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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7. 묵상글 ( 성주간 수요일. - 제자의 귀와 입과 얼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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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7. 성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제자의 귀와 입과 얼굴
오늘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세 번째 노래인데
참 제자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얘기합니다.
우선 제자의 혀를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의 혀는 어떤 혀입니까?
우리는 혀를 흔히 세 치 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세 치 혀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고도 하고,
그러므로 혀를 함부로 놀려서는 안 된다고도 합니다.
사실 혀는 세 치밖에 안 되지만
치명적인 독을 뿜어내는 뱀의 혀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의 기를 살리는 제자의 혀가 될 수도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제자의 혀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제자의 혀는 스승이신 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제자의 귀로부터 혀도 있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시고,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매일 귀로 주 하느님의 말씀을 제자들처럼 들어서
마음을 채울 때 그때 제자의 혀가 되고 그 혀에서
지친 이를 격려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제자가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 제자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근본적으로 안 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스님의 말이 있지요.
우음수성유(牛飮水成乳) 사음수성독(蛇飮水成毒)이라는 말 말입니다.
소는 물을 먹어 젖을 만들고 뱀은 그 물을 먹어 독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같은 물을 먹는데 그 물이 소에게는 사람을 살리는 젖이 되고,
뱀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존재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고,
존재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되기에
우리는 우선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종 노래는 제자의 입과 귀에 이어 얼굴을 얘기합니다.
“나는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나의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제자의 얼굴은 모욕과 수모와 관련해서는 차돌과 같다는 말입니다.
모욕과 수모를 아무리 받아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누가 아무리 상처를 줘도 내가 받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준다고 다 받지 않습니다.
받고 안 받고는 내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받아놓고는 줘서 받았다고 남 탓을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받기 싫은 상처나 모욕을 내가 받는 것은
그것을 거절할 힘이 내 안에 없기 때문일 겁니다.
내면의 힘,
그것이 왜 없습니까?
참사랑이 없기 때문이고,
참 자기 사랑이 없기 때문이며,
하느님으로부터 그 사랑을 받지도 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매일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제자의 귀를 가지고 하느님 말씀을 듣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자의 혀와 귀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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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7. 성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는 나이 들면서 늙을 운명이고, 병들 운명이며, 죽을 운명입니다.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습니다.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운명으로부터 피하길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이론적으로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인생 자체가 고통이고, 존재 자체가 고통이기에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을 그대로 적시하고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고통은 이 세상 창조 때부터 이렇게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창세 3,17)
따라서 고통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 견디면서 그 안의 하느님을 발견하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고통 속에서 함께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도 고통을 피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도 피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화려한 장신구가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 고통을 안고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가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 누구도 자기 고통을 대신 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날마다’입니다. 날마다 안고 지나가야 하는 고통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힘들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안락한 삶이라는 보증수표를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에서 어떤 끔찍한 일도, 나쁜 일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수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과 고통 중에서도 구원받는 존재이지, 환난과 고통에서 구원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스승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말을 듣고 몹시 당황스러워합니다.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솔직히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도 의아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팔아넘길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특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들으면서 불안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실제로 팔아넘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유다도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안락과 풍요로움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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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일체유심조 / 一切唯心造)(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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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7. 성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은전 30냥에 팔려 배신당하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배신자에게 마지막까지 인정을 베푸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유다야, 네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마지막까지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묻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다도 묻지만, 그는 “주님”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는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습니다. 그가 올리브동산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 26,50)하고 여전히 그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사랑을 끝까지 외면하고 맙니다. 그는 뒤늦게 후회는 했지만, 결국 자책과 죄책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그것은 단순히 은전 30냥에 대한 탐욕 때문이 아니라, 완고함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바라고 원했던’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가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채워주지 않자, 자신의 그릇된 신념과 이상을 고집한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완고함’이란 이처럼 무섭습니다. 곧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과 이념이라는 우상’을 섬긴 까닭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상을 파괴시키는 혁명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정녕, 진정한 혁명가는 자신이 먼저 혁명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혁명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상을 쫒는 자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마태 26,24)
이 말씀은 비단 유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유다처럼,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당신을 배신하는 줄을 알면서도 악에 조정당하고 있고, 오늘도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건져주십시오.”라고 자비를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오늘도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넘어지고 또 넘어지니 무참할 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저를 건져주십시오.”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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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7. 성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아니겠지요?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는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창조하는 창세기 이야기와 이 사건을 알리는 예언들이 그리고 천장 벽화를 마친 뒤 20년이 지난 뒤 정면에 최후의 심판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모든 인간에게 다가오는 피할 수 없는 운명, 즉 하느님이 인간의 절대적인 심판자라는 운명에 대한 것입니다. 왼쪽 벽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다 민족의 구원자 모세의 일생이, 오른쪽 벽에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전 인류의 구원자인 그리스도의 일생이 그려져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이 작업을 하였습니다. 특별히 ‘최후의 심판’을 그리면서 단죄받은 이들이 느끼는 극한의 두려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는데 그가 처음 그린 그림에는 모두가 벌거벗은 채 그리스도 앞에 노출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온몸이 다 드러난 최후 심판의 그림은 당대의 성직자들에게 반발을 불러왔는데 거룩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가 황제든 노예든 성직자든 평신도든 주님 앞에서 아담이 몸을 나뭇잎으로 가린 것처럼 남의 눈을 속이는 옷은 없을 것이라 경고했던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 나는 걸려 넘어지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그날에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의 결정에 따라 벌거벗은 몸은 모두 옷으로 덧칠되었습니다.
아무리 감추어도 하늘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는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사실, 홀로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지,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 앞에 벌거벗은 채 있습니다. 혹 다른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과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하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셨습니다. 너는 네 속을 알고 있지 않으냐? 하는 말씀입니다.
유다는 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제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살림을 맡아보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돈 관리는 아무에게나 시키지 않습니다. 신뢰가 있고 현명한 사람에게 맡깁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특별히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거기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열심히 따랐지만, 재물에 눈이 멀었습니다. 돈을 만지니까 돈의 편리함에 익숙해지고 재물의 유혹에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욕심은 화를 가져옵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 갈증에 시달리고 결국은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기고 맙니다. 유다는 자신을 속이면서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이 어디 유다 한 사람이었을까요? 일상을 살아오면서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주님의 뜻보다도 내 뜻을 고집하면서 저는 유다보다도 훨씬 더 헐값에 예수님을 팔아먹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을 때 “아니, 너 맞아!”라는 답변을 들을까 두렵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죽은 믿음을 살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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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7. 성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대화의 소재가 끊어지면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일까요? 맞습니다. ‘군대’이야기입니다. 저는 1986년 1월 30일에 논산훈련소 25연대 8중대로 입소했습니다. 신학교 학부 졸업식에는 참석 못했습니다. 다행이 동창 신학생이 저의 졸업장을 대신 받아 주었습니다. ‘희비쌍곡선’이 있듯이 저의 군 생활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는 과정에서 저는 신학생이라는 이유로 성당 군종병으로 선발 되었습니다. 인사 담당관의 아들이 신학생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군종병으로 성당에서 지내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합법적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있고, 성당이 외부에 있었기에 합법적으로 외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저는 3개월 만에 다른 부서로 가야 했습니다. 이유는 제가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잔디도 깎고, 성당도 청소하고, 화장실도 청소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잘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신부님께서 출장 가시면서 부대에 들어가라고 하셨는데 제가 그 지시사항을 어겼습니다. 저는 다른 부서에서 지내면서 오히려 신부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저를 엄하게 대하셨기에 저는 군생활을 무사히 잘 마치고 신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는 말년 병장 때입니다. 일석점호를 준비하면서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낮에 저는 일직사관과 장기를 두고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본청 일직사령이 순찰을 돌면서 저희 내무반이 시끄럽다고 하셨고, 일직사관이 와서 조용히 일석점호 준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고, 일직사관에게 인사하는 과정에서 그만 본의 아니게 충돌이 있었고, 치아가 깨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서울로 와서 치료를 받았고, 그 뒤로 크라운을 씌었습니다. 어느덧 37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몇 번 크라운을 교체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큰 무리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즐거운 일도 많았습니다. 저의 동기 중에는 ‘특수병과’들이 있었습니다. 참모식당에서 근무하는 요리병, 테니스장에서 근무하는 테니스병, 사령관 실에서 근무하는 번역병, 표창장과 상장을 쓰는 모필병, 저는 성당에서 일하는 군종병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각자의 자리가 힘에 겨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서로 돕고 지낼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습니다. 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던 저는 동기들보다 3개월 먼저 1988년 5월 4일에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습니다.
지난 2월 14일에 시작한 사순시기도 이제 하루 남았습니다. 내일부터 우리는 파스카 성삼일을 지내게 됩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사순시기이지만 2024년 사순시기는 제게 특별한 사순시기가 되었습니다. 본당을 떠난 지 12년 만에 다시 본당신부가 되어서 사순시기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사순시기에 교회는 4가지를 권고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절제와 회개의 의미로 단식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우리들 또한 희생하는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선행을 베푸는 것입니다. 본당에서는 사순특강을 마련하였고, 매주 십자가의 길을 하였습니다. 사순 제1주일에 우리는 유혹을 물리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순 제2 주일에 우리는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순 제3주일 우리는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순 제4주일에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알았습니다. 사순 제5 주일에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려는 예수님의 고뇌를 보았습니다. 지난 성지주일에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구원의 십자가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파스카의 성삼일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 전례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삼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의 몸가짐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는지 묵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 앞에 자신의 양심을, 친구를, 하느님과 함께한 신앙을 팔아넘기는 것을 봅니다. 우리를 악에 대한 유혹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비우는 무소유의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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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7. 성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가끔 티비를 통해 뉴스를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의 모습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왜 주님을 팔아넘겼을까? 하루 이틀 함께 지낸 사이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어쩌면 유다만의 이유가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유다만의 큰 그림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소설을 써 보겠습니다.
유다는 주님의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치유의 기적도 보고 빵의 기적도 보았습니다. 라자로를 살려내신 기적도 보았습니다. 유다는 이제 다짐했습니다. 주님을 왕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말입니다.
기회를 찾던 유다는 주님을 구석으로 몰아넣을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구석에 몰려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면 그분의 모든 능력을 발휘해 하늘의 천사들이 내려와 사람들 눈앞에 하늘의 권능을 보일 것이고 그러면 주님을 사람들이 왕으로 모실 것인 것이 유다의 계획이었습니다. 아마도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다는 틀렸습니다. 그런 생각은 유다 개인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과 완전히 다른 인간의 계획이었습니다. 나중에 유다는 땅을 치며 후회합니다.
우리의 길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길이 다를 수 있습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물어보십시오. 주님의 길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우리가 나의 길이 아닌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길을 걷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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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합니다.
막 사제가 되었을 때의 강론을 지금 읽어보면
입에서 이 말이 나옵니다.
허접하다 허접해
처음 접한 운동을 했을 때,
내 마음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을 때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허접하다 허접해
처음은 다 그렇습니다.
처음은 다 허접합니다.
그런데 그 허접함은 참으로 가치 있습니다.
왜냐하면….
허접함은 비범함의 거름이기 때문입니다.
허접함은 어느새 비범함을 길러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허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범함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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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7. 성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 처럼, 예수님 따라 살기”-
성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입니다. 앞서 주님의 첫째, 둘째 노래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신원과 더불어 우리의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를 통해 하느님의 제자로서 자신의 신원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통해 우리 또한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거듭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다음 주님의 종의 고백은 그대로 예수님의 고백이요 교회 전통은 처음부터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귀를 열어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다.
...
나를 의롭다 하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자 누구인가?”
그대로 하느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육성을 듣는 듯합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이렇게 예수님처럼, 예수님따라 살면 되겠습니다. 성주간 예수님은 자신의 신원에 대해 깊이 고뇌하셨을 것이며 이런 예수님 덕분에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제 자작 애송시 “하늘과 산”은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로 스승과 제자간의 깊은 상호보완의 사랑과 신뢰관계를 보여줍니다. 늘 읽어도 늘 새롭습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저에게 한결같은 불암산은 참된 제자의 모범도 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수없이 다짐하며 주님의 제자답게 살려고 노력한 정주의 삶이요 더불어 떠오르는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라는, 역시 여전히 새롭게 공감하는 자작 애송시입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
세월도 비켜가나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불암산이다.”-2006.4
말한마디 천냥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정작 마음이 지치고 다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언이나 충고가 아닌 위로와 격려의 말이며, 예수님처럼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아는 제자의 혀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에 앞서 날마다, 아침마다 겸손히 귀를 열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배우고 실천할 때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관계와 더불어 비로소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겠습니다. 복음과 신약 서간에서도 이런 주님의 제자다운 모습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말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삶이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또 예수님처럼 순종의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5,8-9)
새삼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인생은 고난을 겪으면서 순종을 배워가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학생의 “순종의 학교”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필립비 서간 역시 비움과 순종, 겸손으로 요약되는 제자의 모범, 예수님의 모습이 감동스럽게 묘사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예수님보다 아름답고 거룩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은 제자가 참제자이자 참사람이요, 우리 믿는 이들이 평생 추구해야할 영원한 과제입니다. 이런 제자상과 비교하면 오늘 예수님의 제자 유다의 모습은 얼마나 실망스러운지요!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경각심을 촉구하며 반면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배신자 유다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다는 우리 제자들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인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했을 때 전전긍긍 반응하는 모습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위기중에 있을 때,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혼자 남겨두고 살기위해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의 유다에 대한 탄식이 우리에게는 깊은 충격과 더불어 크나큰 가르침이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 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비록 예수님의 죽음이 성서에 따른 것일지라도, 유다는 결코 그의 배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비교가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둘의 차이는 단 하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믿었고, 유다는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일화가 재미있어 인용합니다. 어느 총명한 어린이가 유다의 배반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유다는 목을 매단 나무를 잘못 골랐어요. 무화과나무를 골랐거든요.”
놀란 교리교사가
“그럼 뭘 골랐어야 했을까?”
물었을 때 어린이의 대답이 정말 기막힌 명답입니다.
“예수님 목에 매달렸어야죠!”
무화과나무에 매달려 자살할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예수님의 목에 매달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송과 더불어 주님께 용서를 빌었더라면, 그는 정말 베드로처럼 용서 받았을 것이라는 일화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를 믿지 않았음이 유다의 결정적 패착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따라 주님의 종이자 주님의 제자가 되어, 한결같이 경청과 순종, 비움과 겸손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요,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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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7. 성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렇게 나 살아있음이>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 26,24)
이렇게
나 살아있음이
누름이 아니라 섬김이요
앗음이 아니라 베풂이며
죽임이 아니라 살림이기에
이렇게
나 살아있음이
더불어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기쁨과 희망이기를
이렇게
나 살아있음이
더불어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조차
슬픔과 절망이 아니라
이렇게
나 살아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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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7. 성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마태 26,15-16)
은돈 서른 닢
유다가 유대인 사제들에게 한 말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그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주는 대가로 기꺼이 돈을 받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요 진리의 말씀을 넘겨주고 자기 영혼에서 그분을 물리치는 대가로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받는 이들과 똑같은 일을 합니다. 실로, 돈이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죄를 저지름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경멸하고 배반하는 자는 누구나 유다의 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배반하는 죄의 대가로 이 세상의 이득을 주는 원수에게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며, 드러내 놓고 원수의 권능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는 듯합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유다에게 준 동전의 개수는 구원자께서 이 세상에 머무신 햇수와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에 세례를 받으시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곡식을 모으기 시작한 것도 서른 살 때였습니다(창세 41,46 참조). 그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서만 곡식을 준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이집트인들에게도 주셨듯이, 복음도 성도들을 위해 준비되었지만 불충하고 사악한 자들에게도 선포되었습니다.
-오리게네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두 번째 사랑은 은혜로운 사랑 내지는 영적인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이 사랑을 통해 사람의 영혼이나 천사의 영혼 안으로 흘러 들어가십니다. 그러면 지성을 부여받은 영혼은 창조계의 모든 빛보다 더 밝은 빛을 받아서, 자기를 중심으로 삼던 태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컨대, 나의 눈이 강한 빛이어서 자신의 충만한 힘으로 햇빛을 받아들이고, 햇빛과 하나가 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나의 눈은 자신의 충만한 힘과 햇빛과 해에 들어 있는 힘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지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모든 피조물에 맞추어졌던 나의 지성을 거두어 하느님께 맞춘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은혜를 나의 지성 속으로 끊임없이 부어 넣으실 것이고, 나의 지성은 밝아져서, 성스럽게 주어진 이 사랑과 하나가 될 것이고,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알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지성을 부여받은 피조물 속에 자신을 부어넣으시고, 우리의 지성은 하느님의 은혜로운 빛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마침내 그 빛, 곧 하느님을 향해 올라갈 수 있습니다.(143)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4절: 서구의 새 정신
클뤼니에서 그리고 수도생활에서 시작되어 현저하게 증대되어 온 종교운동은, 곧 서구 그리스도교의 생활 전체를 장악하였다. 한 시대의 그리스도교적인 성격을 올바로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신심과 이웃 사랑의 여러 가지 형식에서, 교회적이고 자선적인 목적을 위한 신자들의 헌신적인 정신에서, 예술 창작과 문학에서, 큰 공동체적 임무에의 참여 등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한 시기의 가시적인 업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생활화되고 복음의 메시지가 받아들여지는 내면성과 깊이의 정도 여하에 따라 측정된다.
수도생활의 새 양식:
수도생활과 완덕 추구의 노력 정도는 언제나 한 시기의 종교적 • 교회적 생활의 강도를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척도이다. 만약 중세 전성기가 수도생활과 성직자와 평신도의 수덕생활을 위한 새로운 형식을 많이 만들어 냈다면, 그것에서 종교적인 특정만이 아니라 영적 생활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형성에 대한 갈망도 인식될 수 있다. 종교적으로 감동을 받은 모든 신분의 남녀들이 많이 수도생활로 향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중세 초기의 수도회 생활인 베네딕토회의 단일한 형식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개별적이건 집단적이건 광야에서 은수사로서 생활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속죄하고 설교하며 유랑생활을 하였다. 청빈과 자발적인 금욕과 더불어 사도적 생활은 그들의 생활 이념이었다.(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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