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삼키는 바다 『솔라리스』
과학소설의 격을 높인 걸작, 폴란드 문학의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
놀랍다는 말로는 부족한, 상상력의 세계적인 대가 스타니스와프 렘의 대표작
행성 솔라리스 전체를 에워싼 원형질의 ‘생각하는 바다’는 인류의 거듭된 접촉 시도에도 불구하고 130년이 지나도록 반응다운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한때는 수많은 연구자들을 끌어들이며 융성했던 솔라리스학(學)도 지금은 쇠퇴기를 맞이했다. 심리학자 크리스 켈빈은 솔라리스 상공에 떠 있는 연구 스테이션으로 부임해 온다. 솔라리스에 도착하자마자 켈빈은 동료이자 선배 학자인 기바리안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지만, 그보다 한층 더 켈빈을 당혹스럽게 한 것은 남은 연구원 두 사람이 그를 대할 때 보이는 불가해한 행동이다. 그러나 켈빈은 곧 그 이유를 깨닫는다. 오래 전에 자살한 아내 레야를 빼닮은 ‘방문자’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가 기억하는 레야의 완벽한 복제처럼 보이는 ‘그녀’앞에서 켈빈은 엄청난 감정적 갈등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과 천재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동명 영화로 제작된 『솔라리스』는 스타니스와프 렘을 전 세계에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낯선 우주 공간에서 펼쳐지는 미스터리는 사랑의 본질에 관한 진지한 질문을 거쳐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우주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된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우주를 거울삼아서 인식의 한계와 인간 자체를 그리려는’렘 본인의 강렬한 주제의식은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불러일으켰으며, 과학과 문학의 경계를 넘어 과학소설의 격을 높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솔라리스의 바다에서 우주를 바라보다
폴란드에서 태어난 렘은 유대계 의사의 외아들로 태어나 유복하지만 고독한 소년 시절을 보낸다. 수업 시간에는 온갖 권력자들의 정교한 신분증명서 등을 ‘위조’하는 것이 낙이었던 소년 렘은 2차 대전 중에 위조 신분증으로 살아남는다. 일찍부터 쥘 베른, H. G. 웰스, 올라프 스태플든으로 대표되는 과학소설의 고전을 탐독했던 그는 일생의 화두가 된 소통의 불가능함과 인간 인식의 한계를 다루는 과학소설을 집필한다. 렘의 삶의 일부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독특하고 놀라운 그의 작품 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보르헤스 풍의 메타소설에서 사이버네틱스의 코믹 풍자극, 인간의 무의식을 파고드는 행성 솔라리스를 무대로 역사철학적인 사변을 전개하며 과학소설의 경지를 넘어서 주류 문학의 작가들에게도 폭 넓은 영향력을 미쳤다.
렘의 대표작으로 그의 명성을 전 세계에 알린 작품 『솔라리스』는 과학소설의 보편적인 소재 ‘최초의 접촉’을 바탕으로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을 다양한 플롯장치를 통해 반복하고 있다. 렘은 인간중심적으로 우주를 해석하려는 인식의 한계라는 난해한 주제를,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경험과 ‘솔라리스의 바다’라는 낯선 세계에 대한 미스터리를 통해 긴장감 넘치는 스토리텔링으로 풀어가고 있다.
2005년 3월 타계한 렘은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박학다식한 천재 작가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괴감과 자기모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던 인간미 넘치는 인물이었으며, 천재나 성인이라기보다는 수많은 형태의 억압에 맞서 풍자의 ‘권위’로써 대항하려고 했던 특이한 형태의 지식인이기도 했다.
캔버스 자락을 다시 내리려고 했을 때 기바리안의 발치를 덮고 있는 천 아래에서 큰 순서대로 배열된, 검은 진주 같아 보이는 다섯 개의 타원형 물체가 튀어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공포로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다섯 개의 둥근 발가락이었다. 구겨진 천 밑에서 기바리안의 몸에 밀착된 자세로 그 흑인 여자가 엎드려 있었다. 육중한 검은 팔 안쪽에 몇 개인가의 작은 타래로 땋은 곱슬머리가 드리워 있었다. 검은 광택이 있는 그녀의 등과 등뼈를 덮은 팽팽한 피부가 보였다. 그 거대한 육체는 꼼짝도 않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발바닥을 보았다. 육중한 체구 탓에 항상 무거운 압력이 걸려 있어야 할 발바닥은 놀랍게도 전혀 납작해지거나 변형되지 않았다. 맨발로 걸어 다녔을 텐데도 발바닥의 살갗은 딱딱하기는커녕 양 어깨의 피부와 마찬가지로 포동포동하고 윤기가 났다.
그 발을 만질 때는 기바리안의 시체를 만질 때보다도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 순간 더욱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영하 20도의 냉동실에 유기되어 있던 명명백백한 시체가 살아 움직였던 것이다.
--- pp.68~69
그녀는 레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에서 눈에 익은 그녀의 습관을 발견하는 것이다.
뭔가 뜨거운 것이 목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지만, 더 끔찍했던 것은 그녀를 계속 레야라고 믿는 척하며 행동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녀 자신이 자기 정체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이런 상태에서 확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 p.88
“정상적인 인간이란, 도대체 정상적인 인간이 뭐지? 단 한 번이라도 비열한 행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인간을 뜻하는 건가?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설령 그것을 실행에 옮긴 적이 없더라도, 비열한 일을 상상한 적조차 없는 인간이 존재할까? 그것 또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10년이나 30년 전에 겪었던 정신적 갈등의 망령이 되살아난다면? 그런 갈등을 억압하고 망각하는 일은 어렵지 않지. 설사 그런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절대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말야. 그런데 이 과거의 망상이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하고 벌건 백주에 느닷없이 나타난다면? 자기에게 달라붙어 절대로 떨어지지도 않고 죽일 수도 없는 것이라면? 그럴 경우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나?”
“어디서지?”
“바로 여기야. 솔라리스에서.”
--- p.104
어둠 속에서 그녀의 부드러운 어깨를 감싸 안은 나는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고, 그녀가 정말 레야라고 믿었다. 아니,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녀를 속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레야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고 있었으니까.
--- pp.132~133
“……이것은 우리에게는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이다. 우리 자신이 이 고난의 근원인 것이다. 바다는 우리의 사고에 대한 일종의 증폭장치 역할을 정확히 수행했다. 이 경우 그 동기를 찾으려는 우리의 시도는 우리들 자신의 의인화 경향에 의해 저지당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인간적인 동기를 찾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사고 또는 그들의 물질적 실체를 파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고를 파괴할 능력은 없다. 한편 물질적 실체를 파괴한다면 실제적인 살인 행위나 다를 바가 없다.”
--- p.189
“크리스……`내가 사라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아무 말도 하지 마!”
“왜요?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아무 방법도 없나요? 정말로?”
“레야, 제발…….”
“난 정말로……`놔줘요. 당신은 내가 싫은 거예요. 나도 내 자신에게 넌더리가 나요. 그럴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자살하고 싶단 말야?”
“그래요.”
“하지만 당신은 죽으면 안 돼. 내게는 그 누구보다도 당신이 필요해.”
“거짓말!”
“그렇다면 무슨 말을 해야 당신을 설득할 수 있지? 당신은 여기 있어. 당신은 존재하고 있어. 내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레야가 아녜요.”
“그럼 당신은 누구지?”
긴 침묵이 흘렀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당신은 나를 레야라고 부르지만……`나는 내가 당신이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그래.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이미 먼 옛날 일이야. 이미 과거의 일이란 말야. 그렇지만 당신은 지금 여기 내 앞에 있어.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 pp.200~201
“물론 우리가 완전히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것이 장애가 될 수는 없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그것이……`당신 생명을 구한 거야.”
애처로운 미소가 그녀의 얼굴을 스쳐갔다.
“그러면 내가……`불사신이란 말인가요?”
“그건 나도 몰라. 어쨌든 당신이 나보다 훨씬 다칠 위험이 적다는 건 사실이야.”
“끔찍한 일이군요…….”
그녀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렇게까지 끔찍한 일만은 아닐 거야.”
“그래도 당신은 내가 부럽다고는 생각하지 않잖아요.”
“레야, 당신의 운명이 무엇인지는 나도 몰라. 그걸 미리 알 수는 없고, 나나 이 스테이션의 다른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야. 그들은 실험을 계속할 거고,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몰라요.”
--- p.205
“생각해봐. 조금만이라도. 자네는 도대체 누군가? 누구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거지? 누구를 구하고 싶은 거지? 자네? 그녀? 어느 쪽이지? 처음의? 아니면 현재의? 두 사람 다 대할 용기가 없는 건가? 자네가 하려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네도 알 거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하겠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는 인간 사회의 윤리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어.”
--- p.216
바다는 살아 있었고, 생각했으며, 행동했다.‘ 솔라리스 문제’는 그 자신의 부조리함으로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은 것이다. 우리의 상대는 진정한 생물이었다. 바다의 이른바‘퇴화’된 기능은 전혀 퇴화되지 않았다. 이 모든 사실이 이제는 의심이 끼어들 여지없이 증명된 것이다. 좋든 싫든 간에 인류는 이 이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설령 몇 백 광년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솔라리스는 인간의 진출 영역 내에 존재하고, 다른 우주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우리를 동요하게 하는 이웃인 것이다.
--- p.240
이 생기발랄한 호기심이 수평선 너머로 반짝이며 뻗어 있는 거대한 바다가 보인 것이라고는 아무래도 믿기 힘들었다……`그 거대한 존재를, 그 끝없는 침묵의 힘을, 또는 파도를 굽이치게 하는 숨겨진 힘의 존재를 지금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내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고, 나는 무기력의 바다에 침잠한 채로 불가시의 사면을 미끄러져 내리며 이 맹목적인 액체의 거인과 일체화했다. 마치 아무런 말도, 생각의 힘조차 빌리지 않고 모든 것을 용서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p.282
그러나 나의 내부에서는 하나의 기대가 싹트고 있었다. 그녀가 간 후로 내게 주어진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어떤 성취가, 어떤 조롱이, 또는 어떤 고뇌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잔혹한 기적의 시대가 영원히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 p.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