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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일 | 대표 기도 | 시 기도 | 헌금 기도 | 공동 식사 | 절기/행사/회의 |
6월 28일 | 이란희 | 서선미 | 이신정전도사 | 박성호 | 전체회의 |
7월 5일 | 이샛별 | 박성호 | 이신정전도사 | 이란희 | |
7월 12일 | 공은주 | 정명수 | 박연옥 | 최형미 | 임원회의 |
7월 19일 | 이수정 | 최형미 | 이신정전도사 | 안태형 | |
7월 26일 | 박성호 | 정한결 | 이신정전도사 | 이수정 |
* 말씀요약 및 후기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 공포를 조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또 여름철이면 공포 체험을 위해 시원한 극장을 찾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공포의 원형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거세 공포'라는 걸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듣게 되었다.
성차를 떠나 공히 인간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걸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 두려움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구성하며 상징적 질서, 구성된 세계에 적응하게 한다.
한국사회에서 3저 호황을 누리며 소비자본주의의 단맛을 맛보았던 사람들은 97년 구제금융시대를 거치며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주체로 재구성되었다. 즉, 자본주의의 파국을 절대적 공포로 구성하는 데 성공한 것.
이후 진정한 혁명에 대한 이상, 진정한 욕망의 대상을 꿈꾸는 것은 완전히 억압된다.
이 억압으로 인해 우리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열어내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란 모든 주권이 하느님에게 있다는 믿음이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을
상실했다는 대상 상실의 고통과 허무의 시간을 동반한다.
하지만, 우리가 상실한 것이 원래 우리 것이 아니었다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 대신 우리는 믿음으로 인해 영원히 가질 수 없던 것을 갖게 되는 세계에 들어선다.
라캉은 도스토에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금지된다" 거기서 인간은 무엇을 해도 죄책감에 휩싸인다.
하지만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이다.
즉, 우리 삶에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진정 우리가 바라는 것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에드가 알란 포우의 단편소설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다>에서는 훌륭한 은유를 제공한다.
바다에서 배는 하나의 세계이자, 구조, 체계이다. 우리는 배 안에 있어야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배가 우리의 궁극적 지반이 아닐 때, 배에 우리 몸을 묶는 것은 궁극적 파멸을 의미한다.
(이 대목에서 세월호 참사가 떠올라 깜짝 놀랐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이때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물통 하나에 우리 몸을 묶어야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소용돌이 속에 빠져든 이 배는 우리 삶을 보증해줄 체계가 아니다.
(세계자본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소용돌이 안에 있는 우리의 현실 국가, 체계는 우리 삶을 보증해주지 못한다)
오늘 말씀에서 혈루증을 앓고 있는 부정한 여인은 그녀의 욕망 때문에 금지기제가 작동, 여자 스스로 자신의 삶에 붙박아두려는 증상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람들의 무리를 뚫고 예수의 옷깃에 손을 뻗어 댄 것은 사회가 규정해준 것을 더 이상 지속시키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몸짓이다.
그녀가 손을 내미는 순간,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억압, 사탄의 기운은 사라진다.
어떤 욕망에 자기 자신을 붙박아두는 것은 오늘날 우리 욕망의 상황을 반영한다.
우리는 두려운 것을 피하기 위해 더 끔찍한 것에 몸을 맡긴다.
공포는 우리를 이 현실에 붙박아두는 수문장 역할을 한다.
이것에 대적하는 것은 오직 믿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