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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이성보다 열등한가?
철학으로 이해하는 감정의 모든 것!
서양 철학에서 감정은 오랫동안 이성보다 열등할 뿐 아니라 이성의 질서를 교란하고 혼란에 빠뜨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20세기 중,후반에 이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사유들이 등장하고 나서야 감정 관련 주제들을 본격적으로 고찰하는 흐름들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감정, 정동, 느낌, 마음 등이 인문학과 사회학, 뇌과학 등의 분야에서 독자적인 연구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사회와 문화, 예술, 정치, 심지어 경제 영역까지도 아우르는 탐구 대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전문 학술 분야에서는 바뤼흐 스피노자에서 질 들뢰즈를 거쳐 브라이언 마수미로 이어지는 정동 연구와 안토니오 다마지오처럼 뇌과학이나 생물학의 관점에서 마음 및 느낌을 분석하는 연구의 흐름이 두드러지는 반면에 대중적인 인문 교양 분야에서는 심리 치료나 자기 개발에 초점을 두고 감정을 들여다보는 경향들이 강하다. 이렇다 보니 감정을 깊이 있게 다루면서 일반인도 이해 할 수 있도록 쉽고 흥미롭게 풀어낸 저서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감정을 철학적으로 해명하면서도 일상적인 삶의 문맥으로 가져와 감정과 삶의 의미를 탐구한 로버트 C. 솔로몬(1942~2007)의 이 책은 바로 철학 탐구와 인문 교양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감정이란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솔로몬에 따르면 감정은 맹목적이거나 비합리적인 힘이 아니며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을 빌어 핵심만 간략하게 말하자면, 감정은 우리가 세계에 조율되는 방식이자, 우리의 현실에 형태와 구조를 부여하는 판단들이다. 판단으로서 감정은 삶을 구성하고 삶에 의미를 제공하며 우리의 관심사들과 목적들을 만들어 낸다. 더 나아가 솔로몬은 감정 자체가 삶의 의미이고 우리의 세계라고까지 말한다.
이 책의 핵심은 이론이지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에 관한 이론이고, 아주 짧고 위험한 문구로 표현하면, 감정은 판단이다라는 이론이다. 이 단 한 문장으로 표현된 이 책의 핵심은 무지하게 주의를 흩뜨리고 이성의 삶에 개입함으로써 품위를 떨어뜨리는 전통적인 역할에서 이성 자체의 본질적인 특징으로 감정의 자리를 옮기려는 시도이다. 나의 논제는 감정이란 그 자체로 이성적이고 (그러므로 때로는 비이성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감정은 세계를 보고 세계에 관여하는 방법, 정말 마음에 드는 하이데거Heidegger의 비유로 표현하면 세계에 “조율되는” 우리의 방식이다.
- ‘헤켓판 서문’ 중에서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세계는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인 세계를 뜻하지만, 주관적인 세계는 객관적인 세계와 연동되어 있으며 주관적인 세계에서의 변화는 객관적인 세계에서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감정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능동적으로 하는 행동이고,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초판본이 나왔던 1970년대 당시에 아주 도발적인 감정 옹호론이었으며,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봐도 여전히 도발적인 견해이다.
감정을 철학의 주제로 끌어올린
감정 철학의 숨겨진 명저!
『감정은 어떻게 내 삶을 의미 있게 바꾸는가』
솔로몬은 개별 감정 또는 감정 일반을 탐구하는 다수의 저서들을 남겼는데, 그가 감정 철학의 이론적 틀을 세우고 체계화한 저서가 바로 『The Passions: Emotions and the Meaning of Life』다. 1976년 더블데이 출판사에서 처음 나왔고, 초판본에서 현상학의 사변적인 내용들을 빼고 감정과 삶의 의미에 관한 논의를 더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수정한 판본이 1993년에 해켓 출판사에서 나왔다. 이 책은 해켓 판본을 완역한 것이다. 이 책에서 솔로몬은 감정이란 비이성적이며 삶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문제이고 이 문제를 푸는 해답은 이성이라고 보는 서양의 뿌리 깊은 이성 우위론을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는 오히려 이성이 문제이고 감정이 그 해답이다.
어떤 철학적 논쟁을 통해 생겨난 정념은 그것이 무엇이든 철학에서 전혀 중시되지 않았으며 하물며 감정은 토론의 주제가 되는 것을 정당화하지도 못했다. 철학의 중심에 구멍이 하나 있었다. 분석적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존주의자들에게 사로잡혀 있던 나는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것은 바로 철학에서 정념의 자리를 되찾아주는 것이었다.
- ‘헤켓판 서문’ 중에서
그렇다고 해서 데이비드 흄처럼 감정이 이성을 지배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성 우위론과 마찬가지로 감정 우위론도 인간을 이성과 감정으로 분리하고, 둘 사이에 적대적인 대립 관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에 따르면 감정은 본질적으로 이성적이고 이성은 감정을 통해서 삶의 가치와 접촉한다. 따라서 이성과 감정의 불필요한 갈등들을 제거하고 우리 인간을 이성과 감정이 조화를 이루는 전체로 봐야 한다. 이를 위해서 솔로몬은 이성과 감정에 관한 기존의 철학적 범주들을 뒤엎고, 감정이 우리의 삶에서 얼마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해명하면서 너무도 오래 부정당해 온 그 역할과 자리를 감정에게 되돌려 주고자 한다.
로버트 솔로몬이란 이름을 낯설어 할 독자들이 많겠지만, 솔로몬은 영미권에서 감정 관련 주제들이 거의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던 1970년대에 이미 감정 철학을 체계화했을 정도로 감정 연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철학자이다. 솔로몬은 미국 미시간 주의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펜실베니아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시간 대학교에서 철학과 심리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몇 년 동안 방문 교수의 자격으로 여러 대학교를 돌아다니면서 강의를 했고, 1972년에 오스틴에 있는 텍사스 대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영미 철학계에서는 분석철학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솔로몬은 분석철학이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고 삶의 중요한 질문들을 포기해 버렸다고 비판했다. 대신에 그는 유럽 대륙의 현상학과 실존주의에 공명했고, 인지 이론의 관점에서 감정 철학과 비즈니스 윤리학을 연구하고 교육했다. 철학자가 비즈니스 영역에 관여했다는 점이 얼핏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솔로몬의 비즈니스 윤리학 연구는 삶의 현장에서 철학을 사유하고자 했던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솔로몬의 감정 옹호론을 이성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견해로 해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오히려 그의 감정 옹호론을 이성과 감정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지 않으며 이성을 부정하지 않고서도 감정의 진가를 인식하고 둘 사이의 조화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솔로몬에 따르면 감정과 이성은 둘 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를 구성하는 수단들이며, 궁극적으로는 둘을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감정을 통해서 그리고 이성을 활용하여 어떤 사람이 되는가’이다. 이 문제에는 솔로몬의 감정 철학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압축되어 있다. 그 목적이란 바로 사람들을 이해하고 변화시켜 각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너,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변화가 사회와 세계의 변화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정념’과 ‘쉬르리얼리티’
이 책에 나오는 솔로몬의 용어들 중에서 독자들에게 생소할 ‘정념’과 ‘쉬르리얼리티’라는 개념이 있다. 영어 단어 ‘passion’의 번역어인 정념은 원래 수난을 의미했고, ‘어떤 것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우리는 그것을 겪는다’는 수동성을 떠올리게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슬픔의 정념에 빠지고, 기쁨의 정념에 휩싸이고, 절망의 정념에 굴복하고, 사랑의 정념에 압도된다. 솔로몬은 이러한 정념의 전통적인 의미와 이미지에 반대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닌 용어라는 점을 감안하여 ‘우리를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총망라하는 개념으로 정념을 사용한다. 솔로몬의 감정 철학에서 정념은 감정과 기분, 욕망으로 세분되고, 감정과 기분과 욕망은 모두 삶의 실제 상황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공유한다. 그런데, 기분은 ‘일반화된 감정’이다. 욕망의 경우는 배고픔과 목마름처럼 감정과 기분에 우선하는 원초적인 것들도 있지만 대체로 욕망은 감정의 하부구조 위에 구축된다. 반면에 감정은 가장 정교하고 복잡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주관성과 주관적인 세계를 결정한다. 이런 점 때문에 솔로몬은 정념을 세분하면서도 감정 분석에 집중하며, 그의 철학에서 정념과 감정을 서로 바꿔 써도 되는 개념들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쉬르리얼리티’는 솔로몬이 프랑스어에서 ‘위’라는 의미를 더하는 접두사 ‘sur-’와 영어 단어 ‘reality’를 결합하여 새로 만든 개념어이다. 솔로몬에 따르면 감정은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나’의 주관적인 세계에 관심이 있다. 이것을 저기 바깥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상황들과 실제로 있는 사실들, 즉 객관적인 리얼리티를 부정하는 견해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솔로몬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객관적인 리얼리티가 있고, 감정은 리얼리티에 개인적인 관점과 가치들을 추가한다는 것이다. ‘쉬르리얼리티’는 바로 이 결과물을 지칭하는 용어로, ‘추가된 리얼리티’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리얼리티가 아니라 쉬르리얼리티 속에 살고 있다. 감정이 우리의 세상을 만든다는 말은 결국 감정이 우리의 쉬르리얼리티를 만든다는 말과 같다.
철학은 점점 더 추상화하고 가까이하기 어려워진다. 철학의 문제들은 무시되고 그것들을 다룰 능력이 가장 없는 사람들의 손에 내맡겨진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들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부모에게서 벗어나는 청소년들, 그들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을 금하는 사회로부터 도망치는 우울하고 좌절당한 사람들, 자신들이 추방되었음을 깨닫고 마지막에는 이제 과거를 회상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의미에 관한 질문들에 직면하게 되는 노인들이다. 철학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은 난센스로 시작되었는데, 이 난센스가 이제 진리가 되어 있다. 가장 호감 가는 내 동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존심을 걸고 철학의 정교한 무관련성을 자주 옹호한다. 무슨 논쟁을 할 수 있을까? 싸움은 그들과 하는 것이 아니다. 해야 하는 일은 철학이 삶으로부터 분리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삶에 도움이 되고,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 똑같이 확신이 없는 다른 사람들이 끈덕지게 우리에게 주입하는 어수선한 내용들을 조정하고 종합한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예술이다. 그것은 삶의 예술이고, 지혜추구이다.
- ‘머리말’ 중에서
오늘날의 불안과 절망이 생겨난 유래를 추적해 보면 계몽주의와 혁명에 뒤이어 일어난 종교 제도들과 신앙의 붕괴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은 역사가들과 종교인들 사이에서는 진부한 견해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부조리성을 느끼는 것은 신의 은총에 대한 믿음의 상실 때문만은 아니다. 동시에 인간의 정의와 인간의 노력이 갖는 잠재력에 대한 믿음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종교의 상실을 한탄할지 모른다. 하지만 종교를 대체한 우리의 자신감이 커져서 종교의 상실을 보상해 주는 것을 유감스러워하는 것은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어렵다. 부조리는 종교의 상실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증진 때문에 생겨났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수록 우리의 리얼리티에 대해서는 덜 생각하게 된다. 다른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 ‘1장 삶이라는 문제’ 중에서
념이 인도해 주지 않으면, 추론은 원칙도 힘도 가질 수 없다. 우리의 “정서들”로부터 단절되고 나면, 우리는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흄은 십만 명의 동양인들이 학살당하는 것보다 자기의 새끼손가락이 따끔따끔 아픈 것에 사람들이 더 마음을 쓰는 것은 “비이성적”이지 (즉 이성의 명령에 반대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때 이 요점을 강력하지만 가차 없이 강조했다. 이성은 오로지 정념을 통해서만 인간의 가치들과 접촉한다. 이성은 단지 개인의 가치들과 정념들이 없는 특정한 형태의 이성 - 객관적 추론 - 일 뿐이다. 이성이 방법론상으로 개성과 주관성을 모두 벗어버리는 것은 “자연”에 따른 것도 아니고 논리에 따른 것도 아니라, 대단한 노력을 기울인 덕분이다. 객관적 추론은 (심지어 자의식 속에서도)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 추론은 이성 전체가 아니다. 이성 자체는 추상성과 보편 원칙에 대한 호소 때문에 이데올로기와 개인적 서약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며, 개인적 편견과 편애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 ‘2장 새로운 낭만주의’ 중에서
생리적인 원인들 이외에도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원인들이 있다. 상기한 두 개의 명제를 적절하게 옹호하기 위해서는 더 일반적인 설명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내 목적은 감정과 생리 기능의 관계를 다루는 흔한 두 가지 방법의 어수룩함을 보여 주는 것뿐이었다. 이 방법들은 감정을 생리 기능이 의식 층위에서 표현된 것으로 축소하거나 생리 기능과 감정의 관련성을 완전히 부정한다.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수압 메커니즘이나 전압실 또는 보일러가 결코 아니다. 우리는 보일러 위에 설치되어 있는 전지나 밸브에 부착된 검류계처럼, 압력을 수동적으로 내부에 기록하는 의식이라는 진기한 부속품을 우연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뇌의 기저부에 있는 작은 선 안에 있는 가느다란 통로를 통해서 펌프 작용을 하고 맥박이 뛰는 우리의 신체에 붙어 있는 데카르트 철학의 정신이 아니다. 데카르트 철학의 정신에게는 물질세계가 흥미의 대상이지만, 우리의 정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것을 일부 결정하고, 이것은 우리의 환경에 해당하는 것만큼 우리의 뇌 작용에도 해당한다.
- ‘4장 생리 기능과 느낌, 행동’ 중에서
보면, 이 두 논리는 참으로 아주 다르다. 감정의 신화는 쉬르리얼리티를 극적인 형태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들과 식물들과 우상들에게 인간의 속성들을 부여하든 인간의 형상들을 신과 같은 지위로 격상하든, 감정의 신화는 언제나 의인화를 포함한다. (인간을 신의 지위로 격상하는 것과 신성한 것을 인간의 용어로 세속화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거의 없다.) 물론, 그러한 의인화의 범위는 다양하다. 목적론으로 설명하기를 선호하는 일부 사람들은 어디서든 그것을 되는 대로 사용할 것이다. 객관적 설명은 되도록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사람들, 특히 우리들 자신은 목적론적인 설명을 무모한 설명 수단으로 남겨 둔다.114. 이런 사람들에게 의인화의 범위는 정말로 지극히 제한적이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야 한다(왜냐하면 그들을 다루는 방법은, 몇몇 행동주의자들과 과격한 환원주의자들을 제쳐 놓으면, 적어도 항의받을 우려 없이 “의인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5장 주관적 정념 이론’ 중에서
그렇다면 감정이란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솔로몬에 따르면 감정은 맹목적이거나 비합리적인 힘이 아니며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핵심만 간략하게 말하자면, 감정은 우리가 세계에 조율되는 방식이자, 우리의 현실에 형태와 구조를 부여하는 판단들이다. 판단으로서 감정은 삶을 구성하고 삶에 의미를 제공하며 우리의 관심사들과 목적들을 만들어 낸다. 더 나아가 솔로몬은 감정 자체가 삶의 의미이고 우리의 세계라고까지 말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세계는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인 세계를 뜻하지만, 주관적인 세계는 객관적인 세계와 연동되어 있으며 주관적인 세계에서의 변화는 객관적인 세계에서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감정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능동적으로 하는 행동이고,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초판본이 나왔던 1970년대 당시에 아주 도발적인 감정 옹호론이었으며,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봐도 여전히 도발적인 견해이다.
- ‘옮긴이 후기’ 중에서
지식을 늘리는 사람은 슬픔을 늘린다.
전도서
(무지는 더없는 행복이다.)
나는 친구에게 화가 났다.
내가 나의 노여움에 대해 말하자, 나의 노여움이 사라졌다.
나는 적에게 화가 났다.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자, 나의 노여움이 커졌다.
경험의 노래
윌리엄 블레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