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의 正見] (235) 무아(無我)와 참나
생각으로 그 뜻을 헤아리지 말라
참나는 있다, 없다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그런 논쟁을 하는 바로 당신 그 자체인 것이다. /셔터스톡
무아와 참나에 대해 헷갈려하는 분들이 많아서 여기에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무아란 우리가 여태까지 나라고 알아온 에고의 나는 본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진리자체로서 부처와 동격으로 이해되는 참나도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참나에 대해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은 개념이라 비판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것은 참나를 무엇이라고 정의하느냐의 문제부터 먼저 살펴봐야합니다. 만약 참나를 영혼같은 개체성을 가진 거라 규정한다면 그런 참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참나는 결국 유아(有我)이므로 무아와 모순됩니다.
그렇다면 참나란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방편적 단어이므로 앞으로는 절대 쓰지 말아야 할까요? 그러면 참나란 말을 그토록 애용하는 라마나 마하리쉬같은 성자도 아직 견성조차하지 못한 수준일까요? 뭔가 이상하지요?
여태까지 이런 생각의 한계(생각차원)속에서 있다, 없다 어느 한 편에 서서 생각만 하셨다면 그분은 아직 제대로 깨어난 게 아니십니다. 왜냐면 미세한 사고의 한계(이것과 저것이란 상대적 펜듈럼 현상의 3차원)속에 아직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진리, 부처, 참나는 다 같은 동격의 말이며 있다, 없다에 속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부처(참나)는 있다, 없다하는 분별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바탕자리이기에 생각으로 분별된 의식의 내용물인 있다, 없다에 갇히거나 한정(규정)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파도를 만드는 물이 파도 안에 갇히겠습니까?
그러므로 참나는 있다, 없다하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그런 논쟁을 하는 바로 당신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나는 있는 거군!]하신다면 그분은 아직도 생각차원에서 벗어나질 못하신 겁니다. 그것은 있다 없다를 지금 만들고 생각 분별하는 바로 지금 (몸도 아니고 육식활동도 아닌) 진정한 당신(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외도의 [부처는 죽음 후에 있는가 없는가?]란 질문에 대해 부처가 침묵하신 이유입니다. 즉 참나를 생각 속에서 무어라 한정하는 한 그런 참나는 항상 무아와 대치되므로 생각속의 개념적인 허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즉 참나와 무아가 분별을 통해 만들어지기 이전자리에, 진정한 참나가 있는 것입니다. 참나는 바로 지금 여기, 이글을 읽고 있는 그 의식의 바탕배경자리로 빛조차 넘어선 생명의 빛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진짜 참나는 어떤 생각으로도 한정 불가한 비3차원적 자리에 있으므로 무아와 상대로서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도 아니고 무아도 아닌 자리가 참나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도 되고 무아로도 체험됩니다. 누군가 [불립문자 언어도단]이라고 얘기했지요. 하지만 생각으로 그 뜻을 헤아리는 한 아직 참나 자리에 있으면서도 참나를 모르는 겁니다. 바닷물(참나)이 자꾸 파도와 물결 속에서 헤매는 한 즉각 깨어나기는 요원합니다.
글 | 김연수 한양특허 대표
출처 : 마음건강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