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달항아리_하양꽃으로_피다 '환상감과 달항아리'
책 <달항아리 하양꽃으로 피다>를 읽었다. 저자 이종열님은 달항아리 수집가이시면서 동시에 달항아리와 사랑에 빠진 로맨티스트이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긴 달항아리의 그 풍성한 한아름의 아름다움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만은.
책을 읽으며 달항아리에 관해 검색하며 여러 자료를 살피게 되었다. 문득 어떤 영상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한국에 '간송 미술관'의 '전형필(1906~1962)'이 있다면, 일본에는 '고려 미술관'의 '정조문(1918~1989)' 있다고.
정조문 선생에 대해서는 검색을 하다가 발견했다. 2015년에 EBS에서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제작된 특별기획 방송이었다.
유튜브에서 이 방송을 볼 수 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dxZOBky_ils > 정조문의 일생과 조선의 유물을 수집하게 된 계기와 교토에 ‘고려 미술관’을 건립한 과정들이 담겨 있다. 전형필 선생과 정조문 선생이 우리나라 문화재를 수집한 동기는 같다고 생각했다. 문화재에 눈을 뜨게 된 배경과 환경은 다를지라도 그 뜻을 품게 된 취지는 같다고 여겼다.
아마도 문화재 수집에서 보자면 이토록 거룩한 뜻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정조문 선생은 남도 북도 모두 그 자신의 나라이고 고향이므로, 통일이 되어 하나의 조국이 될 때 그 자신이 수집한 문화재를 모두 고국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현재 통일은 언제 이루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문화재를 보려면 ‘교토 역에서 시영버스 9번을 타고 교토 시내의 북동쪽 가모가와 중학교 앞에서 내려서, <고려미술관> 방향 표지판을 보고 걸어가야 한다. <고려 미술관>이 보이면 그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조용한 교토의 주택가에 ‘고려 박물관’은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 ‘고려 미술관’ 교통편 글 인용 출처 : https://blog.naver.com/cheongsol/221013776807>
방송은 2015년도 영상이므로 현재의 고려 박물관에 대한 소식은 잘 모르겠다. 연간 1만 2000여 명에 가까운 관람객들이 7000여 명으로 줄어서 ‘고려 미술관’ 운영이 어려워 졌다고 하였었다. 관람객이 많이 찾아올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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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 선생과 정조문 선생은 일반적 컬렉터가 아니라 그 시대에서 시대성을 온몸으로, 온 행위로 표현한 실천적 정신이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후예들은 종종 드물게 나타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수집한다 하여도 취미의 형태를 넘어서기는 어렵다.
책 < 달항아리 하양꽃으로 피다>의 저자 이종열님은 바로 그 일반적인 컬렉터의 형태를 넘어선 사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달항아리를 수집하는 그 과정은 ‘문화재 환수’차원으로까지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과업이 또 하나 있다면 ‘소나무 수목원에 달항아리 박물관을 짓는 것이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자신이 수집한 달항아리가 안착할 수 있는 곳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보고 감상할 수 있는 곳은 역시 박물관일 것이다. 이종열님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맑고 밝은 달님도 아마 바라마지 않을 것이다.
책의 구성은 저자의 글과 시와 달항아리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백자’와 ‘백자대호 달항아리’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고도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책에 실린 달항아리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중국과 일본에서 자비로 환수해 온 도자기 중 일부이다. 문화재는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다. 보고 느끼는 사람 모두가 주인이다. 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자유롭고, 완벽하지 않아 더 정감 어린 아름다움을 혼자만 보는 것이 아까워 이처럼 책을 쓰게 되었다.
이 시대에 부합한 문화 예술의 화수분, 달항아리, 동네 어귀에 있던 우물처럼 너나없이 양껏 마셔도 마르지 않으니 다 함께 즐겼으면 한다. ” < 책 본문에서, 만나다/달항아리. 넌 누구니,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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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생각을 옮겨 보았다.
달항아리는 17세기에 만들기 시작했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의 추정 년대가 그러하다. 임진왜란(1592~1598),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1637)은 16세기 말미에서 17세기 초 조선에서 일어난 전쟁들이다. 그 시기에서 달항아리는 태동했고 탄생했다고 보인다. 그 당시에 하필이면 왜 백자로 ‘백자대호’를 만들었을까를 나 역시 생각해 보게 된다.
예전에는 여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 기사를 본 후 어떤 생각이 겹쳐졌다.
https://weatherlab.tistory.com/43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은 왜 뚱뚱한 비만인가>
이 기사의 내용은 ‘고대 비너스상이 빙하기의 혹독한 삶이 낳은 결과물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담은 논문’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 논문은 ‘미국 콜로라도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리처드 존슨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이 유럽 각지에서 발굴된 고대 비너스상의 허리와 엉덩이, 허리와 어깨 비율을 측정하고 비교해 얻은 결과를 학술지 '비만'(Obesity)에 발표’한 것이라고 한다. 학술지 ‘비만’에 발표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 고대 비너스상이 만들어진 약 3만 년 전 유럽 지역은 ‘빙하기’로 수렵채집 생활을 하던 그 당시 인류에게 ‘비만’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체형이었고,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은 당시의 극심한 영양 결핍 스트레스와 관련돼 있다. 인류가 유럽에 진출한 약 4만8천 년 전에는 따뜻한 기온 상태에서 수렵과 채집이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이후 빙하기가 닥치면서 기온이 떨어져 사냥과 열매 따기 활동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돌이나 상아, 뿔, 진흙 등으로 6~16㎝ 크기의 비너스상이 만들어진 것은 이렇듯 기후 환경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존슨 박사는 아랍에미리트(UAE) 아메리칸 대학의 인류학 교수 존 폭스 박사 등과 함께 비너스상의 허리 대 엉덩이, 허리 대 어깨 비율을 측정했다. 그 결과 빙하기와 가까웠던 곳에서 발굴된 비너스상일수록 허리 비율이 굵다는 것을 발견했다.
연구팀은 이 측정을 근거로 빌렌도르프 비너스상이 당시의 어려웠던 생활환경 조건에서의 ‘이상적인 여성 신체’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존슨 박사는 "빙하가 전진할 때 (비너스상의) 신체 비율이 가장 높았으며, 빙하가 후퇴하고 기온이 따뜻했을 때는 비만이 줄어들었다"면서 "비너스상은 젊은 여성, 특히 빙하 주변에 살던 여성들에게 이상적인 신체 사이즈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기에는 뚱뚱한 여성이 영양결핍 여성보다 임신과 출산 및 육아 과정에서 더 유리했기에 ‘비만’이 이상적인 조건이 됐을 것이다. 비만이 기후 조건이 엄혹했던 시기에 무리의 대가 끊기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 방법이 됐을 것이다. 실제로 비너스상 중 상당수는 손때로 닳아 엄마에서 딸에게 '가보'로 전승돼 왔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성공적인 출산을 할 수 있는 바람직한 신체를 가르쳐주려는 목적에서 가임기 여성이나 임신 초기 여성에게 전달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존슨 박사는 "비너스상은 임신과 산모와 아기의 생존 촉진을 돕는 이념적 도구로 등장했으며, 점차 더 혹독해지는 기후에 적응해 살아남을 수 있는 건강 조건을 강조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능을 했다"고 덧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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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내용은 그대로 달항아리가 만들어졌던 조선의 17세기 상황과 겹친다.
달항아리는 사람에게 어떤 환상감을 갖게 만든다. 불룩한 몸매는 원시적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을 닮아 있는 것도 같다. ‘백자대호白磁大壺’ 달항아리가 만들어진 시기는 17세기로 추정한다. 풍만함에서 느껴지는 어떤 연관성이 있다. ‘배腹’의 풍만함은 그 자체로 풍요로움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
고대에도 중세에도 현대에도 달을 보는 일은 환상감이 더 크다. 정안수 떠 놓고 가족의 안녕을 비는 우리 조상 여인들의 풍습 역시 아마도 달이 주는 그런 환상감에 기대어 있다고 여겨진다. 사람은 현실 이외의 어떤 가상에 접속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 행위가 바로 인간의 정신활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여행을 하고,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실제적으로 어떤 예술적 신체활동을 경험하는 일은 모두 가상과 접속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달항아리가 만들어진 그때의 사회는 아무래도 환상감에 기댈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만들지 않고서는 현재를 이겨나가는 데에 몹시도 고달픈 일상이었다고 보이니 말이다. 더구나 전쟁을 겪은 후유증은 컸고 새롭게 재건하여야 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도 휑해진 마음을 추스르는 것은 더 급선무였을 것이다. 자존감 회복도 중요한 문제였다고 보인다.
그리고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끌려갔다. 인구가 줄었다. 그 인구를 회복하는 일도 시급했을 것이다. 피폐하고 초췌해진 삶에 어떤 환상감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염원과 같은 것이며, 이념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달항아리는 풍요와 번성을 기원하는 염원을 닮았다고 보이며, 국가와 사회적으로 이념적 도구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정신성의 풍요로움 이었을 것이다.
백자대호에 대한 별칭으로 ‘달항아리’라는 표현은 화가 김환기(1913~1974)가 붙인 표현이다. 친구인 작가 최순우(1916~1984)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죽이 잘 맞는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두 친구가 달항아리를 보면서 주고받는 내밀한 말들이 김환기 화백의 그림 안에 스며있는 것처럼 오늘은 <달과 매화/ 1953~54>, <달빛교향곡/ 1954>, <여인들과 항아리/ 1960>이 그렇게 다가온다.
이 달항아리 그림들이 그려진 그때의 우리나라 시대적 배경은 6.25 전쟁이 일어난 직후이고 십년이 채 안되던 시대에 그려진 그림이다. ‘배의 풍만함’은 빌렌도르프 비너상도 병자호란 직후에 만들어 졌던 백자대호도, 달항아리를 6.25 전쟁 직후에 감상하며 ‘달항아리’라 이름 붙이고 그림을 그렸던 김환기 화백도, 이 세 시기의 시대적 상황은 모두 유사한 공통점이 있다.
현실의 피폐함과 황폐함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한 아름으로 안아야 품에 안기는 달항아리를 보고 만지며 김환기 화백 역시 그러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한 아름으로 달항아리를 안았을 때 느끼는 그 풍성함과 풍요로움, 가득 차오름의 벅참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마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솟아나는 웃음을 느끼게 해 주었을 것이다. 충만함은 그렇게 사람을 채우고 주변을 풍성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떤 아련한 기억처럼 꿈결처럼 피어나는 그림의 느낌은 아마도 그래서 그토록 그리움을 소생시키는 것일 것이다.
빙하기 시대를 살았던 고대의 여인들도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을 손으로 만지면서 그런 풍요로움과 풍성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 환상감은 정신에도 감정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몸에 새겨진다. 각인되는 것이다. 반드시 출산이 아니더라도 생존에 환상감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예술적 감흥은 삶을 풍부하게 만드니까 말이다.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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