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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비난에 대한 수행자의 자세
▶ 무애행(無碍行) : 걸림 없는 행
▶ 무애심(無碍心 : 걸림 없는 마음
부처님 당시에 어떤 한 장자(長者)가 너무너무 예뻐서 정말 시집보내기가 아까워. 이렇게 아름다운 딸을 누구에게 시집보낼 것인가 고민고민 하다가 정말 내 딸을 데리고 갈만한 남자는 천하제일(天下第一) 훌륭한 남자여야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자기가 제일 존경(尊敬)하는 부처님이 생각난 거야. 그래서 “아, 그렇다. 우리 딸을 부처님께 시집을 보내야 되겠다.”
나쁜 마음에 이런 것은 아니오. 자기는 부처님을 좋아하다 보니까 이렇게 생각이 미친 거요. 그래서 부처님께 가서 인사를 하고는 이런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말씀을 드렸단 말이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을 다 들으시고는
“장자여, 이 육신(肉身)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정말 헛된 꿈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잘 채색(彩色)된 항아리에 똥을 담아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이것은 금방(今方) 허물어질 항아리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갖가지 비유(譬喩)를 들어서 육신에 집착(執着)하지 말 것을 장자에게 말했습니다.
부처님은 이미 성도(成道)하실 때, 그 마왕(魔王)의 3딸이 부처님을 유혹(誘惑)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수행자(修行者)여, 이렇게 따뜻한 봄날, 홀로 외로이 숲에서 그렇게 음식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이렇게 고행(苦行)을 하다가 죽어버린다면 누가 알아주겠느냐? 그러니 이 좋은 봄날, 우리와 더불어 쾌락(快樂)을 즐깁시다. 수행(修行)은 늙어서 해도 늦지 아니하지 않느냐?”
이렇게 얘기했을 때 부처님께서
“그런 말을 하지 마라. 그 육신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잘 살펴보면 채색된 항아리에 똥을 담아 놓은 것과 같다. 그러니 나에게 가까이 오지마라.” 그래도 그 여인(女人)들이 유혹(誘惑)을 하자, 그러자 부처님이 그 3여인을 가리키니까 갑자기 노파(老婆)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그들이 창피해서 도망갔다.
이것은 여인을 비하(卑下)하거나 이런 얘기는 아닙니다.
이것의 내용(內容)은 고락(苦樂)에 대한 얘깁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락(樂)을 말하고,
그 늙은 노파라는 것은 고(苦)를 말하는 거요.
우리는 고와 락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고를 떠나 락 얻고자 하는 거요.
그런데 사실은 락이 곧 고다.
이게 그 젊은 몸이 곧 노파다. 이런 뜻입니다.
옛날에 주로 그런 얘기를 할 때는 여인(女人)에 대한 비유(譬喩)가 많이 나오다 보니까, 요즘 젊은 여인들이 경전(經典)을 읽으면 기분 나쁠 수가 있어요. “왜 불교는 자꾸 여인을 나쁜 의도(意圖)로 사용하느냐?” 이렇게 오해(誤解)할 수는 있는데, 시대가 그런 시대였고, 그 여인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은 주로 수행 차원에서는 어떤 쾌락(快樂)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요. 바로 그러한 얘기를 하신 거죠.
그러니까 이 장자가 듣고 크게 깨우쳐서 기쁨을 얻었어요. 그런데 그 얘기를 아버지를 통해서 듣고 딸은 억수로 기분(氣分)이 나쁜 거요. 부처님이 나를 비하(卑下)했다. 이거야. 나를 거절(拒絶)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똥무더기 취급(取扱)했다. 이거야. 앙심(怏心)이 딱 품어진 거요. 그러니 이렇게 말이 잘못 전달되거나 집착을 하게 되면 전혀 의도(意圖)와는 관계없는 이런 일이 생겨나게 되요.
결국은 부처님께 시집보내려다가 못 보내고, 이웃나라의 왕의 청혼(請婚)을 받아서 왕비(王妃)가 되었어. 그런데 부처님이 유행(遊行)을 하시다가 그 나라에 간 거요. 부처님은 이런 사정(事情)을 전혀 모르시죠. //
또 다른데 전해 내려오는 얘기는 요거와는 조금 다릅니다.
『아주 인물(人物)이 잘난 이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다. 이 여인과 결혼(結婚)하려고 온갖 남자들이 청혼을 했지만, 이 여인의 마음이 하나도 마음에 안 들었어. 그러다가 어느 날 부처님을 친견(親見)하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그 부처님의 생김새며, 늠름(凜凜)한 자태(姿態)며, 그 조리(條理) 있는 말씀이며 여기에 완전히 감복(感服)을 해버려.
그래서 늘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러 다니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여기에 정성(精誠)을 쏟은 거요.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께서 사람들을 대할 때, 자기에게 대하는 거나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거나 부처님께 공양(供養)도 올리지도 않고, 인물(人物)도 예쁘지도 않고, 잘사는 것도 아니고, 이런 사람을 대하는 거나 똑같다는 것을 발견(發見)하고는 마음속이 너무너무 섭섭했어.
그러니까 부처님이 자신에게 대하는 거에 불만(不滿)이 있는 것은 아닌데, 남과 비교(比較)했을 때 자기는 조금 특별(特別)해야 되는데 하나도 특별(特別)한 게 없는 거요. 그것이 섭섭해서 법문(法門) 듣고, 부처님께 공양(供養) 올리는 신이 죽었어. 신바람이 안나. 이러다 보니까 점점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소위 말해서 신심(信心)이 식어버린 거요. 그러자 이웃나라에서 왕이 청혼(請婚)을 하니까 거기에 시집을 갔다. 이런 데도 있습니다.』
아무튼 부처님과는 아무 상관없이 한 여인의 어떤 오해(誤解)로 부처님에 대한 악심(惡心)을 품게 된 거요. 그런데 부처님이 이 나라에 갔을 때, 많은 사람이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듣고 기뻐했어. 그런데 이 나라에 궁녀(宮女)들이, 또 왕에게는 여러 명의 왕비(王妃)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너무너무 기뻐하는 거요. 궁중(宮中) 안에서도 늘 그 얘기를 하는 거요.
그런데 그 얘기를 들으니까 기분이 나쁘잖아요. 전자(前者)의 경우 같으면 어떤 케이스요? 나를 모욕(侮辱)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존중(尊重)받는 게 기분이 나쁜 거요. 후자(後者)인 경우는 부처님이 옛날에 누구 거였다? 내거였다. 이거지. 그죠? 그런데 하물며 이제는 저 다른 궁녀들이나 왕비가 마치 부처님을 자기 것처럼 갔다 와서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요.
법문 듣고 와서 좋아하는 꼴도 보기 싫은 거요. 그래서 왕에게 가서
“대왕(大王)이시여, 이 나라의 주인(主人)이 누구입니까?”
“이 나라 주인이 누구긴 나지.”
“그러면 이 나라 사람은 누구를 받들어야 합니까?”
“그야 나를 받들어야지.”
“그런데 대왕이시여, 이 궁중(宮中)에 있는 여인들마저도 당신을 주인(主人)으로 안 받들고 딴 사람을 주인으로 받듭니다.”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저 여인들을 보십시오. 비록 궁 안에 살면서 겉으로는 대왕을 모시는 것 같지만, 마음은 다 저 밖에 있는 부처님을 좋아하고, 온통 정신이 거기 박혀 있으며, 앉으나 서나 그 얘기만 해요.”
왕이 기분이 나빠졌어. 질투심(嫉妬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도 스님 법문 듣고 좋다고 집에 가서 남편한테 “아이고, 우리 스님 법문 하는데 어쩌고저쩌고” 이렇게 얘기하면 싫어합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법문이 귀에 안 들어옵니다. 아무리 얘기해줘도. “너나 들어라.” 이래요.
어떻게 말해야 되느냐? 가서 남편(男便)한테 잘 해야 되요. 그러면 “오, 당신 웬일이야?” 이러면“아, 제가 오늘 절에 가서 스님 법문을 들었는데 가만히 듣고 보니까 내가 고집(固執)이 세고, 여러 가지 은혜(恩惠)를 모르는 사람 같았어요. 법문을 듣고 깨닫고 보니 참 당신이 훌륭하다는 것을 내가 깨쳤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소.”
그러면 “쓸데없는 소리.” 이렇게 말은 하지만 속으로 어때요?
“어떤 중인데 괜찮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요. 이게 포교(布敎) 방법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래야 나중에 집에서 성질(性質)내고 이러면
“요새는 절에 안 가나? 법문 들어야지.” 이렇게 오히려 격려(激勵)도 해주고.
안 간다 그러면 차 태워서 여기 데려다주고 자기는 밖에 어정어정하고 있다가 가고, 또 몇 달 지나선 법당(法堂)에 들어와서 절만 하고 가고, 법문은 안 듣고. 그러다가 어쩌다가 한번 듣기도 하고 이러다가 물드는 거요. 좋은 것도 뭔가 저항심(抵抗心)이 있는 거요. 왜 그럴까?
법문들 들으면 마누라가 틀림없이 “법문 들었죠. 여보,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지?” 이렇게 할 거 같아서 멀리하려는 거요. 그래서 이 수행(修行)이라는 것은 남을 논(論)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만 하면 되는 거요. 얘기가 조금 달라졌습니다마는.
그러니까 딴 사람이 법(法)을 듣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마음의 질투심이 생긴 거요. 또 왕에게도 이렇게 말하니까 자기 여인이 딴 사람을 더 좋아한다 하니까 왕도 질투심이 생겨서 이 왕비가 제안(提案)한 대로 법문을 못 듣도록 했어요. 나아가서는 공양도 접대(接待)를 못하도록 했어요. 더 나아가서는 걸식(乞食)하러 오면 하인(下人)을 시켜서 막 욕설(辱說)하도록 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 제자들이 살기가 힘들잖아. 그죠. 딴 데 가면 다 환영(歡迎)하고 공양(供養) 접대하고 이러는데, 이거는 환영은 커녕, 공양 접대(接待)하기는 커녕 욕설만 하니까. 그래서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건의(建議)를 했어요.
“부처님. 이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를 비난하고 욕설을 하는데, 딴 나라에 가면 전부 부처님을 존중(尊重)하고 공양도 올리고 이러니 딴 나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물었어.
“아난다여, 그 나라 사람들도 역시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비난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부처님 또 다른 나라로 가죠 뭐.”
“아난다여, 그 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비난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면 또 다른 나라로 가죠 뭐.”
“아난다여, 그것은 쫓겨 다니는 거란다. 전쟁터에 나간 용맹(勇猛)스러운 코끼리가 수많은 창(槍)을 맞고도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전진(前進)하듯이 수행자(修行者)는 세상의 온갖 비난(非難)에 대해서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나아가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自由)가 뭔지를 알아야 됩니다.
자유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가 아니에요.
세상은 늘 제 기분(氣分)대로,
제 마음 따라 칭찬(稱讚)하기도 하고, 비난(非難)하기도 합니다.
칭찬(稱讚)에 우쭐 대서도 안 되고,
비난(非難)에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비난을 할 때는
돌이켜서 나에게 비난 받을 만한 일은 없는가 하고 돌이켜보고,
마땅히 비난받을 만한 일이 있다면 돌이켜서 참회(懺悔)하고,
비난받을 만한 일이 없다면
비난에 구애(拘礙)받지 말고 거기에 걸림 없이 당당(堂堂)히 살아야 된다.
이것이 수행자(修行者)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그렇지 않죠.
작은 비난에도 흥분(興奮)하고, 작은 칭찬에도 들떠서 우왕좌왕(右往左往) 하면서 사는 게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마는 칭찬에 들뜨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훌륭하다. 잘한다. 이렇게 칭찬을 하면 누구나 다 우쭐댈 수밖에 없죠.
그 칭찬에 우쭐대지 않기가 정말 어려운 거요.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 칭찬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여기 꽃이 한 송이 있는데
이 꽃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오.
이 꽃을 보고 싫어하는 것도 그 사람의 마음이오.
그러니 좋아하는 마음, 칭찬하는 마음은 그의 마음이오.
그러기 때문에 꽃을 보고 좋아하면 자신이 좋은 것처럼,
남을 칭찬하면 자신이 기분이 좋은 거요.
그들은 그들의 느낌대로 그것을 표현한 것뿐이오.
그것은 내 자신하고는 아무 관계(關係)가 없는 일입니다.
만약에 내 자신하고 관계가 있다면
똑같은 일을 두고
어떤 사람은 칭찬(稱讚)하고, 어떤 사람은 비난(非難)할 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칭찬하면 다 칭찬하고, 비난하면 다 비난해야지.
각자 다 자기 느낌대로, 자기 생각대로 하기 때문에
똑같은 사람, 똑같은 일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잘했다. 잘했다.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비난(非難)을 하는 사람도 있는 거요.
이번에 주일스님 백일 단식(斷食)사건 말미에, 여기 와 계시고, 우리는 그분이 생명(生命)을 구할 수 있게 최선(最善)을 다했단 말이오. 우리는 아무런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살길을 열 수 있겠느냐. 이것만 생각해서 했단 말이오. 그러나 지나놓고 보면 여기에는 비난과 칭찬이 함께 들어오는 거요.
“아이고, 스님 고맙습니다. 우리 비구니(比丘尼) 스님들이 해야 할 일을 스님께서 해주셨습니다.”
“아이고, 우리 불교 체면(體面)이 있었습니다.”
“아이고, 수도원(修道院)에 있다가 돌아가시거나, 수도원에서 문제가 해결이 되었으면 우리 불교는 뭐 할 뻔 했습니까? 아이고 그래도 잘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반면(反面)에
또 다른 한쪽에서는
“정토회가 그런 정치적(政治的)인 사건에 왜 나서냐?”
“정토회가 왜 그런 반정부(反政府) 활동을 하느냐?”
“정토회가 정부 정책(政策)을 반대하고 그렇게 하는 게 정토회냐? 정토회는 여태 듣기로는 수행하고 이런 거 가르친다고 하던데, 이제 단체(團體)가 커지려니 정치하려고 그러냐?” 뭐 이렇게 비난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가족 중에도
“아이고 스님, 우리 남편이 정토회 사이비(似而非) 집단이라고 맨날 하다가 요번 사건보고 정토회 괜찮다고 칭찬 받았어요.”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분은 정토회 나가는 것을 남편이 좋아했는데, 요번 사건 생긴 것을 보고 나가지 말라고, 나쁜 단체라고. 그래서 못 가게 합니다. 이런 사람도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 칭찬은 자신(自身)의 느낌대로 마음대로 하는 거요.
비난도 자신이 칭찬과 마음에 따라 하는 거란 말이오.
그러니 비난(非難)을 받았을 때는 돌이켜 뉘우치는 게 필요할 뿐이지,
돌이켜 봤는데도 문제가 없다면 그 비난은 그냥 받고 나아가야 돼.
칭찬(稱讚)도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우쭐 대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듣고 그냥 나아가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교만(驕慢)에 빠지거나
절망(絶望)에 빠지거나. 이렇게 되기가 쉽다.
이런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 같으면 이렇게 안 되잖아요. 아난존자처럼 되기가 쉽죠. 여기 일단(一團)은 나를 환영(歡迎)하는 사람이 있고, 여기 일단은 나를 비난(非難)하는 사람이 있을 때, 결국 우리는 어느 쪽으로 가게 됩니까? 칭찬하고 환영하는 쪽으로 가기가 쉽다.
제가 북한 동포(同胞) 굶어죽는 거 돕자고, 한국에서 안 돼서 미국까지 가서, 인도주의적(人道主義的)인 지원(支援)은 해야 된다. 이렇게 하니까 결국은 소위 말하면 진보적(進步的)인 사람들은 동조(同調)를 하죠. 그럼 사람을 만날 때 동조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요? 반대하는 사람 만나러 가요? 동조하는 사람 만나러 가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내 친구가 하는 말이
“스님, 새가 한 날개로 납니까? 두 날개로 납니까?”
“두 날개로 날지.”
“그런데 왜 스님은 한 날개만 자꾸 젖습니까?”
미국에서 뭐가 결정이 되려면 민주당 공화당이 다 동조(同調)를 해야, 두 날개를 흔들어야 이게 해결(解決)이 되는데, 스님은 동조하는 세력만 자꾸 찾아다니면서 한 날개 짓만 한다. 이거야. 아, 그때 내가 크게 깨쳤어요. 내 뜻에 동조하고 대화(對話)가 되는 사람만 찾아갔기 때문에.
그래서 그 다음 부터는 방향(方向)을 바꾸어서 반대(反對)하는 사람, 누가 제일 반대하느냐? 반대하는 사람만 찾아 가다보니 지금은 어떻게 되었냐 하면 워싱턴에서 아는 사람,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이 전부 보수파(保守派)들이오. 부시맨들이오. 자꾸 가서 만나서 얘기를 하다 보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반대하는 사람과
얼마나 공유점(共有點)을 마련하느냐, 하는 것만큼
이 세상은 화합(和合)이 되고, 앞에 갈 수 있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반대하는 사람은 자꾸 피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서 우리는 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수행(修行)의 문제를 넘어서서,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더 평화(平和)롭게 만들 거냐. 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지침(指針)이 된다.
부처님께서 게송(偈頌)을 이렇게 읊으셨어요.
싸움터의 코끼리가 날아오는 화살을 잘 견디듯
나 또한 어리석은 자들이 주는 갖은 욕설(辱說)을 잘 참고 견디리라.
오직 훈련(訓鍊)된 코끼리만이 싸움을 이끌어 가는 것.
그러기에 왕은 훈련된 코끼리만을 탄다.
욕설을 참고 견디는 수행자는
실로 모든 인간 가운데 으뜸가는 성자(聖者)
노새도 훈련시키면 신비의 준마(駿馬)가 되고,
숲속의 현자(賢者)인 코끼리 또한 그런 법
또한 자기(自己)를 잘 다스리는 사람이
가장 으뜸가는 성자가 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자신을 향해서 욕설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악심(惡心)이나 분노(憤怒)를 일으키지 않고, 거기에 구애(拘礙)받지 않고 평화롭게 여여(如如)히 살아가셨다.
여기에 바로 부처님의
무애행(無碍行)_걸림 없는 행,
무애심(無碍心)_걸림 없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까지는 안 되더라도 그런 목표(目標)를 향해서 조금씩 조금씩 한발 한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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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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