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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수수께끼같은 인연(1)
도준의 경고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처벌은 엘스커피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결혼시즌이 선과 한복집 식구들을 정신없이 바쁘게 만들었을 뿐이다.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결혼시즌의 한 가운데에서 수많은 보급품들과 무기들이 나르며 치열한 전투를 펼치듯 밤낮 없이 주문에 따라 한복제작의 기한을 맞추기 위해 손을 놀리고 발을 놀렸다.
모두가 잠이든 이른 새벽녘, 선과 상구만이 남아있었다.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깐 눈을 붙이겠다며 휴게실의 침대에 누운 상구는 한시간째 깊은 숙면 중이었다. 상구를 돕느라 자지 못한 선도 피곤하기는 매 한가지였지만 지금 엎어져 잠이 든다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잠을 자지 않은 쪽을 택했다.
헤롱헤롱 앞뒤도 분간하지 못하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일층 탕비실로 내려가 창문을 열고 원두가루를 찬장에서 꺼냈다. 쓴맛이 강하고 맛이 단조로운 스마트라 커피다.
클리버에 종이필터를 접어 끼우고 커피가루를 잔뜩 집어넣은 다음 물을 붓는다. 먼 산을 바라보며 1분동안 휙휙 젓는다. 곁눈질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대충 삼분이 지난 것을 확인하고 클리버를 컵 위에 놓는다. 시커멓고 뜨거운 커피가 컵으로 떨어진다. 평소보다 많은 양의 커피가루로 인해 간밤의 피로는 단번에 녹일 만큼의 진한 커피가 완성되었다. 흑빛 물결이 목을 타고 흘러 몸속으로 내려앉으면 몸 안의 어두움이 자연 밀려날 터이다.
두잔 가득힌 담긴 신선한 커피를 들고 나와 창으로 스며드는 새벽빛의 바라본다. 오늘도 정신없이 바쁜 하루가 될 것이다. 향만 맡은 커피를 창가에 내려놓고 탕비실로 돌아가 클리버의 뚜껑을 닫아 다음을 기약하며 한쪽으로 치운 뒤 커피포트에 커피를 내린다. 정리를 마치고 커피잔의 뚜껑을 찾아들고 나와서 내려놓은 커피를 들고 뚜껑을 덮은 후 삼층 작업실로 올라간다. 잔을 한쪽 귀퉁이 창가에 내려놓고 작업실의 모든 창문을 연다.
선은 직원들이 피곤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작은 휴게실의 간의침대에 누워있는 상구를 깨웠다.
“강상구씨!”
큰소리로 불렀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강상구씨, 청소하자!”
여전히 요지부동
“강구야!”
퍽
선이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상구의 옆구리를 때리자 상구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니미!”
“상구씨, 욕하지 말고 일어나서 청소하자.”
상구가 오만상을 쓰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일어나 앉으며 옆구리를 문질렀다.
“워메, 내장 다 쏟것네.”
인상을 쓰며 앉아있는 상구의 옆으로 다가간 선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상구오빠야, 청소하자고.”
“알았다고.”
상구가 마지못해 일어나자 선이 먼저 작업실로 나갔다. 선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천조각 하나를 집어 들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대충 묶고 나서 도구들을 각각의 도구 상자에 넣고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들을 모와 바구니에 담고 완성된 한복들은 다림질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작업대의 먼지를 털어낸다. 화장실에서 손걸래를 빨라 작업대와 테이블, 미싱과 창문들을 닦고 빨아서 건조대에 널어놓은 후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있을 때 상구가 밖으로 나왔다.
“오빠, 대걸래로 바닥 닦아줘.”
“오야.”
상구가 대걸래를 가지고 오자 선이 준비해 놓은 커피를 내밀었다.
“이거 쭉 들이키고 일하자.”
“누가 보면 보약인줄 알것네.”
“오빠 보약 먹고 싶어?”
“말이라고.”
“덩치 값 좀 해.”
“나도 예전 같지 않아야.”
“지금도 겁나게 거시기 하구만.”
“뭐가 겁나게 거시기 허냐?”
“몰라, 일단 청소 열심히 하면 보약 사 줄게.”
“허벌라게 거시기 허네. 기다려보소. 내 바닥에 구멍이라도 내볼라니까.”
선의 말대로 상구가 식은 커피를 단순에 들이키고는 미친듯이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강구씨, 파이팅.”
“계속 강구라하면 디진다.”
상구가 낮게 경고하자 선이 키득키득 웃었다.
“안할게.”
청소를 끝내 놓고 선은 한동안 멍청하게 서있었다. 쏟아지던 잠은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있었지만 피곤으로 뻑뻑해진 눈과 허기진 몸과 떨어진 당으로 인해 정지한 뇌를 한동안 쉬게 할 필요성이 있었다. 한참이나 팔을 늘어뜨리고 서 있던 선이 창가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커피를 집어 들고 상구가 그랬던 것처럼 단숨에 들이켰다.
“캬아”
깨끗하게 비워낸 커피잔을 바라보고 뿌듯하게 웃던 선이 잔을 들고 상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상구는 다시 휴게실에 들어간 모양인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선은 혼자 일층으로 내려와 탕비실로 들어가 컵을 씻고 페퍼민트차를 우려내어 들고 나와서는 창가 옆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텔레비젼을 켠다. 턱을 괴고 앉아 아침을 여는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인다. 핸드폰으로 이메일을 열어 밀려있던 서류들을 확인했다.
날이 밝아 오고 아침은 눈부시다. 나른하게 졸려 오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한다. 발목부터 시작해 목을 풀어 주고 있을 때 쯤 풍경이 요동치며 소리를 낸다. 문이 열리고 진이 들어섰다.
선은 돌리던 목을 마저 돌리며 진에게 인사를 건냈다.
“어서옵쇼.”
“좋은 아침”
신발을 정리하고 들어서는 진이 선을 보고는 걱정스레 물었다.
“어제도 밤샜어?”
“그럼, 그럼.”
선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대답했다.
“오늘도 밤샐거야?”
“그럼, 그럼.”
역시나 추임새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언제까지 밤샐거야?”
“몰라, 몰라.”
이번에는 도리질이다.
“아르바이트라도 쓸까?”
진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인상까지 써가며 고민하는 척을 하던 선이 다시 도리질쳤다.
“아니, 아니.”
“대답하기 귀찮아?”
“그럼, 그럼.”
생각 없이 선이 쿨하게 대답했다. 귀찮아하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선이었지만 오랫동안 야근을 한 피곤함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진이었다.
밀려드는 주문으로 작업실불이 꺼지는 날 없이 밤낮 일하며 힘겨운 성수기를 보내느라 모두 녹초가 되어있었다. 특히나 선은 퇴근도 않고 작업실에서 먹고 자며 기한을 맞추기 위해 쉬지 않고 일했다.
선은 한복디자이너다. 갈색 눈과 갈색 머리카락의 하얀 피부를 가진 특이한 한복디자이너다. 외국인처럼 보이는 이 한복디자이너는 분명 몇 프로의 한국인의 피를 물려받은 한국국적의 한국사람이다. 외모야 어찌되었든 한국을 사랑하고 한복을 사랑하는 한복쟁이 김선이다.
쉬지 않고 일하는 선을 진은 무척이나 걱정했다.
“어머님이 너 먹이라고 전복죽 챙겨주셨어.”
“우와, 사장어르신이 나를 위해?”
피곤에 치이고 허기에 지쳤던 선이 눈을 반짝이며 진에게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선에게 진은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많이 먹고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와.”
진의 손에서 도시락을 받아 든 선이 가자미눈을 하고 진에게 따져 물었다.
“사장어르신이 싸준 도시락에 왜 언니가 생색이야?”
“재료는 내가 샀으니까.”
“그럼 언니도 같이 먹고 돈 많이 벌러 가자.”
“너 돈 벌어 오라고 주는 건데 뺏어 먹을 수야 있나. 그리고 난 이미 먹고 왔지.”
“역시 우리 언니는 멘탈 갑이다.”
“그럼 넌 멘탈 을이니?”
진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키득 웃자 선이 어의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배고파, 입씨름 그만하자.”
선이 받아 든 가방을 열어 도시락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진이 다시 웃으며 놀려댔다.
“씨름은 입으로 하고 삽바는 머리에 맨 김선씨 많이 먹어.”
진이 말하며 키득거리며 웃자 선이 고개를 들고 진을 쳐다봤다. 한손은 입을 가리고 한손은 선의 머리를 가리키자 그제서야 생각이 난듯 청소를 하기위해 머리카락을 묶어 놓았던 천을 풀어내며 피식 웃었다.
“삽바라니, 한올에도 정성이 들어간 귀한 천인데.”
“삽바도 귀한 천으로 만들거든?”
“이 천으로 말씀드리자면 나의 혼과 넋이 보태진 귀한 천이야.”
“지금 넌 넋이라도 있고 없고 인데? 귀하신 넋은 얼마나 하는데?”
“서른마흔다섯원.”
“얼씨구.”
선이 측정불가의 혼과 넋을 자랑하자 진이 피식 웃어주었다.
“장난 그만치고 어여 밥이나 드셔.”
진이 창가 탁자 쪽으로 선의 등을 밀고는 탕비실로 걸어갔다. 진에게 건네받은 가방을 들고 창가에 앉아 도시락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첫 번째 도시락에는 소담하게 담긴 갖갖이 나물반찬이며 고기반찬이 들어있었고 두 번째 도시락에는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전복죽이 담겨 있었다. 몇날 몇일 밤색 작업을 하느라 깔갈한 입안에 침이 고였다. 마지막 도시락은 확인해 보지 않아도 과일이 들어있을 것이다. 바쁜 며느리를 대신에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시는 건 물론 그 동생까지 챙겨주시는 사장어른의 마음씀씀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풋이 웃으며 탕비실에 들어간 진을 향해 목청껏 외쳤다.
“언니, 윗층에서 상구오빠 자고 있으니까 빈 그릇 갖다 줘. 오빠꺼 따로 챙겨 놓게.”
“알았어.”
“잘 먹겠습니다.”
진이 빈 그릇을 들고 오자 재빨리 자신의 몫을 덜어 담고 무서운 속도록 죽을 퍼먹기 시작했다.
“가사하다고 저네죠.”
“감사하다고 전해달라고?”
“이야, 개떠가치 마래도 차떠가치”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기 힘드니까 입에 있는거 다 씹고 이야기 하면 안될까?”
“우적우적”
“덤으로 조신하게 먹어주면 더 고맙고.”
“으응”
선의 반응에 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선이 정신없이 주린 배를 채우는 사이 진은 매장을 둘러보고 테이블이 닦고 진열대를 청소하고 먼지를 털어냈다. 그릇에 코를 박은 체 청소하는 진을 쳐다보고는 선이 투정을 부리며 말했다.
“불쌍한 민초가 식사하는데 청소는 나중에 하면 아니되옵니까?”
진이 선은 보지도 않고 진열대를 관찰하며 대답했다.
“다 먹었잖아. 도시락까지 씹어 먹을거 아니면 이만 정리하시지.”
도시락이 너무나도 맛이 있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상구의 몫을 잠시 쳐다보고 있던 선이 결단을 내리고 도시락의 뚜껑을 덮었다. 도시락을 탕비실 냉장고에 넣어두고 나오자 진이 선을 불렀다.
“헤이, 잠깐 여기에 앉아봐.”
“내 이름은 헤이가 아니거든요?”
선이 오지 않자 진이 호칭을 정정하며 다시 불러 주었다.
“김선씨, 잠시 여기와서 앉아 주시겠습니까?”
“네, 이진씨.”
선이 상냥하게 대꾸하며 사뿐히 걸어와 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진이 보온병에 준비해 온 시원한 매실차를 잔 가득히 따라 선에게 건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라 졸음이 몰려온다. 선은 진에게 피곤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일곱시 반 밖에 안됐는데 한 시간만 자고 나오면 안될까?”
“안됩니다.”
역시나 진의 대답은 예상처럼 빠르게 나왔다.
“쳇”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실거야.”
“중요하지 않는 손님이 있었던가?”
피곤함에 투정을 부리는 선을 잠시 따가운 눈초리로 쳐다보던 진이 말을 이었다.
“중요하지 않는 손님은 없지만 나보다 너한테 중요한 손님이잖아. 잘 들어놔. 실수하지 말고.”
“나는 맨날 실수만 하는 사람이야?”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조용히 하고 있을게 계속하세요.”
“오늘 광복어르신 오시는 날이야. 알고 있지?”
“그게 오늘이었던가?”
“어허”
볼을 긁적이며 딴청을 피오는 선을 진의 나무라는 눈초리로 쳐다보자 선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결혼식 입고가실 옷 두어벌 지으신다고 하셨어. 먼 친척 결혼이라 주인집보다 눈에 띄지 않고 화려하지 않지만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색감에 지나치게 단조롭지 않고 넘치게 풍성하지 않는 것으로. 격식있고 품위있게 지어달라 하셨어. 자세한건 방문하시면 같이 이야기 하면 되고.”
“어르신 안목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진이 잔소리하기에도 지쳤다는 듯 체념하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매장엘 나오신데?”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선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다. 칠칠치 못한 선의 행동에 입을 한 대 때려줄까 하다가 참으며 진이 대답했다.
“손주분이랑 같이 바람이라도 쐴겸 나오신다는데.”
“그래? 에고, 모처럼 준비라도 해볼까?”
선이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준비한다던 말다는 다르게 작업실로 가지 않고 진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선이 향하는 방향을 본 진이 선의 등 뒤에 대고 급하게 물었다.
“준비한다더니 왜 그리로 들어가?”
선은 사무실의 문을 열고 고개만 살짝 돌린 뒤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 했다.
“입하고 손만 준비하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해?”
“보통손님 아니라고 꼼꼼히 준비한다며?”
“단골손님에 대한 준비는 항상 마음으로 되어있지.”
“그래도 매장에는 드물게 오시잖아.”
“걱정 붙들어 매셔.”
문을 닫으려는 찰라 진이 다듭하게 외쳤다.
“야. 김선!”
“왜. 이진!”
큰손님을 맞이할 준비로 마음이 다급한 진과는 달리 선은 건성건성 대충대충 얼버무리고 있었다. 상황이 코앞에 닥치면 자동으로 해결된다는 것처럼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모습이 진은 못마땅했다. 문이 닫히려는 틈세로 진이 소리를 질렀다.
“실수라도 하면 가만히 안둘꺼야!”
“옛썰.”
진은 오늘하루도 순탄치 않을 거라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