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내가 어제 발가락을 삐었어...마중 좀 나와주면 안되겠니? ㅠㅠ"
며칠 전 서울로 '문화적 바람(?)'을 쐬러갔던 두루마리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녀는 한 달에 한번 서울로 나들이를 가는데, 대전을 거쳐 KTX를 타고 내려오는 중이었다. 친구가 아프다는데 별수있나...난 차를 가지고 시간에 맞춰 그녀가 온다는 '구포역'으로 나갔다. 우린 오늘, <영원과 하루>를 보러 가기로 약속해 둔 상태였다.
공사때문에 역앞이 매우 복잡하던 구포역...순경들이 진을 치고 있어 역 바로 앞에는 주차를 못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두고 있는데 도착했다는 그녀가 오질 않는다. '참, 짐가방도 두 개나 된다고 했었지...' 비상등을 켜두고 역앞으로 가니, 화장을 매우 야하게(?) 한 웬 아줌마가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나오는 게 보였다. 나를 발견하곤 '씨익~' 멋적게 웃던 그녀...귀엽다~
어젯밤 머물렀던 어느 지인 집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발가락을 삐끗했다는데 퉁퉁 부은 새끼발가락이 좁은 구두 안에서 얼마나 아팠을까...난 그녀가 부탁한 슬리퍼를 꺼내 신게 했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영화는 다음으로 미루고 병원부터 가자고 했더니 씩씩한 그녀, 괜찮다며 영화부터 보잔다. ㅋ
시네마테크를 향해 달리는 차 속에서 그녀의 걸쭉한 입담은 시작된다. 서울 가서 본 공연 얘기며, 만났던 사람들 얘기며, 사이사이 그녀만큼 재미있는(?) 가족 얘기가 끼어들기도 하고, 어쨌든 속사포처럼 내뱉는 그녀의 이야기들은 언제 들어도 흥미롭다. 간혹 목소리가 너무 커서 운전하다 깜짝깜짝 놀라는 경우를 제외하곤...
근데 오늘, 길 위에서 만나는 인간들은 왜 한결같이 운전습관들이 무매너인지 가끔 나도 모르게 욕(욕이라 해봤자 '미친~'...'~새끼' 정도이지만)이 튀어나온다. 내가 "친구야, 나 욕해서 놀랐지?" 그러자 "아냐, 멋지다. 넌 좀 그렇게 살아야 돼~"한다. 사실 난, 욕을 잘 할 줄 모른다. 그 흔한 십원짜리 욕도 입에 담기 어려워하고, 욕 하는 걸 싫어한다. 그런 내가 십 년 가까이 운전을 하며 그나마 터득한 욕이 그 정도이니 그녀가 힘을 실어줄 만도 하다...
남자들이 신는 곤색 슬리퍼를 신은 친구와 영화를 보는 것, 내 머리 털나고 첨 있는 일이었지만 아무튼 우린 영화를 별탈없이 잘봤다. 그녀는 휴지로, 난 손수건으로 눈물까지 찍어내 가면서...(<영원과 하루> 얘긴 'Diary'에 썼으므로 생략하겠음)
런닝타임 두 시간이 넘는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이미 저녁...24시간 동안 풀로 가동하는 정형외과가 다행히 시네마테크 근처에 있었다. 차 속에서 "김미숙"을 듣고 있는 사이 새끼발가락에 '기브스(발가락이 금간 것도 아니고 부러졌다더란다, 세상에...그런 채로 서울서 부산까지, 열차 놓칠까봐 걷고 뛰고, 그것도 영화까지 봤으니...의사가 혀를 차더랜다)'를 하고 나타난 그녀...웃을 수도 없고...참 난감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지내야 한다는데 유난히 뽈뽈거리고 다니길 좋아하는 그녀가 어찌 견딜는지...
시네마테크로 가는 차 안에서 김밥 몇 줄 나눠먹은 것이 오늘 섭취한 밥의 전부였던 우리에게 배에서 서서히 신호가 왔다. 그 다음 코스로는 밥통님 댁으로 '김장 김치'를 얻으러 가야 했다. 맛은 없지만 가져가라고(겸손하신 밥통님...지금껏 대접받은 음식들, 다 얼마나 맛있었는데...^^)...며칠 전 전화가 오셨더랬다. 그녀, 도시고속을 타잰다. 난 워낙 고지식해서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은 잘 안가는 편인데 그녀가 길을 안다며 빨리 타란다. 믿고 도시고속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얼마 못가서 내려가야 할 길을 놓쳐 버렸다. 그녀가 길안내를 잘못한 것이다. 난 배가 고프면, 그래서 에너지가 다 소진되면, 막 식은땀이 나고 신경질을 부리는 증세가 온다.(아무래도 당뇨(저혈당)가 아닌지 몰라~^^;;) 그녀, 그런 날 의식하고는 연신 "친구야, 미안하데이~ 죽을 죄를 졌데이~" 혼자서 난리부르스를 춘다. 그런 그녀가 우스우면서도 난 더 일부러..."야, 그런 말 하니까 더 짜증 난다 아이가, 좀 그만해래이~" 그러고 말았다.
길이 막히니 미안해서인지 되돌아가자며 보채는 그녀...자꾸만 내 눈치를 보는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고 대충 가다가 다시 불법 유턴(나, 이런 것도 잘 안하는데 그녀가 하재서...ㅎㅎ)을 해 반대편 도시고속으로 올라탔다. 대책없이 고지식한 나와 대책없이 천하태평인 그녀, 우린 참말로 미스테리한 단짝이다.
우여곡절 끝에 당도한 밥통님의 집. 밥통님의 마음이 사시는 '촌집'이 아니라, 밥통님의 몸이 사시는 '고촌(여기두 촌은 촌이네~^^;)마을'로 왔다. 변두리라 시골 들녘도 보인다. 겨울 저녁의 들녘...밥통님께선 우리를 먹일 '시래기국'과 '고등어 조림'을 끓이고 계셨다. 살림 사는 여자, 밥통님...
KBS-FM이 흐르고 있던 작고 아담한 부엌, 그 한켠의 식탁에 몸을 앉힌 두루마리와 나, 미리 먹기좋게 썰어놓으신 생김치와 무김치...밥이 나오고, 시락국이 등장하고, 고등어조림이 차려지기 무섭게 우린 밥을 먹어댔다. 너무나 맛있게 밥을 먹는 우릴 곁에서 흐뭇하게 지켜보시던 밥통님,(그러나 본인은 정작 잘 안드신다. 같이 드시면 좋을 텐데...)먹성좋은 우리가 고등어조림을 비우고, 시락국을 비우고, 밥공기를 한 공기하고도 반씩이나 더 비워낼 동안 그렇게 우릴 가만히 바라만 보고 계셨다.
구석구석 밥통님의 손때가 묻은 살림살이들이 차곡차곡 쟁여져 있던 소박한 부엌, 맛난 커피까지 얻어마신 우리가 설거질 해드리겠다고 떼를 써도 한사코 거부하시던 밥통님...'마음의 집' 수돗가에선 해도 내버려 두셨는데...'몸의 집'은 부엌이 너무 비좁아 시키고 싶지 않으시단다. 밥통님만이 하실 수 있는 부엌이란다...(서운~^^;;) 실로 오랜만에 맛있고도 안온한 식사를 하게 한 부엌, 벌써 그립다.
이것저것 싸주신 '김장김치' 보따리(혼자 사는 내 것이 더 크다...언제나 두루마리보다 모딜을 더 챙기시는 밥통님의 마음이 감사하고, 그걸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는 두루마리에겐 고맙다)를 하나씩 들고 밥통님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오는 길, 멀어지는 밥통님의 모습을 뒤로 하며 돌아오는 차 속에서 우리 얌체같은(늘 먹어드리기만 하고 받기만 하니까) 단짝들은 밥통님 같은 분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건 복이라고, 행운이라고, 앞으로 실망시켜 드리지 말고 더 잘하자고, 초등학생 같은 다짐을 했다.
아~ 만나면 언제나 '좋은' 느낌이 드는 사람들...척~하는 밥맛들보다는, 마음이 훈훈한 사람들...같이 울 수 있는 사람들...작은 것이라도 언제든 나눌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내 마음을 나보다 먼저 알고 손 내미는 사람들...내 기분을 나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말 걸어주는 사람들...그들 덕분에 이 겨울이 스산~하지만은 않다...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서 아직은 살 만하다~~~^^*
첫댓글 ㅎㅎ 부럽네여~ 기브스하고도 영화를 볼수있다는 그 열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