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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동아시아 역사 토론장 중국 사료 송서에 기록된 왜왕 무의 남조 표문(외교문서)의 신뢰성
공실불 추천 0 조회 149 25.05.22 10:21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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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5.06.22 22:34

    첫댓글 삼국과 당시 왜의 기록과는 억색한 부분이 많은데, 좋은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잘 봤습니다

  • 25.06.23 21:13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백제와 스스로를 동일시 할만한 당시 왜 세력이 뭐가 있었을까요? 일본 역사는 거의 모르지만 나름 큰 세력이 있었겠죠?

  • 25.07.03 10:52

    5세기 일본서기의 천황은 2가지 원칙에 의하여 기록됩니다. (1)백제, 신라, 갸아 등 삼한 여러 나라를 다스리는 천황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다. (2)천황은 공립되어야 시호와 대수를 준다
    공립은 마한 최대 세력인 백제왕실과 혼인 동맹을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즉위는 했어도 공립이 안 되고 퇴위한 천왕은 즉위가 무효화되어 천황의 시호와 대수를 주지 않고, 앞이나 뒤의 공립된 천황의 재위기간에 포함되어 버립니디. 따라서 웅략의 즉위는 461년 11월이고 황후를 세우는 공립은 462년 3월인데 시변압반황자가 공립이 안 되고 죽자 그의 5년 재위기간은 웅략에게 포함된 것입니다. 따라서 즉위는 456년 11월로, 황후 세우는 공립은 457년 봄 3월로 이동됩니다. 462년에 오국에서 사신이 오는데 웅략의 즉위 축하 사신입니다.
    또 즉위는 했지만 공립이 안 된 천황은 대외적으로 왕이 아니라 왕세자를 칭해야 합니다. 그러다 공립이 되면 세자 자가 떨어지고 세자기간도 자신의 재위기간에 포함되게 됩니다. 따라서 5세기 천황들은 황후 세우는 일에 목숨을 겁니다. 제가 나중에 별도의 글에서 상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 25.07.03 10:59

    그리고 설령 표문을 보내온 왜왕 무가 일본열도의 군주 유라쿠가 맞다면 고구려가 일본열도를 침략하여 왜에 중대한 타격을 줬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고요.
    => 왜왕 곤지와 백제 개로왕 사이의 혼인동맹에 의하여 한 쪽이 공격을 받으면 다른 한 쪽이 군대를 보내 도와주어야 합니다. 장수왕이 한성을 침공할 때 곤지가 개로왕을 돕기 위하여 큐수지역 군대를 급파합니다. 그 구원군 사령관이 목협만치고 부사령관이 조미걸취입니다. 그래서 장수왕이 더 이상 남하를 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이고, 훗날 동성왕은 그 군사력을 기반으로 왕이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별도로 상세히 글을 올리겠습니다.

  • 작성자 25.07.10 02:36

    곤지는 백제 개로왕의 동생인데 무슨 개로왕과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마냥 혼인 동맹을 맺습니까? 사료와 어긋난 주장을 하고 있군요

  • 26.02.15 16:58

    @공실불 개로왕이 아이를 낳은 적이 없는 왕비와 아이를 임신한 왕비가 있다고 칩시다. 어느 여인을 데려와야 백제-왜 혼인동맹이 됩니까? 동맹이란 만일 왜국이 공격받을 경우 백제 개로왕이 도와주느냐 입니다. 당연히 개로왕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을 데려와야 혼인동맹이 되고 이를 왜국 백성들에게 인정받아 왜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응신은 침류왕의 딸을 왕후로 세우고 진왕으로 공립되고, 인덕은 처음에는 갈성대신의 딸을 왕후로 세우고 진왕으로 공립되었는데 정통성 시비가 일자 결국 아신왕의 누이로 왕후를 바꾸고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납니다. 이것이 소위 진왕제입니다.

  • 26.05.20 08:08

    웅략은 왜왕무와 생몰년대도 맞지 않고 오히려 웅략천황은 열도 출토 철검명에 보이는 획가다지로대왕 치세에라는 금석문을 보면 그는 어느 한 인물을 모델로 만세일계를 주장하기 위해 꾸며진 가공인물로 보입니다. 획가다지로대왕을 개로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왜왕무는 478년 송서 상표문에 '암상부형'이라 하여 별안간 부모형제가 한날한시에 죽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는 당시 동아시아 역사에서 475년 아차산성에서 벌어진 개로왕 일족의 고구려군에 의한 죽임이 유일합니다. 고로 왜왕무는 어린 시절의 사마왕 즉 무령왕으로 해석함이 가장 타당하다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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