.
서일환<우리들병원 행정원장>
2019. 4. 2. 화
첫댓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소월 ‘김정식’의 싯구에
작곡가 ‘안성현’이 곡을 붙여
동요 ‘엄마야 누나야’가 탄생했다.
김소월은 금잔디, 진달래꽃, 개여울, 산유화 등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김소월은 식민지 백성으로 고단하고
외로운 삶을 살다가 32살에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안성현이 월북하여
금기의 인물이 되자 ‘엄마야 누나야’는
20여 명의 작곡가들이 편곡해 민족적
안성현이 월북하여
금기의 인물이 되자 ‘엄마야 누나야’는
20여 명의 작곡가들이 편곡해 민족적인 애창곡으로 불려졌다.
안성현이 처음 곡을 만들 때의 4/4박자의 웅장한 노래였으나
2/4박자, 3/4박자로 편곡되어 경쾌한 동요가 되었다.
앞뜰에는 석양의 황금색 모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뒤뜰에는 마른 나뭇잎이 바람에 나뒹굴며 노래한다.
하지만 소년은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소년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아버지와 형이 일제 탄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소년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만주로 떠나려는
엄마와 누나에게 강변의 오두막에서 살자고 애원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안성현은 한국전쟁 때 월북하여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고 반세기 동안 금기의 인물이 되었다.
노래비 세우고 음악제까지 열어
반세기 동안 금기의 인물이 된 안성현의 숨겨진 흔적을 찾기 위해
중흥초등학교 최정웅 전교장이 고향 선배이자 모교의 스승인 안성현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 건립 추진위원회’ 최정웅 위원장은
남평의 드들강변 솔밭 끝자락에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를 세웠다.
안성현이 월북의 굴레를 벗고 우리의 곁으로 다시 돌아와 ‘안성현 음악제’까지 열었다.
노래비 옆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가득하고
400년 전에 지암 ‘윤선기’가 지은 정자 ‘탁사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