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 백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독도는 우리 땅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동경 백삼십이 북위 삼십칠
평균기온 십이도 강수량은 천삼백
독도는 우리 땅
오징어 꼴뚜기 대구명태 거북이
연어알 물새알 해녀 대합실
십칠만 평방미터 우물 하나 분화구
독도는 우리 땅
지증왕 십삼년 섬나라 우산국
세종실록지리지 오십쪽 세째줄
하와이는 미국 땅 대마도는 몰라도
독도는 우리 땅
러일전쟁 직후에 임자 없는 섬이라고
억지로 우기면 정말 곤란해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 땅
조선말기 26대 고종시대에 말하기를..
독도의 옛 명칭은
삼봉도(三峰島), 우산도(于山島),자산도(子山島),
가지도(可支島)라고 불렀다.
그 후 1881년(고종18년)부터
독도(獨島)라고 부르게 되었다.
1883년 4월 고종 20년에 16호 54명을
울릉도에 입거(入居)시켰다.
고종재위 35년인 1898년
광무 2년 5월에 지방관제를 개칭하여
울릉도에 도감을 두도록 했다.
이는 일본인들이 잠입하여 수목을 벌채하고
주민들과의 분규가 잦았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울릉도의 호구는 400여 호 1,700명 정도
경지는 7,700여 마지기에 달하였다.
일제 침략의 첫 희생물 독도 문제는
20세기 초 일본 제국의 조선 침략에서 비롯된
아주 오래된 문제이자
동시에 오늘날의 제국주의 문제이다.
독도는 조선 침략의 첫 번째 제물이었다.
암초 섬으로 이뤄진 독도는 비록 사람이 정착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울릉도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선인이 자주 오가며 이용해 온 조선 땅이었다.
조선시대 문헌상에도조선 국가는 이미 15세기에
조세 관리를 위해 독도를 공식적으로 탐찰했고
이를 기록에 남겼다.
반면에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것은
1905년에야 시작된 일이었다.
울릉도, 독도 일대의 섬들을 가리키는
혼란스러운 명칭들이 정리되고
비로소 ‘다케시마’라는 일본식 용어가
독도를 뜻하는 것으로서
통일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었다.
당시 일본은 한 해 전인 1904년부터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일본은 본격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눈독 들이기 시작했다.
동해안에서 러시아를 견제하는 데
필요한 군사적 거점으로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1905년 2월 22일
일본은 독도를 강탈했다.
조선에 어떠한 공지도 없이 시마네현 고시를 통해
자국 영토로 편입시킨 것이다.
1905년 2월 22일에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로 명명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써 그 영토를 편입했다.
곧 러일전쟁 중에 무력을 앞세워
국제깡패 짓을 하여 독도를 강탈해갔다.
일본 측은 당시 조선 정부가
적극 항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도는 주인 없는 땅이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그 시기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종속돼 가고 있었다.
일본은 1904년 2월 무력을 앞세워
조선을 보호국 체제로 뒀고,
1905년 11월에는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오늘날의 일본 제국주의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1945년 조선은 식민지에서 해방됐다.
원칙대로라면 당연히 모든 조선 땅은
조선에 돌려줘야 했다.
1946년
일본 도쿄의 연합국 최고사령부가 발표한
지령(SCAPIN,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Instruction:
연합국최고사령관지령) 677호에 첨부한 지도인
독도가 한국영토로 표기돼 있다.
즉 세계2차대전 후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명시한
국제문서로는 연합국최고사령부지령(SCAPIN)
제677호가 있다.
당시 일본 도쿄에 설치된 연합국최고사령부는
1946년 1월 9일 발표한 지령(SCAPIN) 제677호에서
일본의 영토에서
울릉도와 독도와 제주도를 제외한다고 명시했다.
첫댓글 잘 듣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