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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serschmitt Me 210C-1 Horni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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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 : 12m 전폭 : 16.3m 전고 : 4.2m 무게 : 최대 9,705kg 엔진 : 2x 다이믈러 벤츠 DB 601F 12기통 수냉식 엔진(각 1,350마력) 속도 : 288mph(463.4kph) 한계고도 : 8,900m 항속거리 : 1,818km 무장 : 2x MG 17 7.9mm 기관총 2x MG 151 20mm 기관포 2x MG 131 13mm 기관총 포탑(후방 방호용) 최대 2,204 파운드가량의 폭탄 |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주둔하고 있었던 Ⅲ./ZG 1 도 Me 210를 받은 몇안되는 '불운한' 부대였다. 조종사들은 새 기체를 전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작전 수행중에도 틈틈이 연합군의 대공포나 전투기에 기체를 조금씩 손실해갔다. 작전중 미군 P-38과 교전이 있었는데, 적기의 성능에 크게 못미치는 것으로 드러났고, 2기의 기체를 라이트닝에 잃게 되었다. 이부대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던 북아프리카로 배치 됨에 따라 눈코 뜰새 없이 바빠졌다.
1943년 3월에 튀니지에서 거의 밀리고 있었던 독일 이탈리아군의 반격이 벌어졌고, ZG1은 불안한 기체를 몰고 적 지상기지로 돌진해 폭탄을 떨어뜨리는 용감함을 보여주었다. 의외의 작은 성과도 하나 거둘 수 있었는데, 2기의 Me 210기가 미군 폭격기 편대를 깜짝 기습하여 B-26 폭격기 한 대를 격추 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2기모두 곧 호위중이었던 P-38에 의해 격추되었고, B-26은 격추 인정이 되지 않았다. 그당시 이 부대 한 조종사의 회고를 잠깐 들어보자.
[ 북아프리카 상공을 날고 있는 7./ZG 1 소속의 Me 210A-1 ]
"우리들의 기본적인 임무는 적 지상 부대와 싸우는 것이었다. 우리는 저공으로 날며 적 수송 행렬을 공격하거나, 벙커, 적 포대등을 공격했고, 계속 충원되는 적 증원 부대도 공격대상이었다. 탱크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도 임무중의 하나였다. 우리 비행기의 20mm짜리 기관포 덕분에, 우리는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고, Me 210에게는 지상공격임무가 적당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결함이 많았지만, 적이 완전히 제공권을 장악하지만 않았더라면, 우리 부대는 적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 8./ZG 1 소속 Witmer 중위의 회고 -
지상공격 임무외에 이탈리아에서 북아프리카로 가는 수송선의 호위 임무도 맡았지만, 미군 라이트닝, 영국 스핏파이어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고, 북아프리카의 독일군이 항복하면서, 이들은 이탈리아 나폴리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Me 410을 받게 된다.
헝가리공군 마크를 달고 날아오른 파괴자 Me 210
독일공군이 이 애물단지 비행기를 속속 다른 비행기와 교체하며 남은 기체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던중, 뜻밖에도 헝가리에서 Me 210에 대한 매입 제의를 해왔다. 메서슈미트 사는 이미 생산라인을 Me 410로 교체하고 있는 시점에서 더 이상 이 공군기를 생산해낼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며, 헝가리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3년 2월, 헝가리 공군 위원회는 이 기종을 헝가리의 공장에서 생산할 수 있다는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서 대전중에 헝거리는 독일의 Bf 109G, Ju 52/3m에 이어 Me 210의 생산을 허가 받게 되었다. 다이믈러 벤츠사의 DB 605B엔진을 탑재한 Me 210Ca-1는 곧바로 부다페스트 부근의 공장에서 생산에 들어가, 1943년 말에는 12기로 구성된 야간 전투기 전대 한 개를 첫 부대로 편성하게 된다.
헝가리에서 생산된 기체들은 웬일인지 독일에서 생산된 Me 210보다 상당히 개선된 전투기였다고 하는데 (엔진이 달라져서 그런가?) 헝가리공군의 평가에 의하면 전반적인 성능이 좋았으며, 쌍발 전투기 치고 기동력도 꽤 좋은 기체였다고 한다. 2건의 작은사고가 있어 이것으로 Me 210의 결함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기체는 바로 복구가 되었고, 승무원도 멀쩡했다고 한다.
헝가리에서 총 267기의 Me 210Ca-1가 생산되었으며,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총 272기의 Me 210이 독일에서 헝가리로 갔다. 이기체들은 헝가리 야간 전투 비행대의 뼈대가 되었으며, 주간에도 연합군의 대편대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1944년 봄, 이탈리아, 북아프리카에 주둔한 연합군 폭격기부대에 의한 유럽 폭격이 시작되었고, 많은 목표물 중에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도 있었다. 4월 3일, 180기에 달하는 4발 엔진 중폭격기가 비슷한 수 170기의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이 폭격으로 1000여명이 사망하였으며, 헝가리 공군이 겪은 뼈아픈 상처는 부다페스트 인근에서 한창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Danube 공장이 거의 완파되어, 갓 생산이 완료된 59기의 Me 210기들과 100여기가 넘는 다이믈러 벤츠 엔진이 매몰되어 버린 것이었다.
4월 5일, 미공군은 이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오스트리아에 위치한 합성 연료 공장에 폭격을 감행하였다. 헝가리 공군은 전투기들을 모아 보복 요격을 감행했지만, 두꺼운 구름 때문에 폭격기 위치를 정확하게 전달 받을 수 없었고 아주 약간의 기체 만이 폭격기 대편대를 만나 교전을 치뤘다. 그중 운이 좋았던 하사관 Zsámboki는 한기의 B 24 리버레이터 폭격기를 격추시킴으로서 헝가리 야간 전투 비행대에 첫 격추 소식을 전달하였다. 그의 회상을 들어보자.
"처음에 나는 두꺼운 구름을 만났다, 하지만 그 구름을 뚫고 약 20여기에 달하는 B 24 편대를 볼 수 있었다. 그 편대에서 조금 뒤에 쳐져있는 한기의 폭격기가 내 눈에 들어왔다. 육안으로 보기에 피탄된 것 같지는 않았고, 그저 편대의 후미에서 비행을 계속 하고 있었다. 약간의 간단한 기동후, 나는 그 폭격기의 후미에 다가갈 수 있었고, 곧 기관포를 발사하였다. 폭격기 사수들이 내 기체를 발견하고 맹렬히 기관총을 쏘아댔지만, 나는 기관총좌중 2곳을 침묵시키면서 폭격기 후미에 더 가까이 붙었다. 사격 끝에 왼쪽 엔진 2기 모두 화염에 휩싸였고, 점점 고도를 잃어갔다. 그리고 땅에 추락하여 전소되었다."
4월 12일, RKI(공군부대중하나인 듯하다)은 다시 한번 전투기들을 모아 다가오는 폭격기에 대항하였다.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지만, 격추는 한 대도 하지 못했다. Me 210 한기가 큰 피해를 입고 조종사도 심한 부상을 입은채 겨우 기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다음날 13일은 헝가리에 가해진 폭격중 가장 규모가 큰 폭격기가 참여한 날이었다. 567기나 되는 폭격기들이 전투기 228기의 호위를 받으며, 부다페스트와 인근의 주요 비행장을 폭격하기 위해 날아올랐다. 이 대규모 전력에 맞서 거의 모든 가용 가능한 Me 210과 Bf 109기들이 수도 방위를 위해 날아올랐고, Me 210기들은 수도 주위를 비행하던 도중 미리부터 겁을 먹고 발포를 개시한 도시의 대공사수들에 하마터면 한기의 전투기를 잃을 뻔한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폭격은 도심 시가지가 아닌 Györ라는 곧에 이루어졌고, 이를 뒤늦게 알고 그곳에도착했을 때에는 모든 연합군 폭격기들은 이미 폭격을 마치고 기지로 기수를 돌린 후였다. Me 210기들은 포기 하지 않고 추격을 한 결과,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RKI 전대의 대장으로서 요격에 참가하였던 조종사는 그때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거대한 편대가 날아가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 폭격기들은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위에는 P-38 라이트닝 전투기들이 떼를 지어 비행하고 있었다. 나는 3기의 B-24에 따라붙었고, 공격을 시작했다. 2번째 공격에서 나는 한기의 폭격기가 화염에 휩싸여 수직으로 추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상승을 시작했을 때, 나는 뒤의 라디오 무전수 Stark가 3기의 적 전투기가 후미에 따라붙었다고 고함지르는 것을 들었다. 단 1초 뒤, 나는 내 조종석 유리 주위로 비껴가는 적의 탄알 궤적을 볼 수 있었다. 몸서리 쳐지는 광경이었다. 나는 구름속으로 급강하를 하였고, 동체 뒤가 떨리는 것을 느끼며 후방사수가 그의 '장난감'(원격조종 포탑을 말함)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회피 기동을 계속 했지만, 우리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갑자기 P-38 한기가 연기를 끌며 추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Stark가 해낸 것이다. 하지만 우리 기체도 많은 손상을 받았고, 오른쪽 엔진에서 불이 나며 연기가 조종석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우선 Stark에게 낙하산 탈출을 하도록 하고, 나는 기체를 끌고 넓은 황무지에 착륙하였다.
- RKI 전대장 Dóczy 중령의 회고 -
엔진에 불이 붙은 기체를 포기하지 않고 땅에 착륙시키다니... 생산 공장이 대부분 완파된 상황에서 한기라도 기체를 보전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여하튼 라이트닝이 떼로 몰려다니는 편대속으로 돌진하여 한기 격추를 이루어낸 중령의 무용담은 칭찬할 만한 것이라고 본다.
전투중에 이런 사고도 있었다. 한 조종사가 한 대의 B-24의 엔진에 불을 내는 데 성공한후, 강하하는 폭격기를 따라 급강하를 시도하였는데, 그때 갑자기 후방 사수 캐노피가 날아가면서 압력에 의해 후방사수가 조종석에서 날아가 수직 꼬리날개를 들이 받고 사망하는 불상사가 그것 이었다. 한기의 폭격기와 동료였던 후방사수 하나를 바꾼 것이라고 할까...
헝가리공군기들은 호위기들보다도 훨씬 딸리는 수로도 결사 항전을 하였다. 한기의 Me 210은 5기의 라이트닝에 둘러싸여 가망없는 전투를 하다가 한기의 라이트닝을 격추 시키고 자신도 장렬히 전사 하였다. 이날 가장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던 조종사는 Bertalan은 라이트닝기의 공격을 피하고, 오히려 공격해온 전투기를 격추 시키고 또 폭격기 한 대를 격추 시키며 2kill을 하였다.
이날 RKI와 야간 전투비행전대는 폭격기 5기와 전투기 5기를 격추 시켰고, 그들도 6기의 Me 210을 잃었다. 비록 적에게 한줌밖에 안되는피해를 주었지만, 그들은 자국을 지키기 위해 용감히 날아올랐다. 다수의 호위기를 뚫고 폭격기 편대를 공격하는 것이 Me 210에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헝가리 공군은 모든 Me 210보유 부대를 지상공격 임무로 전환시킨다. 한번은 미군 비행장을 공격하여 수대의 4발 폭격기들을 완파하는데 성공한 적이 있었는데, 미군의 뒤이은 보복 공격으로 지상에서 모든 기체를 손실한 전대도 있었다. 소련 지상군에 대한 공격도 이루어져, 적의 기차역을 대파하여 소련군 2개 사단이 투입되는 것을 막은 공적도 있었다. 부다페스트가 1944년 12월 21일 완전히 포위되자, 공군은 갖은 노력을 하며 소련군 지상군을 저지하기 위해 애썼지만, 많은 성공적인 작전에도 불구하고, 붉은 군대에 의한 수도 함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헝가리공군은 대전내내 160기 수준의 Me 210가용기체를 유지 하고 있었으며, 1945년 3월 말, 모든 공군 부대는 오스트리아로 가게 되었고, 4월 4일, 헝가리 전역이 붉은 군대의 수중에 떨어졌지만, 그들은 오스트리아 Parndorf 비행장에 주둔하면서 많은 출격을 감행 하였다. 4월말, 연합군이 점점 다가오자 그들은 결국 그들의 애기에 불을 지르고 항복하였다.
전작의 실패를 딛고 날아오르다 - Me 410 Hornisse (Hornet)
Me 210의 실패가 자명해지자, 메서슈미트사는 디자인을 바꾸어 Me 410을 내놓았다.(그전에 Me 310이라는 또하나의 짧은 '모험'이 있었다) RLM은 곧바로 양산 허가를 내주었는데, Me 210과 비슷하게 생긴데다가, 부품또한 동일한 부분이 많아 빠른 대량 생산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능은? 과연 성능은 전작인 Me 210보다 나아졌을까?
[ Me 410과 Me 210을 비교한 것이다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만, 동체가 조금 길어졌고, 엔진 나셀이 길어졌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셀은 엔진을 감싸고 있는 부분을 말하는 듯하다. ]
새로운 유압식 플랩이 장착되었고, 보조익의 성능 향상과, 냉각 커버와 꼬리 날개 부분도 향상된 부분이었다. 위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동체 부분이 조금 길어졌다. 1942년 가을 첫 시제기가 날아올랐는데, 메서슈미트 사는 전작인 Me 210과 함께 비행을 하여 비교하는 시험 비행을 하였는데, 아마도 Me 210 대한 독일공군의 불신이 워낙 깊었고, Me 410이 Me 210과 디자인 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의혹을 무마해보려는 차원에서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 첫 시제기 Me 410V-1이다. 이 기체는 그대로 ZG 1 제 3 그루페로 배치되어 Me 410A-1이 된다. ]
Me 410의 비행은 성공적이었고, 전작에 비해 아주 좋아진 기동성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고질적인 문제였던 갑작스러운 스핀 현상도 말끔히 해소 되었으며, Bf 110보다 속도도 많이 빨라졌기 때문에 시험 비행에서 많은 호평을 받았다. 폭장능력이나 무장은 Me 210버전과 그대로였다. 이 성공에 고무 되었던 기술진들은 카메라를 단 정찰용 시제기(A-1/U1)와 동체 하부에 MG 151/20 2정이 달린 포드를 장착한 말그대로 Heavy Fighter(A-1/U2)형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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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mm 포를 단 정찰용 장갑차 Sd.Kfz.234/2이다. 우리가 잘아는(?) Puma라고 불리웠다. 뜬금없이 항공전사 사이트에 이 장갑차 그림을 띄우게 된 것은... 이녀석이 사용한 포가 Me 410에 채택 되었기 때문. 출처 - Achtung Panzer! |
Sd.Kfz.234 퓨마 장갑차의 KwK L/60 50mm 포를 항공용으로 개발한 BK 5 라는 50mm 짜리 포 장착을 한 기체(Me 410A-1/U4)도 시험 비행에 성공하였다.(같은 50mm 포를 장착한 Me 410A-2/U4는 100여기가 생산되었다.)
양산형은 A-1과 A-2 두가지 형이 있었는데, A-1은 무장이 Me 210의 그것과 같았으나, Destroyer형인 A-2는 MG 17 기관총 대신 강력한 Mk 103 30mm 기관포를 동체 하부 폭탄창에 장착하였다.(Bf 104K-4와 Do 335에도 표준 무장으로 채택하려고 했던 기관포) A-3은 정찰용으로 카메라 2대를 탑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44년 4월에는 B-1, B-2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MG 17 기관총을 MG 131로 바꾸고, 엔진을 DB 603G형(고속 Supercharger장비가능)으로 교체하는등 큰 변화는 없었다. 몇기의 B-2/U3는 FuG 200 Hohentweil 레이더를 탑재하기도 하였다. B-3은 표준무장을 줄인 정찰형이었으며, B-5는 뇌격기 버전이었는데 Hohentwiel 탐색 레이더를 장비하고 있었다. 사용한 어뢰중에는 활강 어뢰라는 특이한 것이있었는데,작은 글라이더에 케이블로 연결되어있는 어뢰가 글라이더가 활강하여 착수하면, 어뢰가 글라이더에서 분리되어 작동하는 것이었다. B-6은 대선박 정찰을 위해 레이더를 탑재하였다.
조금더 강력한 무장을 탑재하여 Me 410을 강력한 '파괴자'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WGr 21 로켓탄을 탑재할 수 있도록 양 주익 하부에 2개씩 총 4개의 로켓 적재 장치를 설치하였는데, 탄도학적으로 고려하여 600미터 전방의 목표물을 가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기존의 무장을 다른 강력한 기관포로 대체하여 화력을 최대화한 Rüstsatz라고 불리던 추가 무장이 있었는데, 별다른 도구가 필요 없었고, 그래서 야전 비행장에서도 쉽게 붙였다 떼었다가 가능했다고 한다.(IL-2에서 무장을 선택할때에도 나오는데, R7(Bf 110G형의 경우)은 2기의 연료 탱크인 것으로 보아, Rüstsatz는 표준무장을 제외하고 비행기 내부나 외부에 장착되는 무장뿐만 아니라 연료 탱크같은 키트를 지칭하는 코드인 것 같다) 아래 표를 참조하길 바란다.(R코드는 기체마다 조금 달랐던 것같다)
Me 410에 사용되었던 Rüstsatz(Equipment kits) 코드 |
R2 : 2x MK 108 30mm 기관포 R3 : 2x MK 103 30mm 기관포 R5 : 최대 4x MG 151/20 20mm 기관포 |
1944년 9월 까지 생산이 계속 되었던 Me 410은 9월에 이르러 생산이 잠정 중단되었는데, 이는 RLM에서 내놓은 전투기 프로그램, 쌍발 전투기의 생산을 제한하여 제트 전투기나 Bf 109같은 전투기들의 생산성을 확대한다는 방침에 의한 것이었다. 대전내내 메서슈미트와 도르니어 공장에서 1,160기의 기체가 생산되었고, Me 210에서 Me 410으로 개조하는 것이 어려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총 1,400기가 넘는 기체가 2차대전중 생산되거나 개조되었다.
[ 아주 특이해 보이는 실험기들중의 하나이다. Me 410B-1에 시험 장착된 6개의 튜브인데, 210mm 로켓탄을 장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6연발 리볼버 권총을 튜브에 총알대신 로켓탄이 들어가는 것을 연상해보라.. 하지만 실험은 완전 실패로 끝이 나고 만다. 발사시 일어나는 엄청난 충격이 거짓말 반으로 목표물보다 기체에 더 많은 손상을 입혔기 때문이다. ]
실전 배치된 말벌들
독일공군은 처음으로 5기의 Me 410기들을 1943년 1월에 받았고, 4월에 48기를 더 받았다. 이 기체들을 이용하여, 5월에 별도의 실험 부대를 만들었는데, 이 부대(Erprobungskommando 25)는 연합군 중폭격기 편대를 제압할 로켓탄이나 기관포등을 기체에 장착하고 시험 비행을 했다. 많은 종류의 무장이 탑재되어 시험을 거쳤는데, 이중에는 80mm, 210mm, 심지어 300mm의 로켓탄도 있었다. 포는 위에서 말한 BK 5외에도 BK 3.7이라는 37mm 포도 있었다고 한다.
E. Kdo 25는 각종 시험 비행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독일을 초토화 시키고 있었던 연합군 폭격기 대편대와 교전을 치루었다. 엠덴과 브레멘이 목표였던 이번 공습에, 브레멘에서 Me 410기가 로켓탄으로 B-17을 격추 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Vessling이라는 소위가 600m 거리에서 발사한 로켓탄들중 하나가 폭발하면서 B-17의 날개를 날려 버렸고, B-17은 수직으로 화염에 휩싸이면서 추락했다고 한다.
[ Me 410가 탑재한 연합국 중폭격기를 위한 '선물' WGR 210mm 로켓탄을 탑재할 수 있는 적재장치를 주익하부에 달고 있는 모습. ]
E. Kdo가 해산된후, Me 410기들은 KG 2 제 5 그루페 소속으로 날 게 되었다. 영국 본토에 대한 야간 폭격에 이 기체들이 동원되었는데, 캠브리지등 3개 비행장에 대한 폭격중 영국 야간전투기에 의한 첫 손실이 있었다. 손실은 한달에 최대 15기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으나, 곧 Me 410조종사들은 2인승기라는 점을 이용, 폭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히려 적기를 격추 시켜 버리는 전공도 곧잘 세웠다. 한 조종사의 8월 24일자 작전에 대한 회고담을 들어보자.
"나는 런던의 부두에 폭탄을 떨어뜨렸고, 창고에서 일어나는 불길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서치라이트가 이잡듯이 하늘을 뒤졌고, 지상으로부터 지옥과도 같은 대공포화 세례가 이어졌다. 나는 고도 500미터까지 하강한후, 프랑스로 향했다. 캠브리지의 동쪽에 다다랐을 때, 나는 무언가 커다란 비행기가 내 기체 전방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놀랐지만 즉시 발사 태세에 돌입했다. 기관포알이 4발 중폭격기 오른쪽 날개에 적중하였고, 불길이 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선회하여 다시 공격을 할까 하였지만, 이내 그럴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기수를 돌리지 않았다. 그 비행기는 곧장 땅으로 추락하여 큰 폭발을 일으켰다. 그때가 새벽 4시 8분이었다." - Gräber의 회고
이 부대는 영국에 대한 야간 폭격을 계속 하면서 때때로 독일 영공에 침입한 연합군 폭격기들을 요격하기 위해 날아올랐고, 강력한 화력으로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그 수가 연합군 폭격기 대 편대에 비하면 너무 적었다. ZG(독일 쌍발 전투기 부대)뿐만 아니라 폭격이 주임무인 KG(Kampfgeschwader : 폭격기 부대)도 폭격기 요격에 나섰다니 급박했던 당시 독일 본토 상황을 짐작 할 만 하다. 비행대장이 전사하여 교체된뒤, 제 5그루페는 1944년 2월초에 KG 51 제 2 그루페에 속하게 된다. 제 1그루페에는 이미 Me 410이 배치 되어있었지만, 이때껏 Ju 88A형을 주력으로 삼고 있었던 제 2 그루페 조종사들은 Me 410의 기체 훈련을 환영하였다.(여담이지만 이 부대는 나중에 Me 262를 장비하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나 Me 410과 같은 비행기를 꿈꿔왔다. 빠르고 넓은 작전 반경을 자랑하는 이 기체는 무엇보다도 적 비행기를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빠르고 넓은 작전 반경이란 말은 그전까지 사용했던 Ju 88과 비교한 것 같고, 그 뒤의 말은 Me 410의 강한 화력에 대한 칭찬인 것 같다.
이미 그전에 훈련을 끝내고 실전에 투입된 제 1그루페 조종사들은 연합군 폭격기에 맞서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1943년 9월 6일, 공대공 로켓탄을 장비한 10대의 Me 410기들이 슈투트가르트로 향하던 연합군 폭격기들을 요격하러 날아올랐다. 곧 그들은 200대의 B-17폭격기들과 마주쳤다. 그때의 작전을 한조종사는 이렇게 썼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우리 폭격기 조종사들은 목적지에 다다라 폭탄을 정확히 투하하는 것이 임무였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전혀 새로운 무기(WGr 로켓)를 장비하고 적 폭격기에 맞서야만 했다. 우리는 B 17뿐만아니라 비행중인 목표물을 사격하는 것을 훈련받은 적이 없었으므로 그저 멀리서 로켓탄을 쏘기만 했다. 발사된 로켓들이 곡선을 그리며 폭격기 편대로 향했다. 그리고 편대의 무전기는 모두 쥐죽은 듯이 잠잠해졌다. 동그랗고 커다란 불꽃이 편대 안쪽에서 일어났고, 곧 폭격기가 추락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무전기에는 격추를 알리는 기쁨에 찬 고함들이 터져나왔다. 그때 아마도 우리 편대의 모든 조종사와 무전수가 고함쳤을 것이다. - Winkel 대위 -
하지만 기쁨도 잠시, Winkel의 기체는 곧 폭격기 후방 사수들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는 수많은 총탄이 자신의 애기를 때리는 것을 느꼈다. 곧 오른쪽 엔진이 멈춰 버렸고, 기체를 살리기로 결심한 그는 연기를 끌며 기지로 돌아갔고, 무사히 착륙에 성공했다. 이들은 슈바인푸르트에 감행된 미공군의 대공습 요격 작전에도 참가하였다.
야간 폭격은 절대 쉬운일이 아니었다. 영국 본토로 가기 까지 수많은 대공포화를 피해야 했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 이후 비약적으로 강화된 영국 본토의 대공 방어 능력과 야간 전투기 부대의 운영은 독일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큰 위험이 되었다. 또한 적 야갼 전투기에 격추 되는 것보다 이착륙에서 더많은 기체가 대파되는 상황은 밤에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준다.(이미 적 야간 전투기에 의해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착륙을 시도하다가 대파되는 경우도 많았다.)
[ WGr 210이 장착되는 모습. 날개가 따로 없으니 육안으로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포탄같기도 하다. ]
독일 하늘을 지켜라!
물론 노후한 Bf 110이나 애물단지 Me 210기를 타고 날아오르던 쌍발 전투기 부대(ZG)도 Me 410으로 기종을 교체하고 주간에 공습을 가해오는 미 제 8공군과 사투를 벌이기 위해 날아올랐다. 1943년 9월 Me 410의 배치가 끝난 ZG 26은 ZG 76과 함께 독일 본토 영공의 방어하는 Reichsverteidigung에 소속되었다. 쌍발 전투기는 일반적으로 단발 전투기보다 작전 반경이 넓고 화력 또한 월등하기 때문에 연합군 폭격기 편대를 상대하기에 최적이라고 판단되었다. 물론 호위기가 붙으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지지만 말이다. Bf 110을 장비하고 있었던 어느 부대는 단 한번의 폭격기 요격 작전에서 90 퍼센트의 손실을 입고 부대가 말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 어느 부대의 3,000회 출격을 축하하는 모습이다. 독일공군에서 이런 행사는 자주 있었다. ]
◆ Me 410 일러스트 Colle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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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가을 동부전선 3./SKG 210의 Me 210A-2이다. 이 부대에는 별다른 부대마킹이 없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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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가을 헝가리 공군의 Me 210Ca-1 이다. 독일공군에서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지만, 웬일인지 헝가리 공군에게는 사랑받는 존재였다. 연합군 중폭격기 요격에도 쓰였다. 고속 폭격기 전대 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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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0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 트라파니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던 7./ZG 1 소속의 Me 210A-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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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여름 헝가리 공군 소속 Me 210Ca-1이다. 어두운 녹색 도색은 시험용이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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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2월, 프랑스에 주둔하고 있었던 KG 51 소속의 Me 410A-1이다. 캐노피 아래에 부대마킹인 에델바이스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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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본토 방어에 투입된 ZG 26 소속의 Me 410B-2/U4이다. 기수 앞에 50mm 구경 포신이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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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2월 KG 2 소속의 Me 410A-1이다. 야간 폭격을 위해 기체 아랫부분을 검은색으로 도색한 것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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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3월, ZG 26 소속의 Me 410A-1이다. 엔진 부분에 보이는 노란 신발이 부대 마킹이다. |
1944년 3월, Bf 110과 Me 410기들은 약 500대의 B 17기들과 약 200대의 B 24기들을 요격하기 위해 날아올랐다. 독일 남쪽의 전투기 생산 공장이 이 폭격의 주요 목표였는데, 요격에 의해 18대 정도의 폭격기가 격추 당하였다. 물론 미군 호위기(아마도 이때까지도 P-47 썬더볼트가 호위기 역할을 맡았던 것 같다)들이 연료 부족으로 폭격기 편대에서 물러날 때를 노렸다.
4월에는 900대가 넘는 폭격기편대가 다시한번 전투기 생산 시설에 폭격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머스탱 4개, P-38 라이트닝 6개 그룹의 호위를 받으며 독일 동쪽까지 날아왔다. 호위기가 본토 안 깊숙이 까지 날아옴에도 불구하고 ZG 부대들은 요격을 개시하여 25기의 폭격기를 격추 시켰으며, 이날 미 제 8공군은 총 52대의 B-17과 12대의 B-24 16대의 호위기들을 잃는 큰 손실을 입으며, 다시 한번 독일 본토를 방어하는 루프트바페의 건재함을 실감해야해다. 그러나 ZG부대 조종사들도 갈수록 점점 늘어가는 연합군 폭격기들과 비약적으로 늘어난 호위기 수 때문에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었던 1944년 6월 6일 이후, 약간 숨을 돌린 은 ZG 26에게 최고의 날이 다가왔다. 노르망디에 연합군 교두보 구축을 지원하는데 성공한 미군 폭격기 부대는 이제 다시 독일 본토를 노리기 시작했다. 6월 20일, 무려 1361대의 중폭격기가 1000대에 가까운 호위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함부르크, 마데부르크등지의 정유소와 합성연료 공장을 폭격하러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ZG 26의 Me 410기들이 날아올랐고, JG 300의 단좌 전투기들이 호위기들에게 돌진해 호위기들을 혼란시키는 동안, 폭격기의 모든 방향으로부터 로켓탄을 장착한 Me 410기들이 달려들었다. 밀집된 폭격기 편대는 로켓탄에 의해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고, 대편대의 일부지만 많은 폭격기들이 로켓탄을 피해보려고 이리저리 기동을 하면서 편대에서 벗어났다. 그다음은 Me 410에 탑재된 BK 5 50mm의 몫이었다. 이날 격추된 50대의 폭격기중 32대가 ZG 26의 공이었다. ZG 26의 손실은 Me 410 2기였다.
7월, 독일 본토에 위치한 정유소에 대한 공습에서 날아오른 Me 410기들은 고공에서 비행하던 라이트닝 호위기들에게 요격당하여, 4기의 P-38전투기를 격추 시켰지만 16대의 기체를 상실하고 만다. 이 작전에 참가한 제 20 전투기 그룹의 에이스 제임스 모리스 대위는 불운하게도 Me 410의 뒤를 쫓아 격추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자신도 적기의 후방포탑에서 날아온 MG 131 기관총 탄알에 격추 당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종전후 자신을 격추 시킨 후방사수였던 독일군과 친구가 되었다)
독일 야간 전투기 부대 집에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Luftwaffe Aces라는 책의 하인츠 볼프강 슈나우퍼(2차대전중 가장많은 야간 격추 기록 보유자)편을 읽다가 2차대전 중후반 독일공군의 야간 전투기 부대에 대한 글을 옮긴 것이다. 1943년 초부터, 루프트바페의 조제프 캄후버 소장은 유틀란트에서 지중해에 이르기 까지의 독일 영토 상공을 방어 하기 위한 야간 전투기 부대를 창설하였다. 야간 전투기 부대의 작전지역은 Himmelbett존이라고 불렸고, 5개의 야간 전투기 부대(NJG : Nachtjagdgverbände)들이 속속 창설 되었다. 초기의 야간 전투기 전력은 약 400대 정도로, 나중에 한 개의 NJG가 추가로 창설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증가하는 연합군의 야간 폭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Do 17, Ju 88, Me 110등 다양한 쌍발 군용기가 NJG의 주력이었다. 이런 이유로, 캄후버는 야간 전투기 부대의 확장을 수뇌부에 탄원하였고, 그의 주장은 적어도 총 18개의 NJG가 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5월 21일, 헤르만 괴링과의 만남에서 그러한 견해를 피력한 그는 일단은 헤르만 괴링의 승인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24일 총통 본부로 가서 만난 히틀러는 거절하였다. 그는 캄후버가 제출한 서류에 빨간펜으로 밑줄쳐진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캄후버 장군, 장군은 미국이 한달에 5,000대의 군용기 생산력이 있다고 하고 있네, 자네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지금 당장 동부 전선의 전투기들을 빼내고 모든 공군력을 본토 방어에 투입해야하겠지. 하지만 이 수치들은 틀렸어 나는 더 이상 이런 정신 나간 소리는 듣지 않겠네!" 히틀러는 캄후버의 말이 그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그 당시 동석 했었던 괴링도, 빌헬름 카이텔 장군도 캄후버의 정보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쳐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잠잠히 있기만 했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지금 배치된 야간전투기 부대의 성과로도 충분하다고 했고, 영국 공군이 조금만 더 있으면 손실을 감당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나중에는 암묵적으로 동의를 했었던 괴링도 변심하여 오히려 캄후버를 비난하였다. 결국 캄후버는 11월 중순경 해임되었으며, 노르웨이 제 5항공군이라는 한직으로 좌천되게 된다. 후임으로는 Schmid 소장으로 결정되었는데, 참고로 그는 영국 본토 항공전때부터 독일 공군 정보 수집 기관에서 일하며괴링이 보기 좋아할만한 내용만을 모아 만든 보고서를 제출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캄후버는 좌천된 이후 1945년 다시 야간 전투기 사령관으로 복직되었지만, 이 시점에서의 복직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가 맡은 것은 이름뿐인 직위나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여담이지만 종전 며칠전 헤르만 괴링의 후임으로 독일공군 최고사령관이된 리터 폰 그레임장군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는 항복후 소련으로 신병이 인도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권총 자살을 하고 마는데, 그가 마지막에 남긴 말은 이러했다. "나는 루프트바페(독일공군)의 우두머리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루프트바페가 없다.") 캄후버가 고안한 Himmelbett 시스템만으로는 엄청난 수의 연합군 야간 폭격기부대를 저지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생각한 Hajo Hermann (당시 JG 300의 비행대장)소령은 새로운 야간 전투 방법을 개발해내었다. [ Hajo Hermann. 콘돌군단에서 폭격기 조종사로 시작하여, 2차대전 독일공군에서 혁신적인 전술까들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인물이된다. 그는 Sonderkommando Elbe(특수부대 엘베)의 창설자로 유명한데, 메서슈미트와 같은 전투기들을 연합군 중폭격기에 부딪치게하여 격추 시키고 조종사는 탈출한다는 자살 공격이 이 부대의 임무였다. 그의 전략은 갓 비행학교에서 나온 신참 조종사들을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극단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석방된뒤에도 나치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변호사가 되어 네오 나치즘이나 대전중의 잔학 행위로 기소된 나치 인사들을 변호하였다. (Sonderkommando Elbe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사이드 스토리로 올릴예정입니다.) ] 헤르만의 방법은 이러했다. 훈련받은 야간 전투기 조종사들을 Bf 110이나 Me 410과 같은 쌍발 전투기가 아닌 Fw 190과 같은 단좌 전투기에 태워서 하늘로 올려보낸후, 야간 폭격을 감행하는 영국 폭격기들을 따라다니던 Ju 88기들이 발사하는 예광탄과, 도시 곳곳에 설치한 특수 서치라이트를 이용, 레이더를 사용하지 않고 서치라이트의 불빛의 도움을 받아 보다 자유로운 전투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부의 전투기에 낙소스 레이더 시스템을 설치하여 폭격기 탐지 효과를 극대화 하려하였다. 물론 캄후버의 야간 방공 시스템에도 서치라이트가 사용되긴 했었다. 하지만 캄후버는 이들을 Himmelbett 존에 분산시켜 배치한 반면, 헤르만은 폭격 목표가 되는 도시에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다. 특히 수도 베를린 지역은 서치라이트 벨트라고 불러도 될정도로 많은 서치라이트가 설치되어, JG 300 '야생 맷돼지'들의 이상적인 전투 공간을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1943년 7월, 함부르크가 연합군 폭격기대에 의해 폐허가 되자, 괴링은 헤르만의 견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곧바로 JG 300(Wild Sau : 야생 멧돼지가 부대마킹이다)에 야간 전투 준비를 명하였다. 7월 28일, 함부르크에 2차 폭격이 개실될 무렵, 헤르만과 휘하 12기의 Fw 190기들이 처음으로 야간 요격을 위해 날아올랐다. 헤르만의 작전은 캄후버의 것을 신속하게 교체하였다. 8월 24일의 밤은 야생 멧돼지들이 사냥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밤이었다. 이날 베를린 상공에서 총 56대의 중폭격기가 격추 되었으며, 일주일뒤에는 47대의 폭격기가 격추된다. 단 3번의 폭격 임무에서 영국 왕실 공군 폭격기 부대는 123대의 4발 중폭격기를 잃게되는 뼈아픈 손실을 겪어야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독일 공군 수뇌부에서는 조심스런 낙관론이 감돌 게 되었고, 성공을 인정받은 헤르만은 대령으로 진급하여 JG 301과 JG 302 부대의 창설을 허가 받고 자신이 원래 지휘하던 JG 300까지 모두 3개의 비행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 JG 300소속의 Fw 190A-8 ] 이부대들은 제 3 전투기 사단을 형성하여, 영국 왕실 공군 원수였던 아더 해리스가 호언장담한 베를린의 완전한 파괴(그는 베를린의 완전파괴에 400대가 넘는 아군 폭격기를 손실할 것이라고 말했고 하지만 이것을 전쟁의 승리를로 맞바꿀 수 있다고 했다.)를 막기 위해 열심히 날아올랐다. 헤르만 자신도 50회가 넘는 야간 출격을 감행하여 9기의 폭격기를 격추 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그의 전략은 분명히 성공적이었으나, 제 3 전투기 사단의 피해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1944년 3월까지 총 16번의 대규모 폭격이 베를린을 목표로 이루어졌는데, 그동안의 요격작전에서 아군기의 전투외 사고율이 너무 높아 이는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 손실을 초래하였다. 결국 전투력이 약해진 사단은 3월에 해산하게되고, 그뒤로는 쌍발 전투기에 리히텐슈타인 SN-2 레이더(영국폭격기가 뿌린 채프에 방해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를 장비하고 전투에 투입하는 zahme Sau(길들인 멧돼지) 방법이 사용되었다. Me 410도 앞에서 언급 했듯이 야간 전투기로 제작해도 손색이 없었을 기종이었지만, 야간 전투기 형이었던 Me 410D형(SN-2레이더 탑재형)은 개발중에 종전이 되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NJG는 대전중에 한번도 Me 410을 타고 날아오를 수 없었다. |
연합군의 호위기가 늘어남에 따라 Me 410이 주간 요격작전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계속 희박 해져만 갔고, 결국 독일 공군은 Me 410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쌍발 비행기들의 생산을 줄이고, 제트 전투기나 단좌 전투기생산과 그 부대 양성에 집중하게 되었다. 쌍발전투기 부대를 운영하는데에는 더많은 연료와 탄약, 지상요원이 필요했으므로 무너져가고 있었던 독일 군수물자 생산력과 갈수록 심해지는 인적 자원 부족을 감안하자면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곧 ZG 부대들의 재편성이 이루어졌다. ZG 76 제 1 그루페는 더 이상 손실을 메꿀 새로운 Me 410기체를 받지 못하였고, JG 76으로 이름을 바꾸고 Bf 109G-10을 받게 되었다.
제 2 그루페는 Fw 190를 받고, 초록 하트 부대마킹으로 유명한 JG 54의 제 2그루페가 되었다. ZG 26도 이름을 JG 6으로 바꾸었는데, 제 3그루페는 운이 좋게도 Me 262 제트 비행기를 받게 되었고, 나중에 우리가 아는 세계 최초의 제트전투기 부대인 '코만도 노보트니'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런식으로 ZG 26, ZG 76이 해산되면서, Me 410는 더 이상 폭격기 요격용이 아닌 정찰 임무나 같은 2선급 임무 사용되게 된다. 일부 Seenot Gruppe(해양구조비행대)에서도 Me 410을 사용하였다.
종전후 소련과 미군, 영국군 모두 이 기체에 관심을 보여, 각국의 마크를 달고 시험 비행을 거치게 된다.
[ Seenot Gruppe 81의 Me 410B-6/R2이다. FuG 200 레이더를 장비하고 있다. ]
Messerschmitt Me 410A-1 Horni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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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 : 2x 다이믈러 벤츠 DB 603A 12기통 수냉식 엔진(각 1,750마력) 전장 : 12.4m 전폭 : 16.38m 전고 : 4.2m 무게 : 최대 10,659kg 속도 : 388mp(624.4kph) 한계고도 : 9,997km 항속거리 : 2,333km 무장 : 표준 무장은 Me 210Ca-1과 동일 표준무장외 다양한 키트 장착 가능 |
Me 210은 원래 독일 공군 생각대로라면 시험 비행을 마치고 하루 속히 Bf 110을 대신하여 전장에 투입되었어야할 기체였지만, 기체 결함 때문에 제대로된 Me 410이 나오기까지 너무도 많은 시간과 비용을 소비하게 되어, 엄밀히 말하자면 만들지 않으니만 못하게 된 기종이었다. He 177과 Me 210/410을 번역하면서 이탈리아가 전투기 선정을 하면서 보인 비합리성, 비효율성(복엽기를 계속 양산한다던가 로비에 현혹되어 성능이 떨어지는 전투기도 양산허가를 내린다던가)을 독일공군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독일에는 수많은 쟁쟁한 전투기 제작사가 있었으므로, 자원의 효율적인 투자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메서슈미트 사가 제작한 것이라도 실전 배치하기 어려운 결함이 있다면 전투기 경쟁에서 배제하고 차선책을 찾아보았어야 마땅했다.
[ 영국 왕실 공군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Me 410A-1/U2이다. 워싱턴에 있는 박물관에도 한기가 더 전시되어있다고 한다. ]
출처 : 불타는하늘
첫댓글 조회수 0에서 봤다는. 내용 무시하고 댓글부터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