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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의 천년고찰 고성 옥천사
옥천사 대웅전
옥천사 입구의 단풍
경남 고성군에 있는 옥천사(玉泉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로서 신라때 창건된 천년 고찰이다
676년(문무왕 10년)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대웅전 뒤쪽에 달고 맑은 물이 끊임없이 나오는 샘이 있어 옥천사(玉泉寺)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 때 그곳 종남산에서 지엄선사로부터 화엄의 뜻을 깨닫고 귀국해 화엄대의를 선양하면서 국내의 영지를 가려 사찰을 세웠는데 그것을 화엄십찰이라고 일컬었고, 옥천사는 그중 하나로
당시는 규모가 큰 대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나 최치원의 '법산화상전'에 기록되어 있는 화엄십찰 중에는 '연화산 옥천사'가 아니고 '비슬산 옥천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옥천사가 있는 연화산을 비슬산이라고 불렀다는 확실한 근거는 희박하며 비슬산이라는 명칭은 대구와 창녕에도 있고 창녕의 비슬산에 옥천사가 있었으나 오래전에 폐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고성의 옥천사가 화엄10찰중의 하나라는 이야기에 조금의 논란은 있는것 같다.
하늘에서 본 옥천사 전경
옥천사는 1208년(희종 4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중창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9년(인조 17년) 학명(學明)과 의오(義悟)가 삼창을 했다.
인조 17년(1639) 학명대사가 이 근처를 지나다가 대둔리 촌락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절터를 현몽함으로 이튿날 이 곳에 올라와 절터를 발견하고 수년 동안 초옥을 짓고 참선 수행하며 옥천사를 새로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옥천사사적기'에 의하면 1654년(효종 5년) 법당을, 1745년(영조 21년) 대웅전을, 1764년 자방루(滋芳樓)를 건립했다고 하며 1883년(고종 20년) 용성(龍城)이 중건하여 현재 대웅전·자방루·심검당(尋劍堂)·적묵당·명부전·팔상전·나한전·산신각·독성각·칠성각 등이 남아 있어 경남 일대의 천년고찰 중에서 가장 당우가 많은 절이다.
사역의 입구을 알리는 표식판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 정부는 바다 가까이에 있는 큰 사찰에는 의무적으로 승군(僧軍)을 두도록 하였다. 국토방위의 역할을 하여 전시(戰時)에는 전쟁터에 나서게 하였지만 평시에는 국가에서 필요한 노역을 시키기기 위해 조직토록 하였다
자방루는 이런 승군들의 훈련장이요 기거하던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다.
1800년(정조 24년)에는 어람지 진상사찰(御覽紙 進上寺刹)로 지정되어 병역및 각종 부역(負役)에 종이까지 만들어 받쳐야하니 부담을 이기지 못한 승려들이 도망을 쳐 한때 300여명이나 되던 승군들의 수는 100여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95호로 지정된 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를 비롯하여, 자방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반종(飯鐘: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0호)·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향로(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9호) 등이 있다. 이 밖에 1744년에 제작된 삼장보살도, 보물 1693호인 시왕도, 지장보살도 등이 있다.
옥천(玉泉)
원래 옥천사 경내에는 몸에 좋고 맑은 샘이 4군데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장군샘에서 나오는 물이 가장 맛이 좋았는데 어느 날 한 고승이 옥천사를 방문해 물을 마시더니 장군샘은 막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이 물은 기가 너무 세어서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힘이 넘쳐 사고를 많이 친다고 하였다. 사실 옥천사는 주변 대중들이 사고를 많이 치는 바람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실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고승의 말씀대로 장군샘을 막아버리니 그 이후로는 사고를 치는 대중이 없어졌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오는데,
이 이야기는 경주 기림사의 우물(오종수)에 담긴 이야기와 맥을 같이하여 이는 사찰을 좀 더 신성화(神聖化)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 일주문
일주문에는 '연화산옥천사(蓮華山玉泉寺)'라고 적혀있어 '화려하게 핀 연꽃 봉우리 밑에 맑은 샘물 솟아나는 절'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옥천사사적비(玉泉寺事蹟碑)와 공덕비(功德碑)
▶ 부도전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똑 언덕받이 산기슭에 평평하게 땅을 고르고 옥천사의 승탑을 모아놓은 부도전(부도전)이 있다.
앞줄에 2기, 뒷줄에 5기의 승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월암당(月庵堂), 백연당(白蓮堂) 외에 부도명은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 천왕문
북방다문천왕 동방지국천왕
남방증장천왕 서방다문천왕
천왕상의 생령(마구니)좌
사천왕은 부처에게 불법을 수호하겠다고 서원을 세운 분들로 사찰에 침범하는 일체의 잡귀나 잡신들을 막아주는 하늘의 천왕이며 수호신이다.
천왕문은 4분의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사천왕의 배치는 조선조에 공통으로 배치되는 방향으로 우 동방,북방천왕이며 좌 남방, 서방천왕이 입상으로 서있다.
이 천왕문은 1991년에 건립되었다
▶ 선경비와 하마비(下馬碑)
선경비각과 하마비
왼쪽 붉은 벽돌담 비각 안에는 1922년에 세워진 '증 호조참판 안공 선경비'가 있다. '안공'은 옥천사에 시주를 많이 한 인물이다.
선경비가 있는 담장의 앞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 및 궐문 앞에 세워 놓은 석비로 '하마(下馬)란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하마비는 왕이나 장군·고관·성현들의 출생지나 무덤 앞에 세워 놓기도 했는데, 이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로 여겨진다.
옥천사에는 임금의 수복(壽福)을 비는 축성전(祝盛殿)이 있었기 때문에 하마비가 세워졌는데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 청담(靑潭)스님의 사리탑과 탑비
하얀 화강암으로 다듬어 세운 청담(靑潭)스님의 사리탑과 탑비
옥천사는 진주에서 출생한 청담(1902~1971)스님이 26세에 출가한 사찰이다.
청담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총무원장과 종정을 두 번 역임하셨으며, 1969년 총무원장에 취임해 종단 발전에 헌신하다 1971년 11월 15일 세수 70세(법랍 45세)에 입적을 하셨다.
사리 15과는 스님이 주석했던 도선사와 문수암, 옥천사에 나눠 봉안했다고 한다.
이 사리탑은 2013년 5월 18일에 건립이 되었으며 사리탑의 우람한 귀부가 고개를 살짝 틀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자방루의 왼쪽 출입문 자방루의 오른쪽 출입문
옥천사는 조금 특이한 가람 배치를 하고 있는데 천왕문을 들어서면 7칸짜리 자방루가 눈 앞을 가로 막는다. 대부분의 절집은 마주하는 누각 아래를 통과해 주 불전에 이르게 되어 있는데 옥천사의 자방루는 누각 아래에 통로가 없다. 그래서 자방루의 양쪽에 있는 조그만 문을 통해서만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모두 건물로 둘러싸여 있어 다른 출입구는 없는 폐쇄적인 구조이다.
이것은 절집을 외부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방어적인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구조 생각할 수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승군이 주둔하면서 마치 성곽과 같은 이런 구조로 지었을 것이다
▶ 자방루(滋芳樓)
자방루 내부의 그림
자방루(滋芳樓)는 영조 40년(1764) 뇌원대사(雷遠大師)가 초창하고 고종 25년(1888)에 중수한 누각으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뛰어난 건물로서 경남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엄밀히 누각이라고 볼 수 없는 단층구조이지만 높은 축대 위레 서 있어 누각처럼 솟아보이는 건물이다.
자방루란 말의 뜻은 꽃다운 향기가 점점 불어난다는 것으로, 불도를 닦을수록 더욱 향기로운 사람이 된다는의미이다.
자방루는 앞면 7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으로 주심포계 건물이다.
사찰에서 누각은 일반적으로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데, 자방루 역시 앞마당과 누각의 마루를 거의 같은 높이로 해 대웅전 앞마당에서 출입하기 쉽도록 했다.
높은 축대 위에 단층으로 지으져 마치 성채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자방루는, 대웅전을 향하는는 면은 난간을 설치해 개방했고 마당쪽을 향하는 면에는 기둥 사이를 모두 2짝씩의 널판장문을 달았으며, 필요시에는 문을 열어 바깥과 소통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자방루는 간결하면서도 튼튼한 구조로 지어져 많은 대중들을 수용할 수 있으며. 자방루 내부의 들보와 벽에는 120년 전 중수 당시에 그린 비천상과 비룡상 그리고 새 그림등이 화려하게 남아있다.
마당쪽에서 본 자방루
대웅전쪽에서 본 자방루
임진왜란 직후 조정에서는 전략 요충지에 비상시를 대비한 군사적 목적으로 사찰을 건립하거나 기존의 사찰에 건물을 신축 한 예가 많은데. 경남의 대표적인 호국사찰이었던 옥천사의 건물도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즉 군사용 회합장소로 대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며, 사찰을 보호하는 외곽의 방어용 성채도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군사 훈련을 위한 넓은 장소도 있어야 했을 터이므로 산지에 자리 잡은 절에서는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큰 자방루 앞의 넓은 앞마당도 바로 그런 목적에 잘 부합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거대한 성채와 같은 자방루는 조선 후기 사찰 건립의 또 다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재는 대중들에게 설법을 하거나 절의 행사 때 쓰이는 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자방루의 마당쪽 처마 밑에는 '옥천사'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대웅전 방향에는 연화옥천(蓮華玉泉)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蓮華玉泉'은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였으며 병조판서를 지낸 위당 신관호(1810-1884년)가 쓴 글씨로 추사가 '나보다 낫다'고 극찬했던 명필이다
▶ 대웅전(大雄殿)-경남 유형문화재 제 132호
대웅전은 정유재란(1537) 당시 왜군들의 방화로 불타고 임란이 끝난 후 40여 년 동안 빈터로 남아 있다가 인조 27년(1649) 영옥대사(靈玉大師)가 대웅전을 중창하였고 숙종 3년(1677)에 묘옥(妙旭)대사가, 영조 12년(1736) 시축대사가 개수하였으나 건물이 너무 낡았으므로 고종 원년(1864) 용운(龍雲)대사가 새롭게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1층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다. 내부의 천장은 2단으로 된 우물천장이고, 불단이 있으며 그 뒤에는 탱화가 걸려있다.
대웅전은 자방루에 비하여 규모가 작으나 높이 쌓은 석축 위에 올려져 있어 자연스럽게 올려보게 하여 중심건물이 갖는 당당한 권위를 나타내고 있다. 건물에 쓰인 부재들도 고급스럽고튼실하여 조선 후기 남해안 지역에 건립된 일반 사찰에 비해 훨씬 고급스러운 자태이며 기둥의 장식물들은 길게 뻗어있으면서도 완만하게 상승하고 있어서 웅장함과 유려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따라서 대웅전은 조선시대 법당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로서 조선후가 다포계 팔작집의 화려한 격식을 제대로 갖추고 있어 당시의 대웅전 건축 양식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대웅전의 좌우에 탑진당과 적묵당이 있고 앞에는 자방루가 있어 대웅전 앞의 공간은 ㅁ모양이다.
현재 이 법당의 주불은 아미타불을 모셨으므로 "극락전"이라 해야 하나, 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셨는데 그 때 달아놓은 '대웅전"이라 쓴 편액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불당의 이름이 맞지 않다.
대웅전 편액은 대구 동화사의 대웅전 편액을 모각한 것으로 동국진체풍(東國眞體風)의 대가인 동화사 기성대사 쾌선1693-1774)의 글씨이다.
▶ 대웅전 삼존불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옥천사 대웅전에 모신 불보살님 세 분은 다 똑 같은 수인(手印)을 하고 계시는 독특한 형태이다.
옥천사 대웅전에 모신 아미타 삼존불상은 경주 옥돌로 조성했다고 하는데.중생의 소원을 잘 들어주기로 유명하다.
대웅전 돌계단과 괘불대
밤에 소나무 관솔에 불을 피워 올려놓고 어둠을 밝히던 정료대(庭燎臺)
대웅전 마당에는 4개의 괘불대와 2개의 정료대(庭燎臺)가 있다
괘불대는 대웅전 정면 계단 앙쪽에 1쌍이 있고 마당에 1쌍이 있다. 마당에 있는 괘불대는 원래 있던 자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웅전 축대 앞 양쪽에는 길다란 석재 위에 둥근 접시형태의 돌을 얹어둔 정료대(庭燎臺)가 있다.
정료대는 야간에 솔가지나 기름통을 올려놓고 불을 밝히는 일종의 조명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웅전 뒤에 있는 괘불대지주.
우리나라 사찰에는 괘불지주는 많이 남아 있으나 괘불대가 옛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는 보지못하였는데, 이곳에는 옛부터 전해내려오는 괘불대가 대웅번 법당 뒤에 놓여 있다.
▶ 탐진당(探眞堂)
탐진당은 '진리를 탐구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대칭으로 마주보고 있는 적묵당과 함께 영조 30년(1754)에 건립되었다. 적묵당은 상판스님들 30여명이 공동 거처하고 탐진당에는 하판스님 30여명이 공동 거처했다고 한다. 현재는 왕생계 영가 1,000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일부는 종무소로 쓰여지고 있다. 2013년말 보수공사를 하였다.
이 건물은 대웅전쪽에는 맞배지붕이고 자방루쪽은 팔작지붕이다
▶ 적묵당(寂默堂)
적묵당은 영조 30년(1754)에 건립된 건물로 옛날에는 옥천사의 상판(上阪)스님들이 경을 읽고 공양을 하며 공동 기숙하는 큰방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지장보살님을 모셔놓았고, 재를 올리거나 경을 읽는 경학당(經學堂)으로 사용되고 있다. 적묵당 3칸에 잇대어 요새채를 달아내어 전체 건물의 모습은 ㅁ자형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추녀 밑에는 옛날 단청이 고색창연하게 남아 있으며, 주두(柱頭)위에 조그마한 단지 하나씩을 얹어 놓았는데 이는 화재방지를 위하여 바닷물을 떠다 올려놓은 비기(秘祈)로 보인다. 집이 낡아 2006년 정부에서 전면 해체보수공사를 하였다.
▶ 나한전(羅漢殿)
나한전은 16나한님을 모신 전각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삼존을 모셨는데 정조연간(1776-1799)에 조성된 것이다.
나한상은 상단 불상의 좌우로 각 여덟 분씩 16분을 모셨다. 16나한은 최근에 일률적으로 개분,개체하였는데 그 중 9분은 조선 전래의 나한님들이시고 7분은 최근에 조성된 나한님들이다.
나한전 건물은 고종 32년(1895)에 건립한 단포(單包)집으로 내부에는 4모서리에 비룡(飛龍0을 조각하여 매다는 등 조선 건축의 멋을 보여주고 있다.
나한전 천정 4모서리에 매달려 있는 봉황새(좌)와 비룡(우)은. 나한전에 초창기에 임금의 수복을 비는 축성전(축성전)이었으므로 임금을 상징하는 봉황새와 비룡을 매달아 놓은 것이다
(봉황새는 연실(蓮實)을 먹고 사는데 밑에 연꽃이 있으므로 봉황새임을 알 수 있다)
옥천사에서 축성전은 절의 흥망(흥망)을 좌우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 1852년 진주민란이 일어나자 농민들이 옥천사로 밀려와 경내 외곽의 건물과 대종을 파괴하였으며 1888년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도 농미들이 밀려와 검물이 불을 질렀다.
이때 용운대사(龍雲大師)가 농민들 앞에 나아가
" 이 절에는 전하의 수복을 비는 축성전이 있소. 더 이상 이곳에 와서 행패를 부리면 당신들을 관가에 고하여 역적으로 몰아 삼족을 멸하도록 할 것이오" 하고 호통을 치니 겁을 먹은 농민들이 달아나고 그 덕분에 대웅전과 자방루가 온전하게 살아남게 되었고 축성전이었던 건물은 지금 나한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축성전은 따로 건립하여 약사여래불 삼존을 봉안하고 있다.
▶ 산령각(山靈閣)
산령각에는 산신을 모셨고 독성각에는 나반존자를 모셨다. 두 건물은 고종 34년(1897)에 건립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전각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산령각은 높이 120Cm, 폭 102Cm, 건평 0.46평으로 도저히 사람이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 예배하도록 되어 있다. 독성각은 그 보다 약간 큰 1.08평으로 겨우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다. 두 건물은 작지만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있다. 기둥에 주심포 형식의 간결한 공포의 구성, 그리고 창방과 주두의 결합에서 구조적인 아름다음을 느끼게 한다. 옥천사의 전체적인 조화를 고려하여 대웅전 뒤쪽에 이와 같은 작은 건물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 독성각(獨聖閣)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깨달으므로 성문(聲聞)이라고 한다. 그에 비하여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세상에서 홀로 수행하여 깨달은 수행인을 독성이라고 한다. 독성은 홀로 공부하여도 12인연의 이치를 깨달아 알기 때문에 연각이라고도 부른다.
독성각은 1.08평으로 겨우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으며 고종 34년(1897)에 건립되었다. 산령각과 함께 건물이 매우 작지만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전각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 칠성각(七聖閣)
칠성각은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칠성신을 모신 전각이다. 우리나라 민간신앙에서는 자식이 없거나 아들을 얻고자 할 때, 혹은 수명 장수하고자 할 때 칠성님께 헌공하거나 기도하면 효험이 있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도교의 영향으로 칠성 신앙이 크게 유행할 때 불교에서 이를 수용하여 칠성각이 세워졌다. 원래 북두칠성은 도교에서 태을성신(太乙星神)이라 받들면서 사람의 수명과 부귀, 복록,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별이라 한다.
옛날 큰 스님들은 자정에 일어나 자정수(子正水,달빛의 음기가 서린 샘물)를 마시고 북두에 절한 후 하루에 10만독씩 염불하는 스님들이 많았다. 이런 스님들은 대개 90세를 넘게 살았다고 한다. 이 건물은 1899년에 건립되었으며 내부는 1981년애 조성된 칠성탱화를 모셨다.
▶ 명부전(冥府殿)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하여 염라대왕 등 10대왕을 봉안한 전각으로, 지장전 혹은 시왕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장보살은 석가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부처없는 세계에 머물면서 육도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이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인명부전은 1895년(고종 32) 옛 궁선당(窮禪堂) 터에 중건한 것이다.
▶ 팔상전(八相殿)
팔상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8폭의 탱화로 그려 모신 전각으로 고종 27년(1890)에 건립되었다.
팔상 탱화의 원본은 도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따로 보관 중에 있으며 대신 이 곳에는 원본 탱화의 사진을 봉안하였다. 탱화 밑의 존상들은 부처님의 8대 제자들로서 최근에 조성하였다.
▶ 옥천(玉泉)
이 우물은 사찰 창건 이전부터 있던 샘으로서 서출동류. 즉 서쪽에서 솟아 동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일정한 수온과 수량을 유지하고 있으며 물맛은 달고 시원해 1987년 7월 ‘한국의 명수(名水)’로 선정되었다.
특히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으며 차를 끓이는데도 최상의 물이라 소문이 나서 물맛을 볼겸 찾아오는 이가 많고 주변 가까운 곳에서는 이 샘물을 길러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샘터 위에는 전각을 지어서 옥천각(玉泉閣)이라 이름 붙여놓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 샘이 있어 절의 이름까지 옥천사라고 지었으면 이에 걸맞는 관리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샘물 주변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바가지가 딩굴고 있어 찾는 이들을 당황하게 있다. 플라스틱 바가지 대신 표주박이라도 놓여 있었더라면 좀 더 격에 어울리지 않았을까?
▶ 옥천사 청동북(玉泉寺 靑銅金鼓)/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 - 보물 495호
옥천사 청동북(固城 玉泉寺 靑銅金鼓)의 정확한 이름은 '임자명반자(壬子銘飯子)'이다
임자(壬子)라는 명문이 적혀있는 반자(飯子)라는 말이다. 반자란 절에서 사용하는 금속으로 만든 일종의 타악기로서 금고 또는 금구라고도 하며 절에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한 도구이다.
이 반자는 지름 55㎝, 너비 14㎝로, 표면에 굵고 가는 선으로 4개의 테두리를 둘러 4개의 원을 만들었다. 중심원에는 6개의 둥근 연꽃열매가 돌출 되어 있으며, 그 다음 원에는 연꽃잎이 겹쳐서 도드라지게 새겨있다. 가장 바깥 원에는 덩굴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고, 그 안쪽의 원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다.
옆면은 중앙에 굵게 돌출된 선이 있어 위 아래로 구분되고, 선 위로 둥근 모양의 고리가 3개 있어 매달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반자는 무늬가 뚜렷하고 손상이 없으며, 옆면에는 187자의 명문이 있어 만든 시기와 유래, 관계자의 성명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명문에 의하면 고려 고종 39년(1252)에 지리산 안양사에서 추밀원 우부승선 손연열, 판서 황보기 등이 시주하여 조성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반자는 처음부터 옥천사의 소유가 아니라 지리산 안양사의 것이었는데, 어느 시기에 옥천사로 이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공룡발자국 화석
옥천사 입구 계곡의 공룡발자국 화석
고성은 세계 3대 공룡발자국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도 공룡발자국 화석이 있다.
주차장에서 오른쪽 계곡의 암반에는 소형 용각류(sauropoda. 잡식성 공룡)의 보행렬 5개가 줄지어 있다. 변성암 암반은 단단해 풍화엔 강하지만 표면이 울퉁불퉁해 발자국 모양이 뚜렷하지 않다.
발자국들은 불규칙하게 찍혀 있는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면 공룡이 앞으로 걸어간 형태가 드러난다.
▶ 옥천사 적멸보궁의 극락보궁
적멸보궁의 진신사리는 옥천사에서 출가한 지성 스님이 주지로 재임하던 2002년 태국 달마 길상사와 자매결연을 맺고 태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2005년 10월, 적멸보궁 준공식 및 사리 봉안식을 가져 극락보궁에 봉안했다고 한다.
현재 주석하고 있는 호암 스님에 따르면 그 후 극락보궁과 삼성각 사이에 있는 삼층석탑에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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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