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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of Art 추상미술 - 미니멀리즘
미니멀, 현전의 기하학 Minimalism - Minimal Art
미니멀리즘은 도처에 있다. 미술관에서 그것은 하나의 예술언어이고, 백화점에서 그것은 상품의 디자인이며, 거실에서 그것은 인테리어의 원리다. 우리는 이미 ‘심플한 디자인’에서 미적 매력을 느낀다. 물론 이런 식의 수용은 미니멀리즘이 애초에 설정한 목표와는 별 관계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80년대 이후 미니멀리즘은 현대인의 지각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이 처음 등장한 60년대에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예술가 그룹 밖의 대중으로부터 그것은 널리 외면당했다. 왜 그랬을까? ‘비인격성’ 때문일 것이다. 대중은 예술에서 서정을 기대한다. 폴록의 작품만 해도 ‘추상적’으로나마 거기서 작가의 내면의 ‘표현’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에서 대중이 보는 것은 공장에서 기계로 뽑은 듯이 보이는 물건 뿐이다. 작가의 개입이 배제된 익명성, 기하학적 형태의 반복성. ‘모듈’로 진행하는 연쇄성이 그들에게는 그저 지루함과 단조로움일 뿐이다. 심지어 그린버그도 미니멀리즘은 “느껴지거나 발견된 것이 아니라 뭔가 연역된 것처럼 보인다” 고 말했다.
미니멀리즘에서 작가의 인격은 사라진다. 토니 스미스가 <죽다>(1962)를 제작할 때 한 일이라곤 전화로 공업사에 작업지시를 내리는 일 뿐이었다. <5월 25일의 대각선>(1963)을 위해 단 플라빈은 그저 시장에서 산 형광등을 전시장 벽에 비스듬히 걸어놓았을 뿐이다. 칼 안드레는 벽돌을 사다가 바닥에 깔아놓고, 전시가 끝나면 다시 해체해 트럭에 실어 날랐다. 때는 마침 롤랑 바르트가 ‘작가의 죽음’을 선언한 시기였다.
미국의 평론가들은 ‘미니멀리즘’을 철저하게 아메리카의 산물로 본다. 구성의 포기는 폴록의 ‘올오버all over’에서 물려받은 것이며, 단순성의 효과는 뉴먼의 ‘전체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공업용 재료의 사용은 워홀의 오브제 전략을 연장한 것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전후 미국의 미술계를 대표하는 액션페인팅, 색면추상, 팝아트 이러한 세 갈래의 흐름이 미니멀리즘 속에서 하나의 물줄기로 합류했다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의 대표적인 작가 도널드 저드는 원래 예술에서 환영주의를 없애려는 모더니즘에서 출발했다. 이 점에서 그는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강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하지만 그의 반反환영주의는 그린버그의 것보다 철저했다. 환영효과를 없애려면 대상성을 지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구성 자체, 즉 작품을 부분들의 관계로 짜는 것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그가 유일하게 흥미를 가진 것은 ‘전체로서의 사물, 그 전체성의 특별함’이었다.
하지만 반反관계주의만으로 환영주의를 없앨 수는 없다. 그림이 그림으로 남는 한 여전히 환영효과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를 피하려면 작품이 아예 ‘사물’이 되어 실제의 공간을 차지해야 한다. 조각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제 아무리 추상적이어도 조각 역시 환영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영주의를 완전히 없애려면 작품은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그냥 ‘사물’이 되어야 한다. 액자나 받침대도 일상 공간과 단절되지 않은 ‘물건’이 되어야 한다.
과거에 사람들은 물감에서 자연을 보았다. 돌덩어리를 아름다운 인체로 보았다. 하지만 미니멀리즘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의미하지도 가리키지도 않고 그저 눈앞에 덩그러니 놓인 하나의 사물을 볼 뿐이다. “네가 보는 것은 네가 보는 그것이다.” 이 순수한 ‘현전presence’이 바로 미니멀리즘의 특징이다. 모더니즘의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은 여기서 극한에 도달한다. 환영을 배격하려 한 모던의 강령은 이 지점에서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지우는 포스트모던으로 전화한다.
‘사물’에 집착한 저드와 달리 로버트 모리스는 그 사물을 보는 ‘지각’의 문제에 집중한다. 그가 전시장에 설치한 L자字 모양의 철제빔들은 실은 정확히 같은 모양이다. 하지만 놓인 위치나 자세에 따라 우리 눈에는 그 모양이 서로 달라 보인다. 우리의 이성은 그 세 개의 빔이 같은 모양이라고 말하나, 우리의 지각은 그것들이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둘 중에서 세계가 주어지는 근원적인 방식은 무엇일까? 모리스에게 더 근원적인 것은 지각이었다.
이는 물론 당시 영어로 번역된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세잔은 우리의 일상적 지각이 원근법적 지각과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고 눈을 점령한 원근법에 맞서 지각의 원초적 양상을 회복하려고 분투했다. 모리스 역시 우리의 눈을 이성의 지배에서 구해내 원초적 지각의 현전을 확보하려 한다. ‘아는 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의 세계’, 즉 최초 지각의 직접성을 확보하는 게 그의 과제였다.
저드가 반反관계주의적이고, 모리스가 현상학적이라면, 칼 안드레는 유물론적이다. 그는 아마도 사상 처음으로 조각을 수평으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나무, 그 다음에는 벽돌, 그 다음에는 금속으로 된 정방형의 판을 바닥에 깔아놓는 식으로 작업을 했다. 종종 관객들로 하여금 그 위를 밟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금속이 가진 물성物性, 그것의 촉감과 무게를 직접 느끼게 만들었다. 이렇게 그는 물리적인 속성에서 비롯되는 감각의 현전을 강조했다.
안드레는 자신의 작품을 “무신론적, 유물론적, 공산주의적”이라고 불렀다. ‘무신론적’이라 함은 작품에 초월적 의미층이 결여되어 있음을 가리키고, ‘유물론적’이라 함은 작품이 재료의 물성에 바탕으로 두고 있음을 의미하고, ‘공산주의적’이라 함은 작품을 이루는 목재, 벽돌, 금속판과 같은 요소들이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똑같은 자격을 갖는다는 뜻이리라. 나아가 누구나 살 수 있는 재료로, 누구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배열된 자신의 작품이 ‘평등주의’를 구현한다고 믿었다.
단 플라빈은 조각을 ‘형’이라기보다는 ‘공간’의 예술로 이해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다양한 색채의 형광螢光이 주위의 공간을 물들인다. 인상파 화가들이 물감을 가지고 했던 실험을 그는 형광등을 가지고 연출하는 셈이다. 플라빈은 공간을 물들이는 빛의 효과 속에서 ‘숭고함’을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색면추상 화가들의 초월적 숭고와는 다른 세속적 숭고, 이른바 현대의 ‘기술적 숭고’를 본다. 플라빈은 이를 “현대의 기술적 물신物神”이라 불렀다.
유물론적 예술관을 가진 안드레와 달리, 솔 르위트는 탈물질적 예술관을 구현하려 했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아이디어 혹은 컨셉이다” “아이디어는 예술작품을 제작하는 기계다” 이는 특히 그의 <월 드로잉wall drawing>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이 작품의 컨셉만 제공하고, 거기에 맞춰 벽에 드로잉을 하는 작업은 고용된 직공들의 손에 맡겼다. 이로써 작가의 인격은 사라지고, 작품은 불현듯 공공미술의 성격을 띠게 된다. 여기서 미니멀리즘은 서서히 개념예술로 전화하기 시작한다.
이들 모두를 묶어주는 공통성은 무엇일까? 이들은 작가의 예술적 개입을 배제하고, 공장에서 제작된 기성의 재료를 사용한다. 그 결과 작품이 전체성, 반복성, 상사성과 같은 형식적 특성을 띠게 된다. 또한 이들은 환영보다는 ‘오브제’를, 형태보다는 ‘공간’을, 작가보다는 ‘수용자’를 중시한다. ‘오브제-공간-수용자’로 이루어진 이 삼각형이 미니멀리즘의 본질을 이룬다. 비평가 마이클 프라이드가 이들을 ‘연극적’이라 비난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저 삼각형은 사실 ‘배우-무대-관객’의 관계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흔히 미니멀리즘을 ‘환원주의적’으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이처럼 잘못된 생각도 없을 것이다. 미니멀리즘은 몬드리안의 작품처럼 사물의 근원에 도달하기 위해 형의 복잡성을 단순한 기하학으로 환원시킨 것이 아니다. 몬드리안의 기하학이 깊다면, 미니멀리즘의 기하학은 얕다. 그것은 지성으로 본 깊이가 아니라 감각으로 느끼는 표면을 지향한다. 기하학과 현전성의 모순적 만남. 바로 여기에 미니멀리즘의 본질이 있다. 글 : 진중권(『미학 오디세이』 저자 / 중앙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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