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대통령이 7일 모스크바 외곽의 노보-오가료보 관저에서 군과 안보 관련 핵심 인사들과 긴급 화상 회의를 가졌다. 회의에는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국방장관과 세르게이 쇼이구 국가안보회의 서기(우리 식으로는 청와대 안보실장), 알렉산드르 보르트니코프 연방보안국(FSB) 국장이 직접, 러시아군 총참모장(합참의장 격) 발레리 게라시모프가 화상으로 참여했다.
푸틴 대통령의 긴급 군 안보 관련 회의/사진출처:크렘린
이날 긴급 회의에는 러시아 쿠르스크주(州) 국경 지역을 대상으로 한 우크라이나군의 기습 공격 상황이 집중 논의된 것으로 전해졌다.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은 화상 보고를 통해 "적(우크라이나군)이 쿠르스크 방향으로 더 깊숙히 진격하는 것을 막았다"며 "최대 1천명의 우크라이나군이 전날(6일) 새벽(모스크바 시간) 쿠르스크주 수드자(Суджа)와 그 일대(수드잔스키 라이온Суджанский район)을 점령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전날 우크라이나군이 전차(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해 쿠르스크주를 공격했으나 격퇴했다고 밝혔으나, 현지에서는 이틀째 전투가 진행중이다.
우크라이나 측의 러시아 본토 공격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통제지역)와 국경을 접한 러시아 본토는 쿠르스크주와 브랸스크주, 벨고로드주다. 러시아가 수도 키예프(키예프) 등 우크라이나 전역을 미사일·드론 공격을 가하면, 우크라이나도 보복하듯, 접경 러시아 이들 3개주를 향해 미사일 폭격전을 감행해왔다. 러시아군이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주요 전선이 아닌, 접경 하르코프(하르키우)주를 지난 5월 공격한 것도 우크라이나군의 본토 폭격을 막기 위해서다. 푸틴 대통령은 이를 '위생지역(완충지대) 확보' 차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러시아 3개 주는 미사일 공격 뿐만이나라, 우크라이나 측의 지상 공격 대상지역이었다. 지난 2023년 3월에는 '러시아 자원의용군'(Русского добровольческого корпуса, RDK)을 자처하는 반러시아 무장세력이 브랸스크주를 침입했고, 두달 뒤인 5월에는 여러 무장세력들이 벨고로드주 국경을 넘었다. 이들은 전투 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며 "함께 크렘린에 맞서 싸울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러시아 브랸스크 국경 지역을 습격한 친우크라 RDK(Русского добровольческого корпуса) 모습/RDK 영상 캡처
특히 지난해 3월에는 수십명의 무장군인들이 브랸스크주 국경 마을 2곳(클리모프스키 루베차네, 수샤니)의 주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불을 지르며, 가스관과 전력 공급선을 폭파했다는 소식과 함께 지역 주민들이 인질로 잡혔다는 등 흉흉한 소문도 퍼지기도 했다. 이에 "푸틴 대통령이 지방 방문(일부 언론은 북카프카스 스타브로폴 방문으로 보도) 일정을 전격 취소했다"고 크렘린이 나중에 발표할 정도였다. 그만큼 사안을 중대하게 보고, 긴박하게 움직였다는 증거다.
그러나 두달 뒤 벨고로드 공격시에는 크렘린이 긴박하게 움직인 정황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2개월여가 지난 지금, 크렘린이 푸틴 대통령의 긴급화상 회의를 공개한 것은 △사안이 중대하지만, 격퇴할 자신감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인터넷 상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전에,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을 공개하고, 대통령과 군 안보 부처가 신속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쿠르스크주 공격이 지난해와 다른 점은 공격에 참여한 부대의 규모가 2자리(수십명), 3자리(수백명) 수에서 1천명 단위로 커졌다는 점이다. 또 공격을 자처하는 RDK같은 부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7일 "우크라이나 당국은 이 공격에 대해 아직 침묵을 지키고 있다"며 "우크라이나군이 국경에 가장 가까운 도시 수드자로 향하는 국경 검문소와 국경 마을 몇 곳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현지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들려오고 있다"고 전했다.
푸틴 대통령의 긴급 회의 소집 소식이 공개된 뒤에도 우크라이나 측의 공식 발표는 나오지 않고 있다. 친러, 친우크라 텔레그램 채널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은 최대 2개 대대로 공격 작전을 펴고 있으며, 여단 규모의 예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집결돼 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공격 진행 과정을 지켜보면서 공격 작전 성공이나, 교두보 확보 등 전과를 발표할 계획으로 보인다.
그러나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은 화상 회의 보고에서 "우크라이나군은 이미 최소 100명이 사망하고 215명이 다치는 등 315명의 병력 손실을 겪었으며, 전차 7대를 포함해 54대의 군 장비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또 "러시아군이 적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국경에 도달하면 작전이 완료될 것"이라고 밝혔다.
화상으로 쿠르스크 상황을 보고하는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텔레그램 영상 캡처
러시아군은 지난해 3월, 5월 방어 작전 때와 마찬가지로 퇴각하는 우크라이나군의 뒤를 쫓아 국경을 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작전에 참여한 부대가 연방보안군(FSB) 소속 국경수비대와 일부 지방 방위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지 상황이 녹록한 것은 아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은 수드자에 있는 대유럽 가스관 통제소를 장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통제소를 통해 러시아 가스가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로 공급되며, 그 곳에서 다시 체코 이탈리아 등으로 분산된다.
우크라이나군의 가스관 통제소 점령 소식은 즉각 유럽에서 가스 가격의 5% 상승 효과를 불러왔다. 일각에서는 가스관 통제소의 점령 소식이 유럽측에게는 키예프의 공격 중단을 압박하는 카드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현지에서 나오는 전황이 여전히 엇갈리는 상태다. 알렉세이 스미르노프 쿠르스크주 주지사 대행은 7일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주 공격이 국경에서 50Km 떨어진 쿠르차토프 원전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이라는 분석도 있다. 쿠르차토프 원전을 장악한 뒤, 러시아군이 통제중인 자포로제 원전과 운영권을 교환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러시아도 이 지역 방어를 위해 예비병력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우크라이나가 워싱턴에 이번 공격을 미리 알리지 않았다"면서 "미국과 서방 국가에서 공급한 무기들이 사용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국무부와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을 '우크라이나의 주권적 결정'이라고 주장했지만, 미 백악관의 반응은 좀 다르다.
존 커비 미 백악관 안보소통조정관은 7일 "쿠르스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더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파트너들과 접촉할 계획"이라면서 "러시아 영토에서 미국 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미국은 지난 5월 러시아군의 하르코프 공격 당시, 미국산 무기의 사용을 러시아 본토까지 허용했는데, 장거리 미사일과 하르코프 전선외 타 지역 사용은 여전히 금지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의 이번 공격에 대한 서방 군사 전문가들의 분석은 대체적으로 비판적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 뉴욕타임스(NYT)는 군사 분석가들을 인용, "쿠르스크 지역 공격은 돈바스 지역에 대한 러시아군의 압박을 완화하기 위한 시도"라면서 "그러나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전했다. 러시아군이 이 지역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오히려 우크라이나군 병력을 분산함으로써 주요 지역 방어가 취약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핀란드 싱크탱크 '블랙 버드'(Black Bird) 그룹의 전문가 파시 파로이넨은 "군사 작전상, 전략적 관점에서 볼 때 이번 공격은 전혀 의미가 없다"며 "다른 전선에서 꼭 필요한 인력과 장비를 엉뚱한 곳에서 낭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