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키치(Kitsch)라는 용어는 2. 오늘날의 주요 예술적 현상을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가 그러하듯이... 3.키치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이해를 위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4.키치는 기본적으로 현대사회의 산물이다 5.키치와 고급예술이 맺는 다양한 관계 6.우리 문화의 키치적 성격에 대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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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Kitsch)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아직은 낯설다. 하지만 그 실제는 낯설지 않다. 키치가 제3세계 근대화 정도의 척도구실을 한다는 한 논자의 말에 따른다면 실상 우리에게 키치는 낯선 것일 수 없다. 그렇다. 사실 키치는 이미 충분히 우리와 우리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하지만 그간 우리는 그럴 수 없는 곳에서 그래서는 안될 곳에서 키치의 얄팍함, 모방, 허장성세, 괴기취미, 위조성, 달짝지근함 등이 창궐한다는 생각에 키치의 법칙적인 진군을 애써 외면해왔는지도 모른다. 또 그런 이유 때문에 진정한 예술, 진정한 행위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과도하게 매달려 왔는지도 모른다. 실상 우리는 아직도 하나의 객관적 현상으로서의 키 치에 대한 어쩔 줄 모르는 애증병존적인 태도에 시달리고 있다. 어쨌든 키치는 이제 우리의 환경이 되었다. 그것은 오늘날 그 사회적 존재근거를 가진 유일한 예술적 생산물에 소속된다. 산업사회의 문명은 한편으로 극도로 자기의식적이며 금욕적인 모더니즘 예술을 낳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직감적이며 오락을 추구하는 가벼운 대량 의 예술적 생산물들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이 문명의 중핵을 이루는 대중들 특히 중산층들의 텅빈 미의식 내지 공포스럽고 측량할 길 없는 권태를 벗어나려는 그들의 열렬한 욕구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현상이다. 한편에는 교환을 목말라 기다리는 수많은 대중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는 매스 미디어를 위시한 막강한 대량생산의 산업적 매개체들을 통해 바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제공하는 문화산업들이 있다. 그리고 크게는 이 영역에 귀속되면서도 범주화의 방식과 향수의 메커니즘에서 특성을 달리하는 일군의 생산물 내지 감성체계, 즉 키치가 있다. 이들은 바로 우리 자신과 주변의 일상과 내면, 외면, 무의식의 반영이며 동시에 이것들을 형성하는 무엇이다. 즉 우리 모두는 일정 정도로는‘키치맨’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키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한 것일까? 궁극적으로는 그렇다. (고급)예술작품을 생산, 수용하고 그것을 평가하는 작업들과, 키치의 생산과 수용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다. 전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초월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바로 그러한 초월이 불가능함 자체 혹은‘왜곡된 성취를 이루는 초월’내지 대용물을 통한 초월로부터의 도피, 즉 사이비 초월이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는 어쨌든 항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우리 삶의 진상이다. 키치는 이러한 진상을 그것이 표명되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키치는 또 다른 이유로 우리의 주목을 끈다. 키치는 대중문화 산물과 (고급)예술이라는 두 영역의 원‘사이’에서 양원을 교차시키는 하나의 원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로 하여금 쉽사리 묶어 이해할 수 없는 두 예술산물의 영역 모두를 동시에 조망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키치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닫힌, 대상과의 거리감이 결핍된 세계라는 점에서 대중문화 산물 일반과 공통분모를 갖는다. 하지만 키치는‘단순한 향수’그 이상을 추구한다. 그렇다고 키치가 열려진 체계로서 혹은 일종의 거리감을 요구하는 세계로서 진지한 예술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하지만 수많은 진지한 예술의 장르와 범주에 속하는 작품들이 오늘날 그렇게도 쉽사리 키치로 전락하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우리는 키치와 예술이 교차한다는 사실에 대해 눈감을 수 없다. 또 하나 지금 이곳에서 키치에 대한 담론이 요구되는 이유로 우리 문화의 고도로 키치적인 특성에 대한 지적이 필요하다. 앞서 우리는 제3 세계의 근대화 정도와 키치화 정도가 비례관계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 무참한 전통의 파괴, 막강한 소비사회 문화의 집약적 체험, 이로부터 생겨난 기존 사회의 위계 내지 가치관의 급격한 해체와 상실, 계속 되는 가치기준의 부재,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나타나는 제3세계적인 서구 콤플렉스 내지 온갖 사이비 이상들의 창궐 등의 현상은 키치를 만발케 하는 최적의 조건이다. 비록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방대한 양의 실증의 축적을 기초로 해서만 진전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 우선 필요한 것은 문제에 대한 지적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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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주요 예술적 현상을 정의하려는 모든 시도가 그러하듯이 키 치라는 현상의 복합성과 얽혀 있음을 나름으로라도 정의, 개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란 현재 극히 미약하다. (1) 여러 마리의 새끼돼지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미돼지 옆에 家和萬事成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액자그림 혹은 북구풍의 호수에 오리가 떠있는 이발소그림 (2)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에 둘러싸인 졸부 (3) 국민학교 본관 현관 앞의 화단 좌우측에 놓여져 있는 조잡한 이순신장군상과‘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어구가 새겨진 이승복 어린이의 상 (4) 사기로 만들어진 테일러종의 눈이 큰 강아지 공예품 (5)‘하면 된다’혹은‘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하는 식의 상투적이며 순정적인 생활관이 담긴 어구가 쓰여진 액자 (6) 한껏 치장한 고급 아파트 벽에 걸려 있는 동양화 혹은 추상화 (7)‘바람이 분다. 외롭다. 살아야겠다’식의 어구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집 혹은 에세이집들 (8) 거대기업의 총수가 등장하거나 혹은 온화하고 강단 있는 시어머니가 버티고 앉아 시련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냄새나는 통합을 보여주는 TV 드라마 (9) 찬란한 금관 옆에 저명한 소설가가 심각한 표정으로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의 광고 (10) 잘 생긴 귀공자 타입의 남자 대학생이 영웅적이며 전투적인 표정으로 무언가를 선동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공허함이 엿보이는 그림 (11) 온갖 기이한 복장과 제스처, 춤, 조명과 장식, 거짓대화로 가득한 ‘쇼쇼쇼’, 그리고 수많은 달콤한 대중음악, 영화 등 (12) 갈비집 마당의 물레방아 혹은 비단잉어가 유영하는 연못 (13) 지중해풍의 기둥과 그리스 건축의 엔태블러처를 올려 지은 강남 지역의 국적을 알 수 없는 건물들, 그리고 모든 것을 오로지 키치적으로만 수용해낼 수 있는 사람들 그 자체 이런 현상들 모두를 관통하는 키치의 정의는 어떻게 가능할까? 아니 이런 모든 현상들이 그들과는 다른 현상들과 뒤섞이면서도 구분되어 작동하는 체계를 드러내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키치라는 용어는 오늘날 통상 다른 어떤 예술관련 용어보다도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나쁜 취미 내지는 나쁜 예술로 이해된다. 설명하자면 미적인 가치의 측면에서 본다면‘훌륭한’예술품과 대조되는 하찮고, 천박하며, 조야한 미완성품으로, 그 결과 윤리적 차원에서는 모조, 위조, 거짓말 등의 특성을 지닌 것으로, 그리고 산업적으로는 대체로 대량생산된 값싼 상품이라는 특정을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문화의 키치화’현상이 고도화됨에 따라 이러한 일상적 용례로써는 포괄할 수 없는 또 다른 수많은 사례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어쨌든 어원상으로 키치는 원래 1860, 70년대 뮌헨 화상에 의해 특정한 종류의 미술품을 가리키는 속어로서 출발했다고 한다(예를 들면 고지대 산악 토착민들의 순정한 삶을 찬미하는 식의 그림들). 이후 고결함과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고 감상적 부르주아의 동경을 만족시켜준다고 여겨지는 일군의 작품들이 점차 키치라고 불리게 되면서 이 용어는 점점 더 도덕적인 결함을 지닌 대상을 지칭하는 어의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키치는 당시의 많은 유사용어들 중에서도 가장 널리 쓰여지는 용어가 되었으며 하나의 국제적 공식용어로 변화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이 과정, 그리고 이후의 전개과정을 통하여 키치라는 용어가 지극히 폭넓고 다양할 뿐 아니라 다차원적인 현상들을 포괄하게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키치는 단지 미술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넓은 의미의 예술적 생산의 전영역에 적용되게 된다. 문학, 음악, TV 드라마, 인테리어 디자인, 건축 등과 심지어 일상의 모든 문화용품과 생필품에 이르는 의미를 생산하는 영역 모두가 키치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시에 키치는 단순히 대상뿐 아니라‘키치 상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구성하는 모든 축과 관련된 현상이 된다.‘키치맨’(모든 것들을 심지어 진정한 예술까지도 키치로 경험하려는 정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용어야말로 이러한 정황을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변화의 하나는 키치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인‘자기기만’적 특성이 20세기 문화의 질적 저하 현상 혹은 일상생활의 사물화 현상에 부응하여 확대되는 것에 상응하여 키치가‘나쁜 취미’가 개재된 모든 예술적 산물 혹은 대중문화 산물 일반과 동일시될 수 있는 정도의 상황 으로 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문화의 키치화 현상에 따라“단순히 부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린 진정한 예술과 미적 위신이 부여된 잘 고 안된 비예술 사이에‘미감적 부적절성(aesthetic inadequacy)’의 개념이 적용되는 무수한 단계”1) (예를 든다면 부잣집 엘리베이터에 걸려 있는 렘브란트로부터 가장 싸구려의 모조 금팔찌에 이르기까지)의 물건들, 취미영역들 모두가 키치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1) Matei Calinescue, Five Faces of Modernity, Bloomington and London, Indiana University Press,1977,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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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키치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이해를 위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우선 미적 심리적 측면에서 출발해보기로 하자. 이 지점에서 볼 때 키치는 독특한 자기기만의 형식이다. 해리스(K. Harries) 에 따르면 한 키치 그림이 있다고 할 때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결코 그 그림에 그려진 대상이 아니다. 이때 그림(의 대상)이란 어떤 기분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자극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욕구의 대상이 아니라 욕구 자체이며 키치가 통상적인‘단순한 향수’의 대상들 이상의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점 때문이다. (현실세계의)대상이 욕구를 불러일으키지 못할 때 인간은 욕구를 갈망하게 된다. 좀더 엄밀히 말하자면 어떤 정서를 보증해주고 있는 대상과의 만남이 없는 경우라면 향수되거나 추구되는 것은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 정서 혹은 기분이다. 따라서 종교적 키치는 신과의 만남이 없이도 종교적 감정을 일깨우려 하며 성적인 키치는 사랑하는 대상이 없이도 사랑의 느낌을 주려 한다.2) 어떤 현실적인 욕구의 대상이 있을 경우라도 만일 그 대상이 욕구되는 정서(사랑, 달콤함)를 위해 단순히 인용되는 경우라면 중점은 대상이 아니라 정서 자체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키치는 자기향수를 위 해 대상으로부터 일종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제라는 이러한 키치의 특성을 예시해주는 적절한 사례를 제시한 바 있다. 키치는 연속적으로 재빠른 두 번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첫번째 눈물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잔디 위를 달리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다음 눈물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잔디 위를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전인류와 더불어 감동을 받는 일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키치를 키치답게 만드는 일은 두 번째 눈물이다.3) 키치가 독특한 자기기만의 형식이라는 것은 위와 같은 의미에서이다. 하지만 보다 명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보다 세부적인 분석이 필요할 것 같다. 키치의 욕구 대상이 욕구 그 자체, 즉 일종의 정서 혹은 분위기라 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이 정서가 다름 아닌 자기정서라는 사실이다. 즉 키치에서 성립하는 미적 주객(主客)관계는 자아와 자아의 감정 사이의 주객관계이다. 다시 말하면 키치의 미적 주체는 대상으로부터 얻어낼 수 없는 정서를 이미 자신속에 있는 도식화되어 고착된 어떤 정서로 대체한다. 여기서 문제는 이렇게 자신 속에서 이끌어낸 정서에 대해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을 자연스럽고 순 수한 정서로 간주하느냐 아니면 억지로 이끌어낸 거짓정서로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다. 키치에서는 그것이 거짓정서라는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 아니 키치의 키치다움은 그것이 거짓임을 보지 못하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키치의 거짓정서로 기꺼이 빠져들며 바로 이것이 키치의 자기기만이 가지는 독특성이다. 이러한 키치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키치와 진지한 예술작품의 차이에 대해 생각케 한다. 진지한 예술은 우리에게‘심적 거리’를 요구한다. 향수의 주체는 그 예술작품에 의해 조성된 하나의 모형적 세계에 나름의 자기경험 전체를 가지고 참여한다. 이때 작품과 자신의 만남은 그것이 충격의 방식이든, 아니면 가상에의 몰입의 방식이든 기본적으로 새로운 자신 혹은 보다 넓혀진 혹은 해방된 자아에 의해 종결되며 그 가운데에서 주체와 대상(작품)사이에는 끊임없이 반성의 거리가 개입한다. 하지만 키치의 경우는 다르다. 물론 주체와 대상간의 어떠한 거리도 없는 단순한 향수4)의 대상들과는 달리 여기에는 주체와 대상간의 거리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거리는 앞서 지적했듯이 자신의 정서를 향유하기 위해 본래적 정서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킴으로써 얻어지는 주관 내에서 자아와 자기정서 사이의 거리이다. 다시 말해 키치의 거리는 일종의 독백적인 거리이며 때문에 자신에 대한 반성을 포함하지 않는다. 즉 자신이 욕구하는 것 자체에 대한 어떤 의문도 동반하지 않은 채 자기 자체 내의 정서를 향유하는 것이 키치의 구조이다. 이런 관계에서 경험은 기본적으로 그 열려진 지평에로 나아갈 수 없으며 키치가 추구하는 모든 정서들(애국적 정서, 사랑, 신앙심, 달콤함 등)은 그 닫혀진 체계 내에서 하나의 환상으로서의 지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키치는 무언가 잊어버린 낙원을 찾지만 대용물을 설정함으로써, 그리고 그 대용물이 꾸며낸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함으로써 거짓낙원을 찾게 하는 자기 기만의 형식인 것이다. 2) Karsten Harries,《현대미술-그 철학적 의미》, 서광사, pp.130∼1 3) Milan Kundera,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New York, Harper and Row, p.251. Robert C. Solomon, Kitsch and Sentimentality, JAAC, 1991년 겨울호, p.1. 4) 대중문화의 산물들 대부분은 단순한 향수에 적합한 것들이다. 물론 이들 중 적지않은 수가 키치적 향수에 적합한 것들이며 당연히 키치의 대부분은 대중문화의 산물이다. 하지만 보다 엄밀하게 살펴보면 보다 단순한 향수에 적합한 산물과 키치적 향수에 적합한 산물 사이에는 수용자의 개입을 고려한다면 무수한 중간단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산물이 키치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적지않은 경우 매우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이며, 이는 키치를 범주화하는 초점과 대중문화를 범주화하는 초점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가피한 사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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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독특한 자기기만의 형식으로서의 키치는 기본적으로 현대사회의 산물이다. 물론 이러한 키치적 욕구와 대상이 현대에만 국한된 현 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사자에 의해 육신이 찢겨지는 그리스도 교도들의 고통의 광경을 바라보며 즐겼던 네로는 이러한 키치적 자기향수의 극단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이러한 키치적 욕구가 하나의 보편화된 구조화된 정서가 되는 사태, 그리고 바로 이러한 취미들의 관례들을 체계화하고 다수의 싸구려 예술의 기성 소비자들에 도달하기 위한 활동을 제도화하는 수단(문화산업)이 생겨나는 사태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비로소 가능해진다. 일찍부터 아도르노는 현대일상의 단조로움과 권태가 소외된 노동-여가 체계를 형성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결과이며 이것이 기분전환이나 단순한 즐거움에 대한 광범위한 욕구를 창출했음을 지적했었다. 사람들은 단순한 즐거움을 갖기를 원한다. 완전히 집중되고 의식적인 예술경험은 그들의 삶이 다음과 같은 압박, 즉 생활의 여유시간에 자신들의 피로와 수고로부터 동시에 탈출해야 한다는 압박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러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싸구려 상업적 오락의 전영역은 이 이중적 욕구를 반영한다. 그것은 패턴화되어 있고 소화되기 쉽게 조리되어 있음으로써 이완을 유도한다.5) 생활 속에서 아무런 즐거움도 발견할 수 없게 되면 우리는 언제든지 세계로부터 이탈하여 자신을 자극하는 단순한 즐거움에로 이동하려는 욕구를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의 충족이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우리는 더욱더 이 욕구와 만족의 체계를 공고화하고 이 체계 속으로 빠져든다. 이와 더불어 모든 정서를 보다 접근이 용이하고, 빠르며, 예측 가능할 뿐 아니라 오락과 여흥으로서의 효과를 지니는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강박이 생겨난다. 차츰 순수한 정서를 느끼는 빈도는 적어지며 그에 대한 우리의 우리의 욕구도 잠들어버린다. 이렇게 되면 이러한 정 서들을 경험하는 것은 오직 인위적 자극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즉 키치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자극-만족의 체계에 의해 충족될 수 없는 성격의 정서를 해당 정서에 대한 자연스러운 획득을 가능케 하는 자연적인 상황이 아닌 인위적인 수단을 통해 얻어내려 할 경우 당연히 이 기본적인 자극-만족의 체계는 변형되어야 한다. 이 변형의 핵심기제가 바로 키치의 자기향수의 기제라는 것은 거듭 확인했던 것이다. 키치는 이를 위해 우선 요구되는 정서를 보증해주는 대상 내지 상황을 모방한다(어린아이가 뛰노는 모습을 모방하는 것에서 아방가르드의 모방에까지 이르는). 하지만 이 모방은 단순한 모방과는 차이가 난다. 후자의 경우 모방은 모방을 통한 원품 내지 원상황과의 차이에 대한 괴리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키치는 자신이 모방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원품이 제공할 수 있는 정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키치는 모방보다는 모조에 가깝다. 이러한 경향은 키치가 대용품적인 만족을 제시하는 양적, 질적 범위를 넓혀가면서, 다시 말하면 현대인들의 인간적인 유약함에서 가능해지는 모든 자기기만의 영역에로 그것이 파고들면서 나날이 확대되어간다. 즉 인위적 자극에 의한 대체영역이 고도로 복합적인 정서와 체험영역에까지 이르면서 키치는 점차 거대한 힘으로 모든 예술적 체험영역에 자신의 촉수를 뻗치는 것이다. 이것이 문화의 키치화 현상이다. 이러한 문화의 키치화 현상의 근저에는 현대적 삶의 보다 근원적인 특징들이 반영되어 있다. 칼리네스쿠(M.Calinescu)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현대인들의 변화의 감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현대적 삶의 변화 속도와 성격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계가 안정되어 있고 연속적이라는 것을 점차 신뢰할 수 없게 한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순환운동 속에서 영구히 그 자신을 제기하는 동질적인 시간은 내일이 어제나 오늘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보증해준다. 하지만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는 진보의 관념이 쇠퇴하고 사람들의 의미 있는 참여를 허락하지 않는 성격의 급속한 변화가 끊임없이 지속되면서, 이로부터 생겨나는 불안정성과 비연속성은 지루한 반복의 탈출구로서의 무언가를 향수하려는 영원히 지속될 듯한 욕구를 낳는다. 비현실적인 과거로부터 역시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미래로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의 무의미성과 변화의‘테러’에 대한 반응에 의해 키치는 점차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다. 5) T.W.Adorno, On Popular Music, Studies in Philosophy and Social Science, 194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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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와 고급예술이 맺는 다양한 관계는 오늘날 키치적 자기기만이 현대의 일상적인 삶에서 그리고 예술생활에서 독특한 지위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미술에만 한정시켜 이야기할 때 이 관계의 양상은 다 음의 네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1) 고급미술의 모방이 일차적인 목표인 키치 (2) 키치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키치적 기제에 의해 생산되는 고급 키치 미술 (3) 키치적 소재와 감성을 아이러니적으로 차용하는 혹은 그 감성에 빠져드는 고급미술 (4) 키치와 꼬리가 닿은 혹은 그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고급 미술 우선 (1)에 대해서는 그리 긴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통상적으로 키치라고 부르는 대상의 시발은 여기서부터이다. 고급미술이 상징하는 부와 교양, 세련됨 등을 값싸게 대용할 수 있는 물품에 대한 욕구가 이러한 키치류를 생산한다. 여관이나 호텔 복도에 걸려 있는 동양화들, 길거리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전문적인 商畵 제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풍경화들, 조그맣게 복제된 로댕의 작품 등이 그것이다. (2)는 너무나 일반화된 현상이다. 로젠버그(H.Rosenberg)가“키치 는 오늘날 모든 예술을 사로잡고 있다.··· 화가 A씨나 극작가 B씨는 그의 준비된 관중을 위한 각각의 작품 즉 키치를 생산한다. 미국의 가장 탁월한 시인 중의 한 명은 몇 년 동안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쓰지 않았다”6)라고 했을 때 그가 지적하고 싶어한 것은 바로 이러한 지점이었다. 실상 19세기 후반 뽐삐에 양식으로 불리는 유치찬란한 아카데미풍의 그림들로부터 시작하여 교양 있는 체하는 분위기나 어떤 고귀함을 더해주기 위해 가정이나 사무실을 장식하고 있는 동시대의 추상화까지가 모두 키치에 속할 수 있다. 여기에서 문제는 실제로는 키치인 수많은 작품들이 그야말로 가장 진지한 고급예술로 당연히 인정되고 있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은 넓게 보아 고급미술이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히 상업체계에 의해 장악되는 과정에서 아방가르드마저 상업적 맥락을 이겨내지 못하면서 (물론‘문화적인 물건’을 요구하는 관객들에 의해 지탱되는 현상이다) 더욱 확대되고 교묘해진다. 이 경우 근본적인 정신은 사라 져버린 채 아방가르드의 진보성과 부정성의 분위기(진보스러움)를 내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가 되어버린다거나 아니면 진지함을 견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철저함을 견지하지 못하게 되면 그 작품들은 키치에 귀속하게 된다〔예를 들어 브로흐(H.Broch)는 고급예술의 경우는 절망을 서정적으로 즐기는‘시큼한 키치’7)가 유행하기도 한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당연히 여기서 진보성, 부정성은 키치적 자기향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3)의 경우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20세기 초반의 아방가르드 미술은 기존 고급미술에 대한 반기를 들면서 키치에서 차용한 다양한 요소와 기술들을 사용했다. 이는 키치가 스스로를 아이러니에게 내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키치의 자기기만은 한 측면에서는 진지함에 대한 하나의 패러디이다. 사이비 진지함이 판치는 곳에서 일정 종류의 키치는 미술가들에게 훨씬 그럴 듯한 혹은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것이 키치의 아이러니적 활용을 부추겼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러한 활용은 새로운 현상들을 낳는다. 수잔 손탁(Susan Sontag)은 이러한 현상들을‘캠프(Camp)’8)라고 불렀다. 그녀에 따르면 캠프는 대중문화 시대의 댄디즘이다. 즉 이 시대의 세련된 신사들은 고급문화에서가 아니라 키치에서 보다 세련된 감성의 대상을 발견한다. 그들은 천박함의 진가를 승인하며 진지함이 가로막는 취미의 제한을 넘어선다. 결국 캠프는 심약한 인간 본성에 대한 사랑으로 섬세하고 상냥한 감성이다. 이러한 견해를 수긍하는가, 아니면 힐튼 크레이머(Hilton Kramer)의 주장처럼 캠프적 감성이란“아이러니의 감식안으로 변장한 채 이상한 키치가 제공하는 쾌락에 자유롭게 빠져든”것이고 따라서 벼룩시장을 살펴보는 것보다 차라리 성과가 없는 것이라는 견해를 수락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키치가 고급미술의 근본원리, 즉 진지성 자체를 침식하고 있을 정도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오늘날 많은 이론가들의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가 대두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사회이론적 측면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기로 하자. 미술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간단 히 이야기하여 모더니즘‘미술’으로부터의 일탈이자 그것의 거부였다. 그것은 모더니즘과는 달리 하나의 스타일이 아닌 절충주의, 이종교배의 복합적 양식을 선호한다. 그것은 합리적 가치보다는 복합성과 모순을 존중하며 시·공간적으로 존재해왔던 혹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대중 문화적 산물들을 당연히 포괄하는)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려 한다. 우리는 이러한 포스트모던한 산물들에 대해, 한편으로 이러한 것들이 현대적 삶의 복합성과 다양성, 즉 현재에 과거와 전통이 중복되고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세대와 인종, 삶의 방식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긍정 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무정부주의와 매너리즘, 피상적인 불건강함을 드러낸다는 것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상과 키치와의 연관이다. 키치는 원래 다양한 대중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절충적일 뿐 아니라 양식적으로 과잉규정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동시에 무엇이든 효과를 위해서는 모조하며 이미 인정받은 모든 역사와 전통을 자신의 상업적 목적을 위해 무기로 활용한다. 게다가 키치는 기본적으로 대중문화적 산물이면서도 고급예술을 참칭하곤 한다. 때문에 실상 키치는 그 명확성만큼이나 기호학적으로 모호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적 대중주의는 필자의 생각으로는 고급미술의 측면에서의 문화의 키치화 현상에 대한 반응이자 그것에 대한 일정 정도의 굴복이다. 키치가 고급예술을 차용, 인용, 참칭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것에 대한 대체물을 제공하려 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키치가 지배적 현상으로 되어버린 현재를 상기시키려 하며 키치적 욕구를 불가피한 욕구로서 수용하고 거기에서부터 새로 운 출발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키치가 이념과 정서의 양측 면에서 성공적으로 정복해낸 거대한 세계에 함몰해버리곤 한다. (4)의 경우는 위의 모든 현상들을 예술과 키치의 본질적이며 구조적인 연관의 차원에서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오늘날 키치는 한편으로 삶에 대한 포괄적인 비전을 상실케 한 삶의 존재조건이 자기기만을 심리 적으로 구조화함으로써 생겨난 현상이다. 자기향수로서의 키치는 이러한 비전의 상실을 스스로 끌어들인 사이비 이상과 연관된 정서들을 통해 보충한다. 하지만 동시에 키치는 이러한 자기기만을 확증, 고무하는 대상물들이 사회, 경제적 요건에 의해 대량으로 산출됨으로써 가능해진 현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상물들의 막대한 상업적 유포는 점점 더 진 지한 예술의 존립근거를 위협한다. 즉 키치를 낳게 한 조건은 동시에 보 다 진지한 예술작품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키치를 낳게 한 조건의 위협은 역으로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자의식 적인 기획을 창출해내기도 한다. 그린버그(C.Greenberg)가〈아방가르드와 키치〉라는 글에서 키치와 아방가르드가 하나의 맞짝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하지만 이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메워가고 있는 수많은 중간적 산물들의 존재는 이러한 간극이 나날이 침식당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이러한 키치의 생명력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명확한 위치를 지정해준다는 점에 었다. 현대적 삶의 불안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사이비 이상에 안주하도록 유혹한다. 물론 그것은 환상이다. 하지만 키치가 제공하는 직접적이며, 유한한 이상은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비전의 상실이 가져오는 고통과 그것이 요구하는 투쟁을 지속할 만한 힘이 충분치 않은 유약한 현대인들에게는 끊을 수 없는 마약과 같은 힘으로 다가선다. 삶에의 의지는 진리에의 의지보다 강한 법이다. 의미를 확보하려는 인간의 요구가 확인되지 않을 때 환상은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의 확보는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실상 문화의 키치화 현상이 점차 고도화해가면서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기만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 키치를 키치로 볼 수 있는 능력조차 점차 잃어가고 있다. 키치는 날로 실제적인 의미에서 환경이 되어가고 있으며 마찬가지 이야기지만 일종의 삶의 근거로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이것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현재 진지한 예술에 요구하는 것도 실상 바로 이러한 찾아감 이상이 아니다. 물론 이 길 앞에는 키치로 이끄는 수많은 함정들이 잠복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찾아감은 환상을 환상으로, 기만을 기만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반성적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자기반어적인 노력이다. 적지않은 현대의 예술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거리확보를 시도했다. 심지어 키치적 감수성에 젖어드는 시도들 혹은 그것을 통해 사이비 진지함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는 시도들 역시 이러 한 자기반어적인 노력의 일환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로부터 어떤 새로운 비전을 창출하려는 일은 쉽지 않으리라.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결코 기만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화하는 길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만을 벗어나려는 노력들에서 확보되는 자기확인의, 의미의 단편들로부터 보다 포괄적인 비전을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하는 일을 중지할 필요는 없으리라. 6) Herold Rosenberg, The Tradition of the New, New York, McGrowHill, 1965, p.268. 7) Herman Broch, Einige Bemerkung zum Problem Kitsches, In Gil1o Dorfles, Kitsch: The World of Bad Taste, New York, University Books, 1969. 8) Susan Sontag, Note on Camp, Against Interpretation, New York, Dell Laurel Edition,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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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마치 사족과도 같이 우리 문화의 키치적 성격에 대한 논의를 덧붙이려 한다. 성완경의〈미술의 민주화와 소통의 회복〉9) 이라는 글에는 우리 문화의 키치적 성격에 대해 흥미로운 관찰을 보여주는 한 경험사례가 나와 있다. 이야기인즉 다음과 같다. 그는 한 변두리 연립주택에 살게 된다. 그 집의 거실 천장에는 집의 가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지만 결국 모조품인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그런데 수도가 자주 고장난다. 몇 번의 하자보수에도 불구하고 날림공사의 여진은 그대로이고 점차 분양주의 얼굴마저 보기 힘들게 되자 그는 무엇인가를 깨닫는다. 즉 샹들리에는 날림공사와 맞짝이다. 부실한 생활환경에 대한 눈가림이 샹들리에의 기능이다. 이 사례에서 주목할 점은 떡과 눈가림이다. 그가 보기에 우리에게서 문화란‘제삿상에 올려진 떡’이나‘물려받은 보물의 집합’이었으며 이것은‘부실한 삶에 대한 눈가림’의 구실을 한다. 즉 문화는 문화라는 신앙의 부적이었을 뿐 실제생활에서 지속적으로 확보되는 활력으로서의 기능과는 거리가 멀었고 또 멀다(광화문 네거리의 이순신장군 동상에서, 연립주택의 상들리에, 강남의 그야말로 이국적이며 환상적인 포스트모던적 건축물들, 이 모두의 배면에 흐르는 그 강력하고 일사분란한 힘에 대해 생각해 볼 것). 그리고 이 부적이 우리의 빈약함을 혹은 상처받은 자존심을 위로해준다. 앞서 우리는 키치를‘상실된 낙원의 자기기만적 대체물’이라는 취지로 설명해내려 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통스러운 최근의 역사는 우리에게 있어 문화에게‘상실된 낙원의 자기기만적 대체물’이 되어주기를 요구했다. 물론 이때의 자기기만은 일종의 눈가림으로서 타인에 대한 의식이 개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키치의 자기향수적 성격과는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이비 이상으로 실질을 대체하려는 키치의 본질적인 성격과 다른 것은 아니다. 결국 자신들의 삶의 실제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 결여된 문화는 아무리 위장을 하더라도 키치를 낳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제3세계적 혼융의 역사는 불가피하게 사이비 이상에서 자기탈출구를 찾아왔으며 문화는 그것에 기여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정직한 인식의 문화와 행위가 충 분히 성장하기도 전에 후기 산업사회의 문화의 키치화 현상이 막대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문화의 키치화에 대해 문화의 현실화로서 맞서는 일임을 확인하는 것이다.(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