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택 목사
현) 한국교회 독서문화연구회 대표
현) 총신대학교 사회교육원 강사
현) 두란노 독서지도자대학 강사
전) 극동방송 '신앙서적 길라잡이' 진행자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1971년 2월 어느 주일 아침, 나는 성경 찬송가책도 없이 교회당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아직 겨울 추위가 머물고 있어서, 옷깃 사이로 찬바람이 스며들어 왔다. 당시 나는 서울교육대학에 응시해 1차 필기고사에 합격했으나, 2차 신검에서 불합격한 후 몇 날을 다소 착 가라앉은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쉽지 않은 고3 시절을 '치열하게' 보냈던 나는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로 자위하고 있었다.
실업계 고등학교 시절, 참고서 하나 마음대로 살 수 없었고, 학원은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고3 시절을 붙들어 준 짧은 이야기가 있었다. 스파르타의 소년들은 짧은 창으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훈련을 받을 때, 짧은 창을 가지고 긴 창을 가진 자를 이길 수 있어야,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 주일 아침 집을 나서기는 했지만, 출석해서 예배를 드릴 교회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발길은 어느새 중고등학교 시절 출석했던 일신교회(상도동)를 향하고 있었다. 일신교회는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이던 때에 안길옹 목사님이 개척한 교회였다. 상도감리교회 주일학교를 수료한 후, 나는 중학교 때부터 일신교회를 다녔던 것이다.
장승배기 언덕 위의 일신교회로 올라가, 고등부 예배를 드린 후, 고등부 지도자인 안정남 선생(현재 LA에서 목회)의 안내로 장년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예배 시간 오래 전부터 무릎을 꿇고 앉아서 발이 저려 왔으나, 꾹 참고 두 시간 이상을 그 자세로 예배를 드렸다. 담임목사이신 안길옹 목사님은 누가복음 19:1-10을 본문으로 하여, <지나가시는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셨다. 말씀의 요지는 2천년 전에 여리고를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도 우리 앞을 지나가신다는 것이요, 우리 각 사람이 그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설교 후에 회중은 조용히 묵상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날 나는 천사들 가운데 앉아있는 '더러운 죄인'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가지 소원을 품고 교회당에 들어 왔다. "단 하루라도 깨끗하게 살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심각한 마음가짐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모두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나도 기도를 하려고 끙끙거리고 있었으나, 첫마디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정직한 첫 마디로 기도를 시작해야 하는지를 고통스럽게 궁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 속이 정리가 안되고, 마음속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무슨 말로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그 기도의 첫 마디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싸우고 있었다. 그때 문득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정직하게 기도하자.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는 그 마음 그대로 솔직하게 기도를 드리자."
나는 정직한 기도의 첫 마디를 생각해 내려고 다시 끙끙거렸다. 지칠 대로 지친 마지막 순간에 떠오른 한마디가 있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것이었다. 이제 그 첫 마디를 나의 입술을 열어 말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수없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 다음에 무엇을 말해야하는지는 생각나지도 않았다. 물론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간구하는 소원이 있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나로하여금 깨끗한 삶을 살게 해 주신다면 더 이상 아무 원이 없습니다. 단 하루라도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이제 막 입을 열어 "만일.."이라고 기도 첫마디를 입밖으로 내놓으려는 순간. 정말 순간이었다. 내 망가지고 상처난 영혼 깊은 곳을 향해 큰 꾸지람의 소리가 임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이 무엇이냐"
나의 부끄러운 내면이, 가장 약한 부분이 그대로 노출되고 지적 당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엄중한 책망의 말씀은 차갑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까지 접해본 적이 없는 '거룩한 무게'를 지닌 사랑의 음성이었다. 흔히 필설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이 경험이 그러하다.
그 책망의 말씀이 내 영혼에 임하는 순간, 내 안에서 그 무엇인가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거의 동시에 나는 고백하고 있었다. "하나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님.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그 분의 사랑.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나에게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감히 고백한다. 그 순간 나는 빛을 경험했다. 설명하자면, 나는 영혼의 눈으로 빛을 보았다. 빛이신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맛보았다. 그 빛의 조명 가운데 나의 죄인된 모습, 그 더럽고 누추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게 된 것도 감격스러운데, 그 분이 나를 돕는 자요 내 편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무 조건 없이, 현재의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는 하나님! 나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시간이 흐르고, 예배당 앞마당으로 나서는 나는 마치 공중에 떠있는 느낌이었다. 신천신지였다. 아, 하나님 안에서 눈이 열리니 모든 것이 새롭고, 이토록 행복하구나. 부모 형제를 생각만 해도 귀하고 감사했다.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행복감으로 가슴은 벅차 올랐고, 이 기쁨을 소리쳐 외치고 싶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의 교제 안으로 진입하였다. 아니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여러 과정을 거쳐 때가 되어 그 분의 사랑의 빛을 만났던 것이다.
어린 시절, 곁에 계셨던 주님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감리교회를 다니셨다. 필자가 교회와 관련하여 떠올리게 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성탄절 전야의 교회 행사이다. 당시의 교회가 대개 그러했듯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찾아간 상도감리교회는 마루가 깔린 깨끗한 예배당이었다. 그 날 저녁 성탄절 인형극이 있었다. 줄거리를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초등학교 시절 동생들과 함께 그 교회 주일학교에 다녔다. 비록 가끔 결석을 하는 아이였지만 나는 평일에 동생들을 데리고 동네 꼬마 친구들과 어울려 교회 뜰과 뒤쪽의 공터에서 신나게 놀곤 했다.
지금도 기억이 나지만 나는 예배를 정성껏 드리려고 했다. 주일학교 예배와 집회 시간에 떠들고 장난하는 아이들을 보면 '왜 저럴까'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일학교 오후 시간에 선생님께서 옛날 이야기를 해주신 적도 있었다. 성경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 또래의 아이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재미있게 들었다.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은 사건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있었다. 우리들은 학교 강당에서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영화를 보았다. 아마 <왕중왕>같은 영화였을 것이다. 복음서에 관한 예비적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본 영화였고, 또 시력이 좋지 않아 잔뜩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쭉 빼고서 본 영화였지만, 예수님에 관한 하나의 인상이 나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것은 아직 복음의 진수에 미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분은 참 훌륭하고 좋으신 분이구나'라는 강한 느낌이었다. 그후에 본 <벤허>, <쿼바디스>같은 종교성 강한 영화도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집안에 있던 몇 가지 소품이 떠오른다. 안방 벽에는 밀레의 명화 <만종>과 사무엘의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진 액자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당시에는 여자아이가 기도하는 모습으로 생각했다. 그 그림의 왼쪽 하늘 위에서 기도하는 아이에게 비취는 빛줄기들은 어떤 신비감마저 일으켰다. 그리고 집에는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가지고 오신 손때 묻은 작은 성경과 찬송이 있었다. 찬송가는 실로 묶어 제책한 무곡 찬송가였다. 어머니는 특히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써>라는 찬송을 즐겨 부르셨다. 젊은 시절에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에서 그 찬송을 제일 많이 불렀다고 한다.
신학의 길에 들어서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주일학교 교사(당시에는 '반사'라고 부르기도 했다)로 봉사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들은 나의 첫 사랑이었다. 토요일마다 심방하고 어설프게 심방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1971년 10월 24일 세례를 받은 나는 이미 성경을 공부하고 그 말씀을 전해야한다는 소명감을 느끼고 있었고, 세례문답을 개인적으로 하시면서 장래의 계획을 묻던 목사님께 속뜻을 내비치었다. 그후 2년의 기간은 내게 있어서 영적인 신혼의 시절이었다. 말씀의 단맛을 느끼면서, 조금씩 기도를 배우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목사님과 전도사님들의 월요성경공부나 산기도를 따라다니면서, 신앙 선배들의 진지한 영성을 우러러보곤 했다.
1973년 총신대학 신학과에 합격했을 때, 나는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수중에는 교통비도 없었다. 이모저모로 궁리하다가 손목시계를 들고 전당포를 찾아갔다. 시계를 맡기고 나니 천 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 길로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동태 한 짝을 팔백 원에 샀다. 동태 크기에 따라 값이 달랐으나, 대개 스무 마리가 넘었다. 얼어붙은 동태를 하나씩 떼어 내어 큰 비닐 주머니에 나누어 넣고 아는 분을 찾아다니며 동태를 팔았다. 그 날로 전당포에서 시계도 찾고 장사 밑천을 마련하였다.
이른 새벽 집을 나서면 부지런한 사람들은 차가운 겨울 바람을 가르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수산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내게 큰 격려가 되었다. 나는 허름한 동복을 입고 횐 장갑을 끼고서 새벽 골목을 누비며 본격적으로 동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동태요, 동태!" 양손에 동태 한 짝을 나누어 들고 조금 걸으면 손가락이 저려 오고 힘이 들었으나, 동태를 팔 때마다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장사가 잘 안되는 날은 무거운 동태를 들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십여 일이 지났을 때, 나는 이 동태가 보통 동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동태를 사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내 학비를 보태 주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 동태를 사는 사람은 복을 받아야 한다."
동태에 특별한 이름을 붙여서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는 동태를 사는 분이 복을 받으라고 '복(福)동태' 라고 이름을 붙였다. "복동태 사려"라고 외치며 골목골목을 다닐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쁨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동태 장수가 아니라 복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동태 중에 복동태가 따로 있는 줄 알고 물어 보셨다. 그러면 복동태라고 이름 붙인 작명의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 드렸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발상의 전환' 이었다. 보통 동태지만 '복(福)' 자를 붙임으로써 평범한 동태 장사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고,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었다. 때로는 노인 분들에게 값을 받지 않고 드리기도 했다, 동태 장사로 큰돈을 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젊은 날의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