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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딴지에 40여 년 과거의 월남전, 오늘의 남아공, 근 20년 간의 호주에 대하여 써왔다. 멀리 돌고 돌아온 느낌으로 이제 드디어 한국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다만 오늘의 한국이 아니고 반 세기를 거슬러 올라간 시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역사와의 첫 만남
대한민국의 많은 가정이 그러할 것이다. 얼마든지 잘 나갈 수 있는 집안이었건만 6.25 내전으로 풍비박산이 나고 준전쟁고아 상태에서 부모의 관리를 받지 않고 자유로운 프리레인지(방목 상태)로 아이들이 자랄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그랬던 탓에 어린 나이에 4.19 혁명을 참관할 수 있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학교가 문을 닫아 심심하고 할 일이 없어서, 동네 아이들을 인솔(?)했는지 형들을 따라 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신당동에서 골목골목으로 돌고돌아 을지로 2가에 있는 내무부까지 진출해 대학생들이 경찰과 대치 중인(발포를 하는 역사적 순간에는 아마 오줌 누러 갔던 것 같다.) 광경을 보았던 거다.
하루는 멀리서 연기가 나길래 달려가 보니 약수동에 있는 내무부 장관 최인규의 집이 불타고 있었다. 대학생들이 3.15 부정선거의 원흉이라며 최인규의 집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불이 꺼진 다음 창고에 들어갔다니 노트가 잔뜩 쌓여 있어서 무더기로 약탈(?)해 가지고 와서 홍길동이 된 마음으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노트에는 고무인으로 '어린이 여러분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세요. 내무부장관 최인규'라고 찍혀 있었다. 그가 그 다음 총선에서 출마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지역구인 남양주군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쌓아둔 것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무렵 나는 어린 시절의 박근혜를 보기도 했다. 최근에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신당동의 박정희 집은 내가 6학년 때 과외공부를 하던 선생님 댁 근처에 있었다. 박의 집은 깨끗한 적산가옥(일본 사람들이 살다가 간 집)이 있는 동네의 거의 끝에 있는 아담한(당시 수준으로는 큰 집이지만 지금으로는) 양옥집이었다. 그 집을 조금 지나면 바로 어려운 사람들이 사는 한옥 느낌의 재래식 가옥들이 있었는데 과외 선생의 집은 바로 이 동네에 있었다. 과외 공부를 하러 다니다 보면 박정희 집 대문 앞에 가끔 덮개로 별판을 덮은 지프차가 서고 깨끗한 옷차림의 공주 같은, 나보다 몇 살 어린 여자애가 타고 내리는 것을 자주 보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애가 바로 박근혜였다. 나는 공주 같은 그 애가 부러워서 운전병의 눈치를 보며 힐끔거렸던 기억이 있다.)
4.19처럼 그냥 본 정도가 아니라 시위에 직접 참여를 하기 시작했던 건 한일회담이 한창 진행 중인 1964년도였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하루는 운동장에서 아침 조회가 끝나고 교실로 들어가기 직전에 갑자기 학생회장이 교단 위에 올랐다. 그러더니 지금부터 데모를 하러 나간다고 발표를 하는 것이었다. 선생들이 기겁을 해서 말리기 시작하자 교장은 나가려면 교실로 들어가서 한 시간 동안 토론을 해보고 결정을 해서 나가라고 했다.교실에 들어와서 담임이 한일회담에 대하여 토론을 해보라고 했지만 아무도 이야기하는 녀석이 없어서 내가 나가서 평소에 사상계를 보고 갈고 닦은 실력으로 칠판에 지도까지 그려가며 설명을 했다. 특별히 당시 국무총리이었던 김종필이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사람은 15%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고등학생인 우리라도 나가서 시위를 해서 15%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심히 급우들을 설득한 결과는 칭찬이나 격려가 아니라 선동한다는 이유로 담임으로부터 떡실신이 되도록 얻어맞는 것이었다.
그렇게 맞았어도 어쨌든 학생들 전체가 나가는 바람에 나도 난생 처음 중앙청 앞까지 가서 시위라는 것을 해보았다. 그 때만 해도 시위가 나의 취미이자 특기가 될 줄은 몰랐다.
보다 더 밀접하게 역사 속 사건에 발을 걸쳤던 경험은 서태지와 관련이 있다. 물론, 서태지를 만났다거나 했다는 건 아니다. 그는 년식으로 보아 나와는 상관이 있을 리가 없는 음악가다. 그런데 '소격동'이라는 노래를 불러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노래 제목으로 특이하게 동의 이름을 붙였기에 도대체 소격동이 어디인가 찾아보았더니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던 동네였던 것이 아닌가.
바로 이 소격동이 내 생애 나름 의미가 깊은 사건이 벌어졌던 곳이다. 딱 한 번 가보았을 뿐이지만, 무슨 큰 사건이 있었다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간에 그렇다. 아마 1981년도의 일이었지 싶지만 배경 설명이 좀 필요할 듯 싶으니 그 얘기부터 하겠다.
1965년에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수상하게도 '반혁명 사건'으로 여러 명의 영관급 장교들이 구속되었다. 당사자들의 주장으로는 박정희가 애초에 약소한대로 민정으로 이양할 생각이 없고 계속 권력을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궐기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숭고한 목적으로 목숨을 걸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에 대해 반대편에서는 장성 진급이 안 되어 인사 불만을 가진 장교들의 모의라고 했다.둘의 주장이 판이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군부 세력 간의 세력 싸움으로 보이는 일이었다.
그러나 숙청된 이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몇 명은 사형언도를 받고 이인수 대령이라는 이가 무기징역을 받았다. 이 대령은 5.16 군사반란 당시에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박정희와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한 사이였던 장도영 중장이 임시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을 맡았을 때 비서실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당시 나는 야간 대학에 입학한 상태였기 때문에 만나는 이들이 주로 직장인이었다. 그 중에 서대문 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있는 박상환이라는 선배가 있었다. 하루는 막걸리를 마시는 자리에서 평소에 잘 떠들던 박 선배가 한숨을 푹푹 내 쉬는 것이었다. 내가 "형? 왜 그래?"라고 물었더니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수인 가운데 이인수 대령이 있는데 인격적으로도 훌륭하고 여러 모로 배울 점이 많아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잘 돌보아 주고 있었는데 이 대령이 어려운 부탁을 해서 목하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어떤 편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이었는데 그 편지는 우체통에 넣을 수가 없고 반드시 당사자를 만나서 직접 전달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어려운 부분이었다. 왜냐하면 수신인이 날아가는 새도 '동작 그만!'하면 떨어질 수 있는 당시 보안사령관인 윤필용 소장이라는 것이다.
정치범 사형수가 보안사령관에게 보내는 편지이니 잘못 엮이면 골로 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선배는 이인수 대령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 받기는 받았지만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원래 태어나기를 겁이 조금 모자라게 태어났기 때문에 모험심이 발동했는지 "그 편지 나 줘요. 내가 전해 줄게"라고 했다. 박 선배는 "너 괜찮겠냐?"고 몇 번을 거듭 물었지만 당시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19살 대학 1학년생이었는 데다가 박정희에 대하여 어쩐지 기분이 나쁘던 차라 그런 일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천만한 일인데 '만일 누가 물으면 사실대로 말하면 되겠지 뭐'하고 단순하게 생각을 했던 거 같다.
편지를 가지고 소격동에 있던 보안사령부로 무작정 찾아가서 사령관 면회를 하러 왔다고 했더니 정문에서 보초를 서는 덩치가 한 무더기 하는 헌병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너 임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어?"하고 눈을 부라렸다. 내가 "사령관에게 전해줄 것이 있어서 왔다"고 하니까 그제야 정색을 하고 "그럼 맡기고 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안 된다. 직접 전해 주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니까 인상이 굳어지더니 어떤 사무실로 데려갔다. 거기서 사복을 입은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이 편지를 달라고 하길레 여전히 안 된다고 했다. 보안사 측에서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사령관을 만나겠다고 하니 기도 차지 않았겠지만 사령관에게 직접 전해줄 것이 있다고 하니 위협을 해서 뺏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 된 것이다. 보안사 직원이 나에게 "군대 갔다 왔냐?"고 묻길래 "안 갔다 왔다"고 하니까 피식 웃으면서 "그러니까 네가 고집을 부리지" 하면서 실소를 했던 게 기억난다.
그렇게 과장이라 불리는 사복 입은 사람은 계속 나를 구슬리고, 나는 반대로 고집을 부리면서 한 동안 앉아 있었다. 나중에는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입장이 되어 버리더라. 보안사 측에서는 나를 그냥 보내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난처해했고 내 입장에서도 비록 위협은 없지만 그 자리에 무작정 버티고 있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사무실에 역시 사복을 입은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어? 성수! 네가 여기 웬일이냐?"며 나를 알아보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내가 천호동에 있는 사설 독서실에서 공부할 때 고시공부 한다고 옆에 앉아 있던 30대 형이었다. 차종치종을 들은 형은 "안심하고 나에게 맡기고 가라"고 해서 나도 곤란한 처지에 잘 되었다 싶어서 그 형에게 편지를 맡기고 와 버렸다. 알고 보니 그 형은 고시에 낙방하고 보안사 문관 시험을 보고 들어와 있었던 거였다.
다시 1981년도 즈음으로 돌아가자. 그러니까 앞서 편지 배달 사건을 까맣게 잊어버린 상태로 15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어떤 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정치범 사형수 이인수 신앙 간증'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나는 '어라? 저 양반이 언제 나왔지?'하는 생각으로 그 교회를 들어가서 이 대령의 간증을 들었다. 집회가 끝나고 나서 조용한 시간에 이 대령에게 "혹시 서대문 교도소 교도관이었던 박상환에게 편지 보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고 물었더니 순간 얼굴빛이 변하면서 경계하는 듯 한 자세가 역력했다. 내가 신분을 밝히고 그 당시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이 대령은 내 손을 덥석 잡더니 "나는 이제까지 박상환이 편지를 전해 주었는지 알았더니 천사가 따로 있었군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도대체 그 때 편지 내용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더니 윤필용은 육사 동기로서 자신에게 신세를 진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정치적으로 패배해서 살 길이 없지만 가족들을 부탁 한다'는 내용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편지를 전해 받고 윤필용은 그 후부터 가족들의 생계를 돌아보아주었다고 한다. 이인수 씨는 내 손을 잡고 "모르는 사이에 천사의 역할을 해주신 겁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든 내가 할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요. 내가 신세를 꼭 갚겠습니다"라고 했다.
그 이후 이인수 씨와 여러 번 만나서 좋은 시간을 가졌는데 몇 해 전 중국에서 교통사고로 먼저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그를 죽이려고 했고 나는 그 가족을 살린 셈이 되었기에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현실 속으로
1970년도에 나는 구파발(본명이 김봉남으로 밝혀진 앙드레김의 고향)에 살고 있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대학을 그만 두고 할 일이 없어서 허송세월하다가 70년도에 정부의 경제기획원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전국적으로 정확한 통계를 낸다고 시작한 총인구센서스의 조사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 달 동안 신도읍 사무소에 나가서 일을 했는데 일을 마치는 날 수당을 주면서 그동안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지 읍장이 부르더니 지역구 국회의원인 김 의원에게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 의원은 당시 여당인 공화당 소속이었기에 싫다고 했더니 일단 사람을 한 번 만나보기나 하라고 했다. 도대체 국회의원이란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만나나 보자는 생각에서 김 의원을 만나게 되었다. 막상 대화를 해보니 인품이 괜찮아 보였다. 거하게 밥을 사주면서 아버지뻘이 되는 김 의원이 겸손하게 '사회생활을 배우는 셈치고 나를 좀 도와 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바람에 항상 정에 굶주린 내가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물론, 김 의원의 부탁을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아르바이트도 끝나고 딱히 할 일이 없었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 후 김 의원은 정말로 나에게 아버지처럼 대해 주었다. 어쩌다 둘이 있게 되면 '월급이 부족하지 않느냐'면서 따로 만 원짜리 자기앞 수표를 한 장씩 주기도 했다.
내 신분은 국회가 채용하는 공무원 신분의 비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의원 개인이 채용하는 개인 비서였다. 비서라고 해봤자 어린 나이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국회로 출근 하는 일이 아니라 선거에 대비해서 구파발에 새로 생긴 연락사무소로 출근을 해서 전화를 받고 청년들 대상의 사조직 관리, 의원의 각종 연설문 기고문 등을 작성하는 일, 집회에서 사회를 보는 일이었다. 선거 때는 유세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요즘 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선거에서는 사람을 모으는 유세가 상당히 영향력이 있었다. 그래서 돈이 있는 여당에서는 전국에서 아가리 부대(유세반을 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를 모집해서 선거판을 휩쓸고 다녔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군대 생활까지 거의 13년간을 웅변을 한 이력이 있었다. 집안마다 내력이 있고 내려오는 기질이 있듯 우리 집안은 주둥이가 발달된 집안이다.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때 법원에 가서 말 잘하는 변호사가 변론하는 것을 방청하는 것이 취미였다고 하고 건축사였던 아버지가 명동에 있는 성모병원을 지을 당시 노기남 대주교가 "말만 잘하지 말고 건물을 잘 지으라"고 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러한 집안 내력 덕분인지 나도 웅변대회에서 타온 상장으로 도배를 할만 했지만 한 번도 내 방을 가져보지를 못해서 뚤뚤 말아 처박아 두기만 했었다. 부상으로 먼지만 끼고 둘 곳도 마땅치 않은 트로피는 참 질색이었다. 그 당시에는 흔히 큼지막한 벽시계를 부상으로 주었는데 단칸방에 벽시계는 하나면 족해서 대회 때 받아 온 벽시계를 고아원에 선물한 적도 있었다. 웅변을 하는 사람에게는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것이 최종 목표인 법인데 나는 장관상을 몇 번 타고서는 웅변계에서 조용히 은퇴해 버렸다. 왜냐하면 대개의 웅변의 주제라는 것이 반공, 저축, 애국 등등 지극히 단순한 선전성 주제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웅변을 그만둔 또 다른 까닭 중 하나는 웅변이 깊은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닌 정해진 원고를 앵무새처럼 외워서 발표하는 단순기술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김 의원의 비서로 발탁된 것에는 선거철을 맞이해서 이런 나의 경력이 아가리 부대에 필수적이었기도 했었다.
또 한 가지 필수적인 업무는 민원을 해결하기 위하여 심부름을 하는 일이었다. 민원 중에는 개인적인 자질구레한 일도 있었지만 공적인 일도 적지 않았다. 가장 큰 일은 전기가 아직 들어오지 않는 곳에 전기가 들어가도록 하는 일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70년대 초 만해도 지금의 일산, 원당 일대인 고양군, 즉 서울 도심에서 30분도 안 떨어진 마을에도 전기가 안 들어오는 곳이 많았다. 그래서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는 날은 큰 잔치가 벌어졌다. 그런 자리에는 반드시 지역의 국회의원이 등장해서 마치 전기가 들어 온 것이 자기의 공로인 듯이 으스대곤 했었다. 나는 그 옆에서 가방 들고 서 있었고 말이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2주간 당 훈련원에 가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를 들었는데 대학에서 배웠던 정치학 개론과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실물정치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다.
강사가 손가락 두 개를 보이면서 '이것이 몇이냐?'고 물었다. 수강생 중에서 "둘이요"라고 답이 나오자 "아닙니다. 둘이라고 해서는 안 되고 '하나 보다는 많고 셋 보다는 적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치는 내가 언제 둘이라고 했느냐고 답해야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이었다. 그 후 비서 생활을 해 보니 정치는 정말 그런 것이었다.
당시 찍은 사진이 이거다. 1971년도 봄 어느 날, 구파발 신도 국민학교 앞 신작로에서 찍은 것이다. 지금 보니 리어카를 끌고 가는 사람이 길 한가운데를 갈 정도로 한산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안타깝게도 이 사진을 어떻게 찍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내 주변에는 카메라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유일하게 카메라를 가진 사람은 모시던 국회의원 차의 운전사 형 밖에 없었다. 그는 의원을 수행하면서 지역구 주민들을 만나면 항상 사진을 찍어서 현상을 한 다음에 의원과 함께 있는 사진을 유권자들에게 주는 식으로의 선거 운동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시골 사람들에게 사진이 귀한 시절에 국회의원과 같이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 작전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아마 추측컨대 이 사진도 그 시기에 운전기사 형이 찍어 주었던 것 같다. 24살의 나이답지 않게 노숙에 보이는 것은 당시는 주로 상대하는 사람들이 장년층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나이가 들어 보이려고 노력했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찍어준 운전기사 형과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내가 근무하던 구파발에 있는 사무실은 파출소와 예비군 중대 본부가 있는 옆 건물에 있었다. 당시는 대도시에서만 다이얼 전화가 되고 지방은 교환원을 통해서 연결을 해주는 시대였다. 사무실에서 일산에 있는 지구당 사무실과 통화를 할 때 잘 안되면 파출소에 가서 경비전화를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경찰서와 정당 사무실이 경비 전화로 연결된다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당시는 군사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당시는 예비군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서 툭하면 소집을 해대던 때이기도 했다. 가뜩이나 향토 예비군이라는 제도 자체가 성가신 일인데 중대 본부의 중대장이 성격조차 고지식해서 답답할 정도로 꼼꼼했다. 당연히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자기가 맡고 있는 지역의 모든 남자들에 대해서 마땅히 신상을 파악하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책임감이 필요 이상으로 높은 예비군 중대장이건만 내 정체는 파악이 안 됐었나보다. 군대를 갔다 왔을 것으로 보이는 (사실은 25살에 입대했으므로 입대 전이었다.) 민간인 하나가 당당하게 파출소를 드나들며 경비전화를 사용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더욱이 나는 양복이 없어서 항상 검은 잠바를 입고 다녔다.
그래서 하루는 의원 운전기사에게 넌지시 내가 누구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중대장의 성격을 잘 알고 평소에 거시기하게 생각하던 운전기사(군대에서 공군참모총장 운전사를 해본 경험도 있어서 그런지 권력관계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여기에 장난기 심한 사람이기도 했다)는 예비군 중대장이 겁 좀 먹으라는 마음에서 일부러 목소리를 죽여서 은밀하게 '사실은 저 사람은 정보부 파견원'이라고 속삭여주었단다.
그랬더니 그 후부터 나이도 많은 중대장이 젊은 나만 보면 신경을 잔뜩 쓰며 안절부절하는 것이 보기에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모른 채 하고 지나가는 편이었지만 이게 반복되다보니 은근히 중대장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매우 불편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그와 아무 상관도 없는 내가 스스로 다가가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 밝힐 수도 없는 일이어서 운전기사에게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느냐고 탓을 했지만 운전기사는 실실 웃으면서 우리들의 어색한 사이를 즐길 뿐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은 전혀 상관도 없는 사이에서도 말이나 행동이 아닌 오직 시선만으로도 사람이 무척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 사건이었다.
권력의 세계로 들어가 이와 같은 일들을 겪으면서도 딱히 크게 충격을 받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골프장에 갔던 일은 처음으로 '충격'이라 표현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당시 서울에 골프장이 두서너 개 밖에 없던 때 원당에 있던 한양(?,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컨트리클럽에 가서 의원이 경기를 하는 동안 클럽 하우스에 앉아서 기다려야 했다. 난생 처음으로 그림 같은 주변 풍경과 호화로운 클럽하우스를 보면서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국이 있더라도 이 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밖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었기 때문이었다. 충격이었다.
짧은 비서 생활에서 또 한 가지, 정말 확실하게 배운 것은 '인사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초를 맞이해서 며칠 쉴 수 있을지 알고 계획을 세웠더니 웬 걸? 국회의원이 권력서열 관계에 따라 뺑뺑 돌며 인사를 가고 또는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실세인 사람이 외국이라도 간다면 악수 한 번 하기 위해서 몇 시간이 걸려서라도 공항에 나가야만 하던 시대였다. 이런 것을 소위 눈도장 찍기라고 했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국회의원에게 인사를 하러 온 사람들이 더 높은 사람에게 인사를 하러간 국회의원을 몇 시간씩 기다려야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인사를 하러 온 사람도 마냥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도 나름 인사 받고 여기 저기 시간을 쪼개어 인사를 다녀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서열 관계에 따라 인사 교통정리를 해야 하는 비서의 입장에서는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정초 3일이 지나고 나면 링거 꼽고 입원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1971년 박 씨와 김대중 씨가 붙었을 때였다. 대선에서 총체적 부정선거로 김 씨를 이긴 박 씨가 총선을 치르는데 당시 우리 의원의 선거구는 대부분의 시골이 그렇듯이 야당이 전혀 힘을 못 쓰는 쉬운 선거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 전 날 의원이 긴장된 표정으로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그 날 참모회의에는 지구당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의원의 동생들까지 참석을 했다. 무슨 일인가 하고 궁금했는데 사무실에는 큰 여행용 가방 두 개가 있었다. 가방을 여는데 영화에서 마치 갱단들이 마약자금을 교환할 때 보여주듯이 지폐가 가득했다. 내 생애에 처음으로 본,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큰 돈이었다. 그런 돈을 정치판에서는 '오리알'이라고 했다. 한 번 계산 좀 해보시라. 3000만 인구에 가구 수를 7백만으로 잡고 천 원씩 돌리려면 도대체 얼마나 큰 돈이었을지. 천 원이 요즘 천 원이 아니고 당시 대학 등록금이 15만 원일 때의 천 원이었다. (물론 전라도는 안 주었겠지만.)
그 당시엔 천 원 지폐도 없었으므로 오백 원을 두 장씩 돌렸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정치를 하려니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들고 그 돈을 마련하려니 차관을 들여올 때 마다 삥땅을 치지 않고서는 될 수가 없던 것이다. 의원은 절대로 말썽이 안 생기도록 신중을 기해서 밤중에 조심해서 집집마다 찾아가서 세대주를 만나서 직접 전달하도록 작전 지시를 했다. 도둑놈이 돈을 훔치러 밤중에 몰래 남의 집에 가는 것도 아니고, 돈을 주는데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몰래 다니라니 세상에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을까? 이런 것이 바로 후진국형 정치 코미디인 것이다.
하여간 지난 해까지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를 하던 놈이 이런 짓을 하려니 어찌 양심이 가렵지 않을 수가 있겠나? 참 사람 망가지는 것 순식간이라더니 한번 타락하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게 되더라.
나는 도저히 그냥 넘어 갈 수가 없어서 비록 나이도 제일 어리고 최고 말단이었지만 조심스럽게 "의원님! 죄송하지만 이렇게 안 해도 틀림없이 당선될 건데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이런 짓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래도 우리 의원은 선생 출신이어 좀 점잖은 사람이라서 '시끄러워. 시키는 대로 해'하고 윽박지르지 않고 한숨 한번 길게 내 쉬더니 "내가 돈 가지고 오면서 참모회의 때 네 입에서 분명히 그런 소리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너 내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봐라. 첫째는 만에 하나 낙선되면 그걸 해볼 걸 하는 후회가 들까봐 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건 내 돈이 아니라 당에서 나온 거란다"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아무리 말단이라도 내가 나가서 언론에 불어버리면 큰 일이 날판인데 나를 믿고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주는 거다. 애초부터 김 의원의 이런 솔직성 때문에 내가 부하가 된 것이 아니던가? 이러니 망가질 거라면 함께 망가져야지 이제 와서 손 털고 나갈 수도 없고 어떻게 하겠나? (이런 게 바로 범죄조직의 생리인 것이다.)
하여튼 속으로는 무척 찝찝했지만 의원이 나를 그렇게 신임해주니 더 이상 군말을 하지 못하고 돈이 옆으로 새지 못하도록 눈 부라리고 감시를 하면서 내가 맡은 지역의 조직책들을 동원해서 돈을 뿌렸다. 그렇게 감시를 했는데도 나중에 알고 보니 후에 처가집이 된 아내의 집에는 돈이 안 갔단다. 배달 사고가 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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