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6 내가 매매 증서를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넘겨 준 뒤에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2:17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32:18 주는 은혜를 천만인에게 베푸시며 아버지의 죄악을 그 후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
32:19 주는 책략에 크시며 하시는 일에 능하시며 인류의 모든 길을 주목하시며 그의 길과 그의 행위의 열매대로 보응하시나이다
32:20 주께서 애굽 땅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고 오늘까지도 이스라엘과 인류 가운데 그와 같이 행하사 주의 이름을 오늘과 같이 되게 하셨나이다
32:21 주께서 표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32:22 그들에게 주시기로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에게 주셨으므로
32:23 그들이 들어가서 이를 차지하였거늘 주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주의 율법에서 행하지 아니하며 무릇 주께서 행하라 명령하신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나이다
32:24 보옵소서 이 성을 빼앗으려고 만든 참호가 이 성에 이르렀고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이 성이 이를 치는 갈대아인의 손에 넘긴 바 되었으니 주의 말씀대로 되었음을 주께서 보시나이다
32:25 주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은으로 밭을 사며 증인을 세우라 하셨으나 이 성은 갈대아인의 손에 넘기신 바 되었나이다
◈ 주해
1. 하나님의 징계로 절대로 치유되지 않는 그 상처를 치료하여 주신다.
1) 그 회복은 온전하여서 맹인과 다리 저는 자와 임산부와 해산하는 여인까지 돌아오게 하신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그 은혜로 인하여 울면서 돌아온다.
2) 하나님의 회복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환경적인 회복, 물댄 동산 같은 마음의 회복과 기쁨을 넘어 “새 언약을 맺음”으로 절정에 이른다(31:31-34).
2. 예레미야 32-33장은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1) 멸망이 임박한 상황의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을 듣는 대신에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느냐”며 예레미야를 가두고 만다.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다.
2) 멸망 직전까지도 희망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엄중한 멸망을 선포하신 하나님은, 절망의 상황에서 낙심하는 자들에게는 미래와 소망과 회복을 말씀하신다.
3) 예레미야는 소유하지도 못할 땅이지만 하나님의 회복을 증거하기 위하여 댓가를 지불하고 땅을 산다.
3. 예레미야는 아나돗의 밭을 산 후에 동료이자 비서 역할을 하는 바룩에게 부탁한다.
1) 그리고 나서 멸망에 임박한 예루살렘부터 아나돗의 밭을 사게 하신 일에 대해 여호와께 기도로 호소한다(16-25절).
2) 예레미야는 왜 하나님이 잔인한 징계로 이 지경이 되었는지, 하나님의 긍휼로 어떻게 회복하실 지를 안다. 그러나 안다고 괜찮은 건 아니다. 알아도 슬프고 아프고 괴롭다.
4. 기도의 첫 고백은 “슬프도소이다”라는 마음의 고백과 탄식이다.
1) 예레미야가 슬픈 이유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면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다.
2)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창조주이기에 능치 못하심이 없는 전능자다. 게다가 창조주요 전능자인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다. 게다가 책략이 크신 하나님이다.
3) 창조주요 전능자요 책략이 크시고 은혜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잔인한 징계를 집행하여 예루살렘을 멸망시켜야 하는 현실이 예레미야는 슬프다.
5. 게다가 아브라함에게 햇불 언약을 맺은 때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지금의 심판이 너무나 안타깝다.
1) 그래서 예레미야는 주님이 애굽 땅에서 표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펴신 팔과 큰 두려움으로 출애굽 시켜 주신 것을 고백한다.
2) 아브라함과 맺은 햇불 언약대로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에게 주셨다.
6.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으로 행하였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약속의 땅을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여 이 모든 재앙을 받게 되었다.
1) 하나님은 언약을 맺을 때, 언약적 복과 언약적 심판을 말씀하셨고, 선지자들을 계속해서 보내심으로 언약적 저주가 임한다고 경고하면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셨다.
2) 그러나 계속해서 말씀을 거절하고 불순종한 결과, 예레미야를 마지막으로 보내서 뜻한 재앙을 내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예레미야의 말까지 거절함으로 드디어 예루살렘이 멸망한다는 말씀이 성취되기에 이르렀다.
7. 멸망직전의 예루살렘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32:24 보옵소서 이 성을 빼앗으려고 만든 참호가 이 성에 이르렀고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이 성이 이를 치는 갈대아인의 손에 넘긴 바 되었으니 주의 말씀대로 되었음을 주께서 보시나이다
1) 이 비참함은 주의 말씀대로 되어진 것이다.
2)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아나돗의 밭을 사게 하셨는지를 묻는다(25절).
8. 예레미야의 모든 기도는 몰라서 하는 탄식과 질문이 아니다.
1) 예레미야는 왜 이스라엘이 징계를 받는지, 하나님이 70년 후에 다시 회복하실 것을 안다.
2) 이유를 알지만 기가 막히고 안타깝고 슬프고 괴로운 것이다.
9. 안다고 해서 다 괜찮고 소망이고 평안한 것은 아니다.
1) 도리어 알지만 심판의 집행을 아프고 슬퍼하는 것이 참 선지자요 하나님의 마음이다.
2) 예레미야는 자신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슬프다고 하지 않았다. 예레미야의 슬픔은 하나님의 슬픔이요, 방황하는 영혼들로 인한 슬픔이다.
10. 예레미야는 “슬프도소이다(32:17)”라며 기도하였다. 그리고 이미 하나님은 심판의 날을 슬픈 그 날이라고 하셨다.
30:7 슬프다 그 날이여 그와 같이 엄청난 날이 없으리라 그 날은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그러나 그가 환난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책망할 때마다, 징계할 때마다 그들을 깊이 생각하였다.
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여실 주님도 예루살렘이 당할 심판으로 인하여 슬퍼하셨다.
눅 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11.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진노, 미움, 저주”가 아니라 “긍휼과 영원한 사랑”이다.
1) 그러기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슬프고, 책망할 때마다 우리를 깊이 생각하신다.
2) 심판의 말씀을 전하는 참 선지자의 마음도 “슬프다.”
3) 예레미야는 심판을 원하지도 않고, 심판의 말씀을 신나서 전하는 것이 아니다.
4) 진리이기에 고난을 감수하며 전하고, 이 심판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인자함으로 인도함이 실현되기 때문에 슬퍼하면서도 신실하게 말씀을 전한다.
12. 참 선지자는 자기 바램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고난이 있어도, 슬퍼도, 자기 바램과 달라도 “생명을 주는 복음”을 전한다.
1) 슬퍼도 자신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예레미야다.
2) 하나님이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하고, 하나님이 심판할 때 같이 심판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이 회복을 말씀하실 때 슬픈 마음을 뒤로하고 순종하는 참 선지자다.
◈ 나의 묵상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 때문에 오해가 많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감정적으로 항상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씀은 항상 주 안에 거하라는 말씀과 같다. 주 안에는 항상 기쁨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안에는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는 하나님,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슬픔도 항상 있다. 항상 기쁨이신 하나님이 잃어버린 영혼들로 인하여 항상 슬퍼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눈물의 선지자인 것은 알지만 예레미야가 “슬픔”을 직접 드러내는 것이 위로가 된다. 물론 나와는 차원이 다른 슬픔이지만, 참선지자요 고난을 당당하게 뚫고 나가는 선지자도 슬퍼한다는 것으로 나와 같은 성정을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있는 괴로움은 마음과 선포가 다를 때다. 바램과 선포가 다를 때다. 나에게는 이 괴로움이 크다. 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선포하지 못할 때, 내 마음과 다르지만 진리이기에 전해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이기에 전할 때, 괴롭다.
나와는 종류가 다르지만 예레미야의 바램과 선포가 다르기에 슬픈 탄식을 듣는다. 심판의 복음을 전하면서 슬퍼하는 탄식이 절절하다. 바라지 않는 진리를 전함으로 감옥에 갇힌다. 바라지 않는 심판을 전한다는 이유로 위로를 받아야 하는데, 도리어 핍박과 모함이 있다. 기쁨으로 전하다가 박해를 받아도 힘든데, 슬프게 전하는데 박해를 받으니 얼마나 힘들까? 나라면 감당할 수 없다.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하나님도 슬퍼하시면서 심판을 집행하신다. 아버지가 아들을 십자가에서 외면하고 거절할 때, 얼마나 슬프하며 괴로우셨을까? 전능하신 하나님조차 괴로움에도 원함과 달리 행하셔야 할 때가 있었다. 겟세마네 기도는 그 대표다. 창조주 아들도 원하는 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행하려고 한다. 원함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 늘 갈등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 해야 하는 것을 하다가, 그것이 힘들어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을 반복한다. 그런데 예레미야, 하늘 아버지와 아들은 원하는 것보다, 진리를 늘 선택한다. 그래서 십자가 구원이 있었고, 그 은혜로 나는 죄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었다.
슬퍼도 말씀대로 순종하는 예레미야의 마음과 순종을 구한다. 바램과 달라도, 탄식을 하더라도 말씀대로 행하는 사랑하는 마음을 구한다.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이 드러나고 나타나고 내 마음의 보좌에 앉아, 탄식할지언정 아버지의 뜻대로 구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나의 뜻이 꺽여지고 주님의 뜻대로 행할 힘과 믿음과 사랑을 구한다.
나의 원함과 뜻을 고집한 자, 주의 용서를 구한다. 그런 나를 용납하시고 긍휼히 여겨주신 그 은혜를 감사한다. 결국은 주님의 뜻을 이루실 주님, 인자함으로 인도하심을 찬양한다.
◈ 묵상 기도
주님, 사랑과 열정과 바램과 기쁨으로 순종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처럼 슬퍼할수도 있고, 저의 연약함으로 슬퍼할 수도 있음에 감사합니다. 하나님도 슬퍼하셨기에 슬픔을 이해하십니다. 주님, 슬픔과 괴로움을 핑계로 주님의 뜻을 거절하고 나의 고집과 원함대로 행한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슬픔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사랑과 생명을 주십시오. 나의 원함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게 하옵소서. 주의 은혜와 사랑으로 붙들어 주십시오. 주의 전능과 지혜와 은혜에도 불구하고 제가 교만하였고, 탐심에 사로잡혔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 은혜의 복음을 온전히 알게 하사 새 언약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내가 주 안에, 주가 내 안에 있음을 항상 알게 하여 주십시오. 주일 아침부터 종일토록 성령님 붙잡아 주십시오. 예배가운데 성령님이 생명을 주시고, 그 이후의 모든 교제 가운데 함께 하여 주십시오. 작은 자가 큰 자나 하나님을 아는 생명의 공동체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주되심과 은혜의 복음이 증거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