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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안, 화산 문학탐방
일시:2017년 10월 16일 월요일~20일 금요일
탐방지:중국서안 진시황병마용갱, 진시황릉, 대명유적지, 화산 등
2017년 10월 16일 월요일 인천공항 출발, 중국서안공항 도착,실크로드 시작점, 비림, 서안성벽, 회족거리, 고루, 종루
* 한국 인천공항 출발 새벽
새벽 4시에 알람이 울렸다. 5시 40분네 집 나서와서 6시 10분 리무진.을 탔다 일교차 큰 날씨다. 오늘 12도~21도. 싸늘한 기온이다. 마스크, 머풀러 착용했다. 공항에서 7시 20분 미팅이라서 서둘렀다. 17명이 간다. 47번 게이트다. 10시 서안행 아시아나 9시 35분 보딩이다. 보조가방을 정류장 의자에 두고 왔다. 정신 차리라는 메시지로 받았다. 큰 아들만 고생시켰다. 치약. 치솔, 면도기를 공항에서 구입했다. 일행 주려고 보조가방에 넣었던 시집 3권을 넣었는데, 잃어버려서 주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든 나의 시집을 본다는 것에 만족했다. 3,3제 좌석이다. 우리 부부는 17J, 17K로 창가 좌석이다. 기내영화 '아내 업고 달리기'를 보며 상공을 날아간다. 뚱녀 아내와 미남 남편의 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기내 조식으로 쇠고기 덮밥을 먹었다. 비행시간은 인천에서 서안까지 3시간 10분 소요다. 세계여행은 언제나 미지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주고많은 것을 배우고 온다는 큰 기쁨과 행복하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 중국 서안 서안공항 도착
서안 공항에 도착했다. 산이 없는 도시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운무 자욱하여 잘 보이진 않지만평평한 도시 풍경이다. 공항 온도가 15도다. 알맞은 온도다. 교포 3세 가이드와 미팅했다. 용정이 고향이라고, 1909년 조상이 간도에 들어왔다고 한다. 서안이라 부른 것은 600년 전이다. 그 전에는 장안이라 부린 도시다. 장안 이전에는 함양으로 불린 도시다. 중국 산시성의 성도이며, 행정구역은 8개의 구와 5개의 현으로 나뉜다. 서안은 주나라 무왕이 세운 호경에서 비롯되었다. 그 뒤 한나라에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국가의 수도로 번영한 역사적 도시다. 그 동안 장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1943년에 시가 되었다. 가장 번영했던 당대에는 동서 9.5km, 남북 8.5km의 규모에 인구 100만이 넘는 계획적인 대성곽 도시를 이루어 멀리 서방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당나라의 쇠퇴와 그에 따른 병란으로 장안도 파괴되어 쇠퇴하였다. 현재의 서안은 명나라 때 구축한 주위 13k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와 교외로 되어 있다. 명, 청대에 서안부를 설치한 바 있으나 중화민국 때에 그것을 폐지하고 산시성에 직속시켰다. 구시가는 당나라의 장안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옛수도의 면모를 간직하는 한편 관공서와 상점 등이 밀집해 있다. 연평균기온 13도, 1월 평균기온 -1도, 7월 평균기온 26도, 연평균강수량 604mm이다. 성 밖 동서쪽에는 신흥공업지구가 형성되어 대규모 화력발전소가 건설되고 면방직, 기계·항공발동기, 비행기제조, 전자공업 등이 활발하다. 특히 면방직공업은 규모가 큰 여러 공장이 가동되어 생산량이 많은데, 그 원면은 질과 양이 다같이 뛰어난 관중분지산의 목화로 충당된다. 한편 남쪽에는 문교지구를 이루어 서안교통대학, 서안공업대학, 서안전자과학기술대학 등 여러 기술분야의 대학, 연구소 등이 모여 있다. 역사적 도시로 사적이 풍부하다. 나는 지금 중국 서안 역사적인 도시에 도착했다.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눈과 가슴에 담아갈 것이다.
* 서안 위수강
서안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간다. 약 1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들녘을 지날 때 위수강을 지나간다. 경수강과 함께 황하로 유입되는 강이다. 경수강은 맑은데 위수강은 탁하다. 그래서 '경위를 밝혀라' 라는 말이 탄생했다. 즉 '물 색깔 차이를 밝혀라' 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파생된 구절을 우리는 그 동안 사용해 왔던 것이다. 이곳 위수강은 그런 뜻에서 잊지 못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서안의 시내로 가는데 북에서 남으로 가고 있다. 세계여행은 명소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내 평소의 신념이다. 버스나 기차, 비행기 등을 타고 그 나라를 지나면서 걸러지지 않은 자연을 보는 것도, 현지 가이드로부터 그 나라의 드러나거나 혹은 감춰진 이야기를 듣는 것도 세계여행의 큰 소득이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지금도 1시간여 동안 버스를 타고 가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운다. 뜻깊은 시간이다.
* 서안 실크로드 시작점
서안 시내로 진입하여 항공상무주점에서 현지식인 섬서요리로 중식을 먼저 하였다. 서안 공항 근처에 위치한 항공상무주에서 양배추 요리, 계란 토마토, 소고기 요리, 닭고기 땅콩 볶음, 고추 고기볶음, 당면 요리, 가지 요리 등 대표적인 중국 메뉴로 맛있는 중식을 했다. 그리고 실크로드 시작점이라는 유적지에 갔다. 실크로드는 비단길이라는 뜻이다. 실크로드 기념조각상이 큰 덩치로 길게 설치되어 있다. 푸른 나무들과 고운 꽃정원 사이에서 한떄는 번창했을 실크로드의 시작점이라는 그 역사적 깊은 의미를 읊조리고 있다. 기념조각상을 한 바퀴 돌며 옛 향수를 불러 살펴보았다. 그 옛날 이곳 장안성 외곽에 가장 큰 물류센터가 있었다. 이곳 일대가 모두 물류센터로 여기서 실크로드가 시작되었다.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에서 유럽으로 나간 물품은 비단, 화약, 종이, 차, 도자기 5가지다. 유럽에서 중국으로 들여온 물품은 로마에서는 향신료, 향료다. 그리고 터키 등 중앙아시아에서는 카페트, 유리잔 등 유리제품이다. 서안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국의 중심도시로 실크로드의 문명을 느낄 수 있다. 실크로드 시작점에서는 고대 유럽으로 통하는 무역로인 실크로드가 시작된 지점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곳으로 개척자 장건의 조각상등을 만난다. 서안의 역사가 시작된 경로와 실크로드의 역사를 한눈에 본다. 실크로드의 총 길이는 8200Km다. 사실은 이 장거리를 누군가 한번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이 구간을 30리마다 역을 세우고, 실크로드 길목 곳곳의 그 역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전달, 전달했다. 실제는 낙타로 장거리 이동하지 않았단다.
서안은 세계 4대 고도(古都)중 하나이자 당나라 최고의 국제도시였다. 고대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옛 이름 '장안'(長安)으로 불렸던 중국 시안, 시베이다. 수도로서 역사도 1,000년이 넘을 뿐 아니라 3,000년 이상 오랜 역사로 기원전 11세기부터 기원후 10세기까지 약 2,100여 년 동안 13개의 왕조가 이 곳 시안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서주시대의 '호경'이라는 이름으로 수도를 정한 후 춘추시대의 최초의 통일 왕조였던 진나라가 이곳에 수도 '함양'을 세웠다. 전한의 초대 황제였던 유방이 항우가 파괴한 장안을 다시 보수하기도 했다. 이후 오호십육국 시대를 거치면서 수도로서의 위상을 다져오다 당나라의 멸망과 동시에 장안성이 해체되고 기력을 빼앗긴 시안은 수도로서의 위치를 다른 도시로 넘겨주게 되었다. 한 시대를 풍자한 당나라는 당대 최고의 경제, 정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으며 중국에서 가장 크게 번성한 도시였으며 동서로 10km, 남북으로 8km의 정방형 면적에 150만 명의 인구가 거주했다. 이런 이유로 실크로드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이기도 한 장안에는 당시 세계의 모든 사상과 문물이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시안에 거주했던 외국사신의 수가 수 천명을 넘었다고 하니 지금의 미국 뉴욕이나 영국 런던 버금가는 국제도시였다는 것이다. '장안의 풀로 태어나는 것이 변방의 꽃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던 도시 시안에서 중국 최고의 문화를 볼 수 있다.
실크로드 시작점을 지나 다음 탐방지 비림으로 가는데 입장시간 마감이 임박하여 우리 버스가 서둘러 가다가 그만 교차로에서 버스 진입시 좌회전 신호가 지났는데 위반하고 진입하여 갔다. 그런데 눈감아 준단다. 이게 중국이라고 가이드는 힘주어 말한다. 가이드 조부가 1909년에 간도에 와서 1944년 사망했단다. 가이드 부친은 자기의 아버지 소원 이루어드리라고 아들 셋의 이름을 성춘, 명춘, 봉춘으로 지었다단다. 아룰 성, 밝은 명, 봉황 봉자. 가슴 시린 이야기를 듣는다. 중국은 중앙집권제라 반기 드는 자 없어 발전 속도가 빠르단다. 계획을 세우면 바로 실천가능하단다. 중극은 현재 KTX 고속열차가 많다. 세계 최다 철도 보유국이다. 최고속도가 시속 600Km다. 지금은 중국 어디든 자국 이동이 하루에 가능하다. 자국내 아무리 먼 지역도 비행시간 4시간 이동거리다. KTX가 사방팔방으로 많이 건설되어 있단다. 중국 부자는 7%다. 13억의 7%는 약 1억 명이다. 그들 1억 명은 상상도 못하는 부자다. 중국의 모든 건물은 다 중앙난방이다. 그런데 10월까지는 난방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이드네 집은 10월에는 아내가 추워서 전기장판을 사용한단다. 우리가 유숙할 노보 호텔도 춥단다. 가이드 아들은 9세인데 학교에서 숙제로 내주는 중국어 쓰기가 가장 어렵다고 한단다. 한자를 게속 개발 중이란다. KFC, 스타벅스, 코카콜라 등 한자를 만들었단다. 한자로 못 만드는 글자가 없단다. 그래서 새로 탄생되는 한자가 많아 더욱 어렵단다. 중국 초서가 일본어를 탄생시켰단다. 교포 가이드는 쉼없이 중국에 대하여 잘 몰랐던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열성에 고마웠다.
* 서안 비림
서안 성벽의 성문을 진입하여 비림에 간다. 비림은 922년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비석 2천 개 중 1천개 비석을 전시하고 있다. 당현종이 공자 말씀을 적은 대형 비석도 있다. 논어, 맹자, 주역 등 비문 새겨서 고시용 비석으로 110개가 유리 안에 보관되어 있다. 고시생들을 위해 그 당시 만든 것이란다. 관제시죽 비석도 있다. 관우가 조조휘하에 잠시 머물러 있게 되었을 때 유비에게 보낸 한 장의 장죽도다. 관우가 유비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비림은 무덤의 비가 많다. 비석 중에 달마상이 있다. 탁본으로 판매한다. 탁본 장면을 보았다. 비석들이 모여 이루어진 비석의 숲 비림이다. 비림(碑林)은 말 그대로 비석의 숲이다. 서안 일대에서 출토된 역대 중국의 귀중한 석각 비문 2000여 개를 한데 모아놓은 곳이다. 서안의 삼학가(三學街)에 자리잡고 있는 섬서성 비림박물관 내에 위치하고 있다. 북송 철종 1090년에 처음 지어져 현재까지 9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비림은 현재 7개의 대형 진열실과 8개의 회랑 그리고 8개의 비정(碑亭)에 한대부터 청대까지 2300여 개의 비석을 수장하고 있다. 그 중 1000여 개를 전시하고 있다. 현종, 왕희지, 안진경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중국 최대의 비석박물관이다. 당 현종, 왕희지, 안진경 등의 작품도 볼 수 있어 서예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필수 코스로 꼽힌다. 서안 문묘, 공자묘에 있는 ‘석조문고(石造文庫)’라고 하는 비림은 문자 그대로 비석으로 숲을 이룬 박물관이다. 여기에는 한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명필들의 글을 새긴 석비 1,095기가 소장되어 있다. 특히 당, 송대 이후의 석비와 법첩(法帖)이 가장 많다. 중국 수, 당, 송나라에 걸쳐 역대의 명필을 새긴 석비들이다. 이것은 837~1090년에 걸쳐 수집된 것으로 공문서 보존의 목적이었으며 당시에는 도서관이었다. 이곳에서는 전서 ,예서, 초서 ,행서 등의 각종 서체를 비교할 수 있으며 유명 서예가들의 필체를 직접 감상할 수 있다.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으로, 대외 문화 교류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유적지이다. 서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꼭 가볼만한 곳이다. 비림은 그야말로 비식의 숲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만큼 많은 비석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주변에는 나무도 많이 숲을 이뤄 비림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명소다.
* 서안 비림 석각 예술실
비림의 뒷편에 비림 석각 예술실이 있다. 석공예 예술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그곳은 우람한 석공예 작품들이 입구서부터 전시되어 있다. 내부에도 중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수려한 석공예 조각품들이 많다. 비림 석각 예술실에는 노자상 진품이 크게 서 있다. 넉넉한 시간으로 골고루 많이 관람했다.
서안은 지하철 현재 3호선까지 있다. 12호선까지 계획되어 있다. 노란 자전거 가 거리 곳옷에 매어 있는데 공용으로 사진만 찍고 누구나 타고 갖다 놓으면 된다. 중국인구 13억 3천만이다. 호적 입적자만 인구만이다. 실제 인구는 2억이 많은 15억에서 16억이다. 중국은 한반도의 47배다. 남한의 100배 크기다. 서안은 중국의 센터다. 중국은 동과 서의 거리가 비행기 6~7시간 거리다. 자국내 시차가 4시간이다. 그 만큼 큰 나라다. 중국 서안을 기준으로 시간을 정한다.서안시 임현동이 가장 중심 지역이다. 서안 시가지에서 1시간 거리에 있다. 한국과 수교 25년 되었다. 비림도, 성벽도 시가지도 모든 것이 웅장한 풍경이다.
* 서안 성벽
서안 성벽 동문으로 들어오니 양쪽에 성벽이 날개처럼 아득하게 뻗어 있다. 서안 성벽은 그 옛날의 장안 성벽이다. 북경을 우선으로 정하면서부터 '장안'이라는 호칭을 사용 금지 시켜서 서안 성벽이라 부른다. 이런 문이 동서남북으로 4군데 있다. 철옹성. 해자가 잘 보존되어 남아 있다. 성문이 겹겹이 들러쳐져 있었다. 성문을 거쳐 성벽에 올랐다. 우람한 성의 건물도 오롯하여 옛 풍채를 자아내고 있다. '장안의 절세미인', '황성옛터' 등이 이곳 서안 성벽에서 나온 말이란다. 서안 성이 세겹인데 가장 중심지에 황제가 살아서 황성이라 했다. 가이드로부터 설명을 듣고 자유롭게 성벽을 따라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성벽이다. 서안은 베이징, 낙양, 남경, 카이펑(개봉), 항주와 함께 중국의 6대 고도(古都) 중의 하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이름난 도시다. 당나라의 옛 수도로 오랜 시간 동안 장안(長安)으로 불려왔다. 서안은 동서양 문화의 교류가 이뤄진 실크로드의 시발점으로 중국 역사·문화 그리고 교통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3000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시안에는 고대 중국대륙을 호령했던 진시황의 무덤과 진시황의 사후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8000구가 넘는 병마용, 당 현종과 그의 애첩 양귀비가 사랑을 나누던 화칭지 등 긴 역사 만큼이나 전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역사적 산물이 보존되고 있다. 서안 역사의 상징물이다.
서안 성벽은 당나라 장안황성의 기초 위에 건조한 것이다. 이후 수차례 중수 공사를 거쳐, 방어체계를 구축하였고,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 규모의 고성벽이 완료되었다. 1961년 시안성벽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오늘날의 서안성벽은 명나라 초기에 건설된 것이다. 당나라 말기에 수도를 옮기면서, 원래의 도성인 당나라의 장안성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청대에 이르러 명나라 때 기본골격을 따랐고, 열 두차례에 걸친 중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중 규모가 가장 큰 것은 건륭제 46년인 1781년의 작업이며, 포와 해자를 추가하여 대다적인 방어능력을 향상시켰다. 성벽은 방어용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동서로 길쭉한 장방형이다. 동벽은 2,590m, 서벽은 2,631m, 남쪽 장벽은 3,441m, 북쪽 장벽은 3,241m로 전체 둘레 13.75km이다. 성내의 면적은 총 12평방킬로미터로, 당나라 장안성의 1/7 정도의 크기이다. 성벽의 높이는 12m, 아래에서 15~18m에 이른다. 서안성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성문이 있고, 각각 장악문(장락문), 안정문, 영녕문과 안원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문 밖에는 옹성이 고르게 쌓여있다. 각 문은 3층으로 3중으로 나뉘어 있고, 바깥이 안쪽을 향하게 되어 있다. 서안 성벽은 중국에서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완전한 고성중의 하나다. 두터운 고성벽이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성벽은 명나라 홍무제 3년에서 11년까지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그 역사가 이미 600년에 이른다. 고대 전쟁사를 보면, 이 성벽은 유일한 줄입통로로서 통치자에게 있어서는 방어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동서남북의 4개문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고, 주변에는 넓고 깊은 호성하 강물이 흐르고 정문에서 시작되는 정로를 가로지르는 조교라는 다리가가 놓여있다. 1982년 7월에는 섬서성정부의 주창아래 서안 시민 몇십만 명이 힘을 합쳐 독특한 풍격의 환성공원을 조성했는데, 성 정상부분에는 조그마한 화원을 여러개 만들어 놓았다. 서안성벽은 단지 역사적인 건축물의 의미를 넘어서 공원과 성, 길, 물이 어울어진 공원이 조성됨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서안 성벽은 입장료를 받고 오를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넓은 성을 둘러보게 하기 위해 모형전동차도 운행한다. 우리가 오른 동문은 장락문이다. 장락문이라는 현판을 보며, 철옹성을 한 바퀴 돌며 성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성벽에서 긴 계단을 내려와서 그 옛날 철옹성으던 곳에 주차한 버스를 타고 성벽을 떠나왔다. 중국의 깊은 역사가 서린 참으로 뜻깊은 유적지 탐방이다.
* 서안 성벽 철옹성
서안 성벽의 철옹성은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공간이다. 성문 안으로 적군이 들어오면 성문을 닫고 성벽 위에서 화살을 쏘아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이 철옹성 안에 들어오면 살아날 자가 없다. '옹'자가 '도자기 옹', '항아리 옹'. 항아리 같은 곳에 갇혔단 뜻이다. 나의 '자작자작 오는 겨울'이라는 시에서 철옹성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여기 와서 보니 그 단어가 실감난다. 성의 동문인 장락문이라는 웅장한 건물 앞을 지나며 철옹성 한 바퀴 산책했다.
* 서안 성벽 해자
아직도 성벽 밖의 둘레는 해자로 둘러 진을 치고 있다. 해자는 성을 보호하는 연못이다. 방어용으로 성벽 주위에는 해자가 조성된다. 성벽에서는 성벽이 높아 낮은 곳의 바깥 해자가 잘 보이지는 않는다. 성벽의 뚫린 구멍으로 보니 정말 시가지와 성벽이 맞닿는 곳에 해자가 보인다. 잘 보존해 둔 역사 유적이다.
* 서안 성벽 위 자전거
서안 시가지 곳곳를 달리며 보아왔던 자전거가 성벽 위에도 많이 놓여 있다. 그런데 시가지의 자전거는 무료 사용이지만 이곳의 자전거는 대여용이다. 여기서는 무료가 아니다. 14km의 성벽을 이 자전거로 누구나 돌아보도록 편의시설을 제공하는 것이다. 노란색, 빨간색 자전거가 진열되어 있어 고전과 현대의 아름다운 조화다.
* 서안 성벽 안 고풍스런 건물
서안 성벽에 오르니 양쪽으로 시가지가 보인다. 성문의 건물을 중심으로 보며 서서 조망할 때 왼쪽은 성안이다. 오른쪽은 성밖이다. 성안의 시가지 건물들은 허름하고 칙칙하다. 옛 풍채로 고전적인 향수를 머금고 있다. 저녁 무렵이고 흐린 날씨다. 안개가 자욱하여 더욱 그윽한 풍경이다.
* 서안 성벽 밖 신시가지 고층건물
서안 성벽 오른쪽에는 성안의 건물들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성 밖의 신시가지에는 고층 아파트가 많다. 우뚝우뚝 현대의 건물들이 하늘 늪이 솟구쳐 오른다. 성벽을 중심으로 좌우로 조성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풍경이 세월의 흐름을, 시대의 변함을 증명하고 있다.
* 서안 회족거리
서안 성벽을 떠나 회족거리로 왔다. 가이드는 수많은 세계인과 현지인이 모이는 곳으로 일행의 줄을 놓치면 차지 힘들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복잡한 곳이어서 그 만큼 안전상의 문제에 신경를 써아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곳에서 파는 음식은 자기들도 먹지 않는다며, 하루 장사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해준다. 긴장하고 가방을 앞으로 오게 하여 쥐고 회족거리에 들어서니 말 그대로 인산인해다. 거리는 양쪽을 조성되어 있다. 여기는 이슬람 문화권이어서 돼지고기는 없다. 대신 양고기가 통째로 걸려있는 가게도 있다. 과자종류, 과일종류가 많다. 그 옛날 실크로드의 번창기 여러 국가 사람들이 드나들던 역사의 흔적으로 생성된 회족거리다.
서안은 고대 유럽으로 통하는 무역로이며 내륙 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 동서통상로였던 곳이다. 고대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옛 실크로드의 번성과 영화를 증언하는 회족거리 등도 최강 제국 당나라와 찬란한 중국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다. 실크로드란 비단과 도자기를 비롯한 중국 수공예품이 아랍 세계로 전해지던 교역로로 한나라 때 처음 개척돼 당나라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사람과 물품이 오갔다.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 상품이 중국산의 비단이었던 데에서 유래하는데 서방으로부터도 보석, 옥, 직물 등의 산물이나 불교·이슬람교 등도 이 길을 통하여 동아시아에 전해졌다. 불교와 기독교 전파도 이 길을 통해서 이뤄졌다. 당나라 시절 천축에서 불경 600권을 들여와 불교 중흥을 이끈 현장법사,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횡단하고 '왕오천축국전'을 쓴 신라 고승 혜초도 이 길을 걸어갔다. 이런 시대에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조성된 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온 회족거리다. 회족의 전통 양식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당나라의 국제도시라는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인종들이 거주한다. 실크로드를 통해 장안으로 들어온 서역인의 후예들인 회족이 대표적이다.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중국 소수민족 중의 하나지만 오랜 세월을 겪으며 한족과 별반 다르지 않는 생김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시안에는 약 30여만 명의 회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해 독실한 무슬림으로 살아가고 있다, 또한 이슬람의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는 전혀 먹지 않으며 하루 두 번 사원에서 예배를 드린다. 서안 중심에 자리한 종고루 광장은 서안 시내 중심에 있는 종루와 고루 사이에 위치한 광장으로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번화가다. 이곳 뒤편에 있는 회족거리는 옛날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무역을 하던 회족이 자리를 잡고 이뤄놓은 시장이다. 회족은 중국 소수민족 중 하나지만 인구가 900만 명에 달한다. 서안에만 5만~6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흰 모자를 쓰거나 두건을 두른 회족들이 양꼬치, 해산물 꼬치는 물론 산시성 특색 음식과 호두, 곶감 등 각종 먹거리를 판다. 이슬람 글씨도 곳곳에 눈에 띄어 이국적 느낌을 자아낸다. 빌딩이 즐비했던 모습과 달리 재래시장과 비슷해 정겹다. 아랍 ·중앙아시아계 무슬림 혼혈민족인 회족은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세 번째로 인구가 많다. 둥글고 납작한 모자를 쓴 회족 남성들, 머리카락이 안 보이게 정수리부터 어깨까지 이어지는 모자를 쓴 여성들의 모습이 이국적이었다. 이들은 꼬치 구이나 국수, 아이스크림 등 먹을 것을 주로 판다. 소수민족 회족의 전통 양식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중국 최대 이슬람교도 집단인 회족은 이슬람 교리에 따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돼지고기 요리를 찾아볼 수 없고, 양고기 요리가 주를 이루며 말린 과일이나 각종 꼬치, 전병 등 중국식으로 요리된 이슬람 스타일의 음식들을 볼 수 있다. 회족은 중국에서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민족이다. 이들은 종교상 이유로 돼지고기를 안 먹는 대신 양고기와 소고기를 주로 먹는다. 시안에 있는 회족거리(回民街)는 시안만의 독특한 특색이 함께 녹아 있는 유명한 먹거리 골목이다. 300여 가지의 다채로운 먹거리는 회족 전통 문화의 분위기가 깊게 배여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한참을 걷다보니 끝에 이르렀다. 자동차가 진입하지 못하도록 큰 기둥을 몇 개 박아놓았다. 여기서 기념사진을 찍으란다. 어둠 속에서 회족거리의 풍경을 잡아 카메라에 담았다. 길고, 가게가 많고, 사람이 많은 명물 거리다.
* 서안 고루 야경
우리는 회족거리에서 이미 밤을 맞았다. 이제 저녁식사를 하러 가며 고루를 먼저 보았다. 야경이 비경이다. 현대의 찬란하고 육중한 건물 사이에서 그보다 더 웅장한 건물이 현란한 불빛으로 오늘을 비추이고 있다. 고루는 중국 최대 규모의 건축물이다. 서안시내 중심에 위치한 종루에서 45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서안 고루는 종루보다 4년 먼저 건축된 명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북경의 자금성, 명 13릉 다음으로 당시 건축기술과 미학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종루가 종을 쳐 시간을 알리는 누각이라면 고루는 북을 쳐 시간을 알리는 곳이었는데, 새벽부터 저녁까지는 종을 치고, 밤 시간에는 북을 쳤다. 약 10-10분 정도 진행되는 공연이 매일 열려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고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종루 서북쪽에 있는 고루(鼓楼)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린 곳이다. 사람들이 생활하는 낮에는 종소리로, 모두 잠든 밤에는 단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북소리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고루를 보고 돌아서니 종루가 보인다. 모두 기막힌 비경이다.
* 서안 종루 야경
종루는 고루 반대편에 있다. 종루도 고루와 마찬기지로 현대의 건물 사이에서 웅장한 풍채로 현란한 불빛을 품어낸다. 종루는 가장 보전이 완벽한 명대의 건축물이다. 중국에 남아 있는 수많은 종루 중에서 제일 크고 보존 상태가 완벽한 서안의 상징물이다. 시간을 알리기 위해 1834년에 건설되었다. 2층 정방형의 누각 형태를 띠고 있다. 처음 건축되었을 때는 지금보다 서편에 있었으나 158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구시가의 중심지이자 교통 중심지이기 때문에 주변에는 크고 작은 상점과 먹을거리 장터가 열린다. 누각에 보관되어 있는 종은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과거에는 종루의 종을 신호로 성문을 열고 닫았다고 한다. 종루는 서안 중심에 위치한 동서남북 사방이 연결되어 있는 교통중심 지역이다. 우리나라의 동대문이나 남대문과 비슷한 위치로 놓여있다. 총 높이가 36미터, 총 면적이 1377 평방미터다. 서안의 종루는 중국에 남아있는 수많은 종루 중에서 제일 크고 보존이 완벽하여 서안의 상징적인 건축물일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명태조 주원장 홍무제 17년인 1384년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건설된 것으로, 외관 3층, 내부 2층 정방형의 누각 형태다. 처음 건축되었을 때는 지금의 서안시 광제가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명나라 만력 1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건물의 특징은 못을 사용하지 않고 건물을 올렸다는 것인데, 사면에 회랑이 둘러져 있고 내부에 계단이 있어서 올라가 서안시내를 둘러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또한 누각 안에 보전되어 있는 종은 고대시대 때 아침을 깨우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서, 새벽에 종이 울리면 종루의 문을 열고 저녁에 종이 울리면 종루의 문을 닫았다고 전해진다. 종루가 서안 중심에 위치해 있고, 종루를 기준으로 교통이 사방으로 통하기 때문에 이 주변에는 크고 작은 상점과 먹거리 장터가 열려 있다. 종루가 있는 곳은 8차선의 넓은 도로로, 종루에서 서안 성벽까지 양쪽의 도로변에 새로 지어진 건물과 백화점, 은행,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고 성벽 왼편으로 구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은 북경의 유리창 거리처럼 그림, 옥, 도장, 장식품 등 고물건을 판매하는 상점거리인데 거리 끝에는 비림(碑林)으로 들어서는 문이 있다. 종루에서 이 거리까지는 대략 300미터 떨어져 있으며, 종루로 가는 버스를 이용하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시안의 종루(鐘樓)와 고루(鼓樓)는 시안에서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로 동서남북이 연결돼 있는 교통의 중심지에 있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종루와 고루의 오른쪽에는 종고루 광장이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의 종루는 중국 내의 종루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가 양호한데, 시안의 사람들은 그 어떤 다른 지역의 중국인들보다 종루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지하도를 통해 중루 입구까지 갈 수 있으며 누각을 오를 수도 있다. 꼭대기에 올라 한눈에 서안 시가지를 보기도 한다. 고루와 종루 그 사이에 식당이 있어서 그곳에 만두로 석식을 했다.
* 서안 교자연 만두 석식
고루와 종루 사이에 있는 식당에서 교자연 만두로 석식을 했다. 만두가 14차례 나오며 배푸른 식단이다. 교자연은 서안시 해방로에 위치한 교자관(餃子館)에서 처음 만든 것으로,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남북의 교자를 모두 모아 놓은 것이다. 우리가 보통 '만두'라 부르는 속이 들어간 전병쌈을 중국에서는 '교자'라 부르며, 정작 중국에서의 만두는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밀가루떡을 말한다. 토지가 비옥한 남방에서 쌀을 주식으로 먹는 반면, 척박하고 추운 기후의 북방에서는 밀로 만든 국수나 만두, 교자를 즐겨 먹었다. 지금은 지역에 상관없이 누구나 좋아하는 전통음식이면서도 별미가 되었는데, 중국인들은 춘절(설날)에 가족끼리 교자를 빚고 찌어 먹음으로서 새해를 맞이한다. 돈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중국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교자라는 음식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반달형의 교자모습은 옛날 돈의 모습과 유사한데, 고대부터 돈을 좋아하던 중국인들이 음식을 돈의 모양처럼 만들어 먹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설날에 교자를 가족끼리 만들어 먹으면서 일부러 동전을 몇개 넣어 두는데, 그 동전을 깨무는 사람에게 돈복이 온다고 믿는다고 한다. 북경의 유명한 훈둔(만두국)부터 광동의 얌차에 이르기 까지 교자의 모습과 맛, 재료가 각양각색인데, 고기, 야채, 버섯 등의 다양한 재료와 물고기, 꽃, 나비 등의 다양한 모양의 교자를 찌거나, 삶거나, 굽거나, 튀겨서 내어 놓는다. 이런 다양한 교자의 종류가 180여 종 이상이라고 하니, 역시 음식의 천국은 중국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서안의 한 음식점에서 시작된 서안의 교자연은 이미 2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해외 관광객에게까지 그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넓다란 대륙 곳곳에서 맛볼 수 있는 다양한 교자의 맛들을 이곳 서안에서 한번에 맛볼 수 있다. 만두가 계속 나와서 나중에는 배가 불러 일행들이 가위바위보를 하여 진 사람이 벌칙으로 만두를 먹게하며 한바탕 웃기도 했다.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밤의 풍경 속에 아름다운 식사를 맛있고 즐겁게 하였다.
2017년 10월 17일 화요일 진시황릉 병마용갱, 화청지, 장한가쇼 등
* 서안 노보텔 호텔
어젯밤 잘 때 새벽 1시 30분 경 눈 떠져서 일어났는데 서늘해서 가운을 입고 잤다. 7시 모닝콜, 8시 조식, 9시 출발이다. 이 호텔은 8층이 로비이고, 식당은 7층에 있다. 우리 부부의 방은 1510호실로 15층이다. 일행이 모두 15층에 배정 받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하기 위해 7층으로 가니 입구에서 직원이 일일이 방의 호수를 체크라고 들여보낸다. 음식이 매우 종류가 많고 정성껏 차린 메뉴들이 기쁨을 선사한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을 둘러보았다. 1층 한켠에 실크로드의 거상들 풍경이 전시되어 있다. 서안이 실크로드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전시물이어서 인상적이었다. 오늘은 화청지와 진시황릉 병마용갱을 간다. 16000보 걷는단다. 서안은 가로 100Km, 세로 100Km 그래서 10000㎢다. 서안은 한국에서 1주일에 항공21편이 온다. 금년은 여행객이 적다. 중국은 사후에 무조건 화장이다. 부자만 시골 논밭에 묻힌다. 중국도 3년 전부터 의무교육 12년이다. 학비는 개인 부담이다. 유치원은 40만원 정도 내고 차량이 없다. 상위 7%, 중상 20%, 중 20% 정도로 잘 사는 인구는 50%다. 추석 연휴 때 8일 간 8억 5천만 명이 여행했다. 여행 인구가 많아졌다. 도로는 고속도로, 국도 모두 톨게이트 통과료를 낸다. 우리가 이동한 어제 공항 고속도로 톨비가 비싼 곳으로 한국의 4배 정도 냈단다. 그 도로는 소나기가 와도 즉시 하수되는 도로였다. 지금도 화청지로 가는데 고속도로톨게이트를 통과한다. 20Km 톨비가 24000원이다. 한국이면 4천 원 정도다. 6배 비싸다. 그래서 트럭 짐차가 나갈 때는 4대가, 올 때는 8대가 온다. 톨비 아끼려고 그런다. 우린 지금 서안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중국 전당대회는 10년에 1회 정도 한다. 오늘은 서안 시외로 1시간 20분 정도 이동한다. 그래서 그 이동 시간에 가이드로 부터 이런저런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 화청지 입구 조각상
버스 주차장에서 내리니 화청지라는 한자의 커다란 안내 기둥이 세워져 있다. 화청지는 양귀비가 11년 산 곳이다. 서시, 양귀비, 초선, 왕소근 이 네 여자가 중국의 4대 미인이란다. 한참을 걸어서 화청지 입구에 도착했다. 입장문 앞에는 양귀비와 악사들이 춤고 음악을 공연하는 동상의 거대한 조각작품이 연못 속에 놓여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어 그 조각상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가이드가 입장권을 사 오는 동안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아름다운 조형의 조각상을 조망했다.
* 화청지 여산과 연못
화청지에 입장하여 들어오니 매우 넓은 자락으로 여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화청지는 양귀비와 현종이 겨울을 보내던 곳이다. 현종과 양귀비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깃든 화청지다. 서안 산록에 있는 온천지대다. 서안에서 35㎞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온천수가 풍부하여 주나라 때부터 무려 3천여 년 간 온천 휴양지로서 유명하다. 서주 말기에 주유왕은 지금의 화청지[华清池]에 여궁을 세웠다. 당나라 644년에는 당태종 이세민이 탕취안궁을 지었고 현종이 이를 증축한 뒤 화청궁이라 개칭하였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연애시절에는 이곳이 매우 번성하였고, 당시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가, 안사의 난이후로 화칭츠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화칭지 온천수의 수온은 43℃ 이다. 풍부한 광물질과 미량의 원소가 함유되어 있으며, 온천욕을 하기에 적합하다. 여산은 화청지 뒤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여산에 오르는 케이블카가 공중을 오르내린다. 잔잔한 연못이 우람한 여산 아래에서 비경을 자아낸다.
* 화청지 양귀비 목욕탕
화청지 연못을 보고 뒤편으로 돌아가서 양귀비의 목욕탕을 보았다. 양귀비는 본명이 양옥환이다. 가이드 말로는 부모는 궁중악사였단다. 양귀비도 6세에 궁중악사가 되었단다. 18세에 단장이 되었단다. 목욕탕이 4개의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물관과 현종과 양귀비가 사용한 목욕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목욕탕 건물은 다시 건축했어도 목욕탕 바닥의 목욕탕은 예전 그대로다. 그래서 가이드는 바닥을 잘 보라고 강조한다.
화청지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규모의 당나라 왕실 원림이다.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질좋은 지하 온천수때문에 역대 제왕들의 관심을 받아왔던 장소이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진시황과 한 무제도 이곳에서 행궁(行宮)을 건립하였다. 특히, 당 현종 천보년간에 건설한 궁전누각이 가장 회려하며, 이 때 정식으로 화청궁(華淸宮)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당시(唐詩) 중에는 화청지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시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화청지 동쪽구역에는 정말약이 쓴 '화청지' 금자편액이 걸려있으며, 구역 내에는 하화각, 비하각, 오간정(1936년 서안사변 당시 장개석이 머물던 곳) 등의 건축물이 있다. 그 중 온천석벽에 있는 온천송비는 중국 비석예술 중에서도 우수한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중앙구역에는 당 화청궁 어탕유적박물관이 있으며 연화탕, 해당탕, 태자탕, 상식탕, 성진탕 등의 당나라때 현종과 양귀비가 온천을 즐기던 탕과 문물 진열실이 있다. 화청지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를 유지한다. 다량의 화학물질을 포함하고 있어서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 또한 매일 육각정 무대 앞에서는 당나라 시기를 재현한 공연이 열린다. 시안에서 35㎞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온천수가 풍부해서 주나라 때부터 무려 3000여년 간 온천 휴양지로 유명한 화칭지는 당 현종과 양귀비가 연애를 한 곳으로 알려져있다. 화칭지의 중국적인 색채가 듬뿍 담긴 건축물과 하얀 양귀비 동상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화청지에는 양귀비와 당 현종의 애틋한 사랑이 전설처럼 나부끼고 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당나라의 왕실원림이었던 화청지는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눴던 곳으로 6000년 동안 마르지 않고 43도의 온수가 나오는 온천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서주 유왕 때부터 이곳에 탕을 만들었고 총 9명의 황제들이 이곳을 피한지로 삼았다고 한다. 다양한 온천탕은 물론 양귀비가 머리를 말렸다는 건물도 볼 수 있다. 목욕탕이 네 개의 건물로 나뉘어져 있어서 모두 관람했다. 하녀들이 목욕한 곳까지 둘러보고 나오니 하얀 양귀비 동상이 눈앞에 있다. 잠시나나 양귀비의 족적을 적나라하게 본 유적지다.
* 화청지 장개석 사변지
화청지는 또 다른 중국 근대사의 큰 사건인 1936년 시안사건(서안사변)의 현장이기도 하다. 서안에 주둔하던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이 이해 12월12일 이곳에 머물고 있던 총통 장개석을 급습해 체포한 뒤 홍군 토벌 중지 및 항일전쟁을 위한 제2차 국공합작을 종용했던 것이다. 장개석이 군대에 붙잡힌 1936년의 서안 사건으로 이곳에서 붙잡혔다. 목욕탕으로 입장하는 계단 곁에 장개석 사변일인 12월 12일이라는 제목의 12.12 영화 제목 같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화청지 양귀비 목욕탕 건물 뒷편으로 장개석 사변지가 있다. 1936년 12월 12일에 사변이 났다. 그때 3~4일 간 장개석이 머문 곳이다. 시간이 허락하여 장개석 사변지도 관람했다. 문을 통해 들어가니 연못이 아담하게 있고 그날의 역사 유적들을 전시해 놓았다. 사진으로도 붙여놓고, 장개석이 생활하던 침구와 책상. 생활용품 등을 그대로 보존해 두었다. 나는 대만에 갔을 때 장개석 공원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대만의 장개석 공원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히자민 이곳은 그가 붙잡힌 곳이니 이렇게나마 보존하는 것도 큰 배려일 것이다. 이것으로 화청지의 모든 관람을 마치고 입장문을 다시 거쳐 밖으로 나왔다.
* 화청지 입구 공원 풍경
화창지를 나와 버스 주차장으로 나오는데 아까 들어갈 때는 서둘러서 보지 못했던 공원의 동상들이 많이 보인다. 곳곳에 양귀비 관련의 악기와 인물들이 동상으로 제작되어 설치되어 있다. 여산으로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승차장도 보인다. 저녁에는 화칭지에서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장한가 가무쇼’가 펼쳐지는데, 우리도 다시 이곳에 와서 관람할 것이다. 3000여명이 투입되는 거대한 스케일의 가무쇼다. 뮤지컬 ‘장한가’는 현종과 양귀비의 애절한 사랑을 읊은 백거이의 ‘장한가’를 소재로 거대한 스케일의 뮤지컬이다. 화청지 뒤쪽에 자리한 산을 배경으로 화청지의 모든 건물이 무대가 된다. 300명이 넘는 배우들의 화려한 의상과 군무가 관람객의 눈을 매료시키는 공연이 기대된다. 이제 우리는 중식식당으로 간다.
* 한식 중식식당 주변에서 본 감나무와 석류나무
한식 식당인 이태원이라는 식당에서 중식을 했다. 이태원 식당은 임동현 화청지에서 병마용으로 이동하는 구간에 위치하고 있다. 임동현은 중국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이어서 의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관광객들이 진시황릉 유적지로 가며 식사하기에 위치가 매우 좋은 위치다. 뿐만 아니라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인테리어 및 환경이 매우 깔끔하다. 삼겹살 및 된장, 김치찌개가 맛있다. 한국에서 먹는 음식 못지 않게 맛있고 메뉴가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박으로 나오니 식당 곁에 석류나무 농장이 있다. 석류를 하나씩 모두 봉지로 씌워 놓았다. 그리고 석류나무 사이에 감나무가 있다. 감이 붉게 읽어간다. 그런데 감이 작다. 가이드는 저 작은 감이 정말 맛있는 감이라고 한다. 중국의 국목은 회화나무, 국화는 목단이다. 중경 시청 앞에 있던 나무도 회화나무였던 것 같다. 서안은 석류가 많이 나는 곳이다. 진시황릉으로 가는 곳곳에서 석류나무 농장이 보였다. 거리에서 석류를 파는 상인도 많다. 진시황릉 역시 석류나무 밭이란다. 차창 바끄으로 지나가는 석류나무들이 서안에서 보는 진풍경이다. 가이드가 중식할 때 이 식당에 폰을 두고 와서 다시 되돌아와 들렀다. 우리는 철저한 가이드도 실수를 한다고 웃었다. 자동차 길을 서둘러 건너서 오가는 가이드가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제대로 본 한식식당 건물이기도 하다.
* 진시황릉 병마용갱 박물관 정원
오늘의 여행 하이라이트는 첫째 병마용, 둘째 장한가쇼다. 지금 우리는 진시황릉 병마용갱 박물관 정원에 입징하였다. 진시황이 서안을 먹여 살린단다. 입장료가 하루에 15억원 수입이란다. 개인 입장료는 3만원으로 진시황릉까지 관람한다. 병마용갱은 입장장문과 퇴장문이 다르다. 병마용갱은 죽은 진시황을 지키는 진시황 병마용들이 묻힌 곳이다. 진시황의 정예부대가 눈앞에서 2200년 전의 중국이 살아 숨쉬는 모습이 재현된 유적지다. 장안으로 잘 알려진 중국 산시성 시안은 실크로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13개 왕조의 도읍이자 한때 당나라의 수도 장안이기도 했던 서안을 대표하는 유적은 병마용갱이다. 중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던 진시황제의 정예부대를 정교한 조각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진시황릉 병마용갱은 중국 시안(西安) 진시황의 무덤 부장품이 보존된 곳이다. 갱 속에 파묻은 약 1만 구의 도자기 제품, 병마(兵馬)를 지칭한다. 진시황릉의 동쪽 약 1.5km의 지점에 있는 이 무덤은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굴된 것은 모두 3개 갱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큰 제1호 갱은 동서 길이가 230m, 남북 너비가 62m나 된다. 병마용은 보(步, 보병), 노(弩, 방아쇠를 사용하는 활), 차(車, 전차), 기(騎, 기병) 4종의 등신대(等身大)다. 박물관 정원에는 고운 꽃으로 가꾸어 매우 아름다운 풍경이 먼저 외객을 반긴다. 길게 우람한 성벽 형상으로 늘어선 곳이 병마용갱이다. 그 외적 규모만으로도 병마용갱이 얼마나 큰 규모인지 짐작케 한다. 입구 있는 박물관 건물도 매우 웅장하고 크다. 가이드로부터 설명을 듣고 자유롭게 관람을 시작했다.
* 진시황릉 병머용갱 1호관
실내 전시관으로 입장하셔 가장 먼저 간 곳은 진시황릉 병마용갱 1호관이다. 병마용갱은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호갱은 당시 농민이 처음 발견한 것이고, 후에 2, 3호갱이 발견되었다. 1호갱은 세 곳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동서 길이가 약 230m, 남북으로 약 62m로 총 면적이 12㎢ 정도입니다. 1호갱은 동서 쪽을 향한 긴 모양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되어있고, 2호갱은 면적이 약 6000㎡이며,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1호관은 4천 평으로 제일 크다. 매우 넓고 병사가 많다. 대개는 1호관, 3호관, 2호관 , 박물관 순서로 관람한다. 가이드는 1호관에만 함께 들어와 약간의 설명을 해주었다. 병마용갱에서는 아직도 발굴 중이다. 직원들이 많이 나와서 일을 한다. 작업장 한쪽에 인부들이 있다. 인산인해다. 청정이 높다. 끝부분은 미개봉이다. 미개봉 부분 중에서 첫 부분은 10년 후에나 볼 것이다. 다음 도막은 20년 후에나 볼 수 있단다. 조각 조각 붙여서 완성한다. 발굴하여 원상 복원한 것들을 줄 지어 전시해 놓았다. 크고 높은 지붕의 건물 안에 진시황의 병사들과 병마들이 엄청나게 많은 규모로 구덩이에 열을 지어 늘어서 있다. 사람들 또한 엄청나게 많아 가까이에서 관람하기 힘든다. 서서히 인파가 빠져나간 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진시황릉 병마용갱에서는 제1호 병마용갱이 가장 큰 규모다. 제1호 병마용갱은 중앙 관람대에서 관람하는 것이 가장 좋다. 중앙 관람대 바로 앞에는 3줄로 보병의 도용이 세워져 있다. 무기는 물론 없고, 투구도 쓰지 않은 도용이지만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각기 조금씩 다른 얼굴 표정과 머리 모양 등을 보면 신기하다. 그 뒤쪽으로는 보병과 병사들을 지휘했던 간부, 기마병과 말이 세워져 있다. 한눈에도 각기 다른 역할을 담당하는 병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용들은 너무 많아 처음 본 순간에는 모두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얼굴 크기와 표정은 물론, 머리 모양과 손동작 하나까지도 제각각이다. 좌우 끝에는 옆을 바라보고 있는 도용들이 세워져 있으며, 기마병들의 말도 규모에 따라 3~4마리씩 배치되어 있다. 제1호 병마용갱 뒤쪽 끝에는 대규모 병사들을 지휘했던 장군과 말이 배치되어 있다. 튼튼해 보이는 갑옷을 입은 장군은 얼굴은 물론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훨씬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장군의 말도 기마병의 말에 비해 크다. 당시 진시황의 권력과 위엄을 느낄 수 있는 병마용은 그 수가 무려 8000~1만여구로 추정된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병사들 하나하나의 얼굴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상식으론 불가능할거라 생각한 것이 우리의 눈 앞에 존재하기에 이 병마용이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선정됐을 것이다.
죽은 진시황을 지키는 진시황 병마용들이 충성스런 모습으로 열을 지어 서서 재현되어 있다.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불멸의 생을 꿈꿨던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갖추고 있으며,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진시황릉에서 북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고, 그제서야 세상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중이다.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견되었으며, 700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과 100개가 넘는 전차, 40여필의 말, 10만여 개의 병기가 발굴되었다. 병기들 대부분이 실제무기이며 현재는 창고에 보관 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도용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 스타일을 갖고 있어 그 섬세함이 대단하다.
병마용갱,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지정되어 있다. 중국 산시성의 성도인 시안(西安)은 약 3000년의 오래된 역사를 지닌 도시다. 역사상 서주, 진, 서한, 신망, 동한, 서진, 전조, 후진, 서위, 북주, 수, 당 등 역대 13개 왕조가 이곳 시안을 도읍으로 삼았다.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와 육국을 통일한 진시황, 항우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한 고조도 이곳에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 그리스 아테네, 이탈리아 로마, 이집트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古都)로도 꼽힌다. 시안은 우리에게 당나라의 장안(長安)으로도 알려져 있다. 당시 당나라는 세계 최강 제국으로 인구가 200만 명에 육박했을 정도로 번성했다. 온 세계에서 사신과 상인들이 몰려드는 국제도시였고, 외국에서 방문하는 사신만 해도 연간 수천 명에 달했다. “구중궁궐 대문이 활짝 열리니, 만국 사신들이 황제에게 절을 올리네.” 당나라 전성기인 8세기에 활동한 시인 왕유가 수도 장안을 묘사한 시구다. '장안의 풀로 태어나는 것이 변방의 꽃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던 도시가 바로 시안이다. 시안은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과 같다. 중국의 첫 통일왕조인 진나라 시황제 때 만들어진 병마용갱을 비롯해 당나라 측천무후 때 세워진 대안탑, 당 현종과 양귀비가 노닐었던 화청지 등이 도시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들 유적 가운데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병마용갱과 진시황릉이다. 병마용갱의 발견은 우연이었다. 1974년 3월29일 시안시 외곽, 양신만이라는 사람은 우물을 파다가 ‘쨍’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소리가 이상해 땅을 더 파고 들어가니 토기 파편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그가 발견한 것은 바로 진시황의 병마용 종장갱으로 부장품을 넣어둔 구덩이였다. 2200년 동안 땅속에서 잠자고 있던 진나라 대군들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1976년 1호갱의 북쪽에서 2호갱과 3호갱이 연이어 발견된다. 1~3의 숫자는 발굴 순서에 따라 붙인 것으로 가장 큰 1호갱은 길이 230m, 너비는 62m에 이른다.
1호갱에 들어서면 그 규모에 압도당한다. 정면을 바라보며 도열해 있는 6000여 기의 병사들 앞에 서면 아, 하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조각 하나하나의 표정이 제각기 다르고 생생해서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 병마들은 그 옛날 한, 위, 초, 연, 조, 제 등의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진시황제의 정예부대들이다. 병사들은 모두 전방을 향해 서 있는데, 특이한 점은 이들의 손에는 무기가 없다는 것. 한나라 항우가 진나라를 침범했을 때 무기를 모두 가져가 자신들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병마용의 배치와 배열은 중국 고대 병종의 배치 및 병기장비, 전략과 전술을 잘 보여주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매우 크다고 한다. 1호갱에서 20m 떨어진 곳에 있는 2호갱은 보병, 기병, 궁노수, 전차 등 각종 병과가 모두 모여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1호갱과 마주한 3호갱은 지휘부대가 회의하는 모습의 병마들이 있다. 병마용갱 앞에는 발굴품을 전시하는 진시황병마용 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유명한 청동마차도 보관돼 있다. 진시황 사후 2200년이 지나 발견된 것으로 네 마리 말이 끄는 이 마차는 발굴 당시 완전히 깨진 상태였는데, 1980년부터 8년간에 걸쳐 1000여 개에 달하는 조각들을 이어붙여 복원했다고 한다. 크기는 실물의 절반 정도인데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을 보면 당시 주조기술의 높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병마용갱의 발견은 중국을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세계 각 나라의 지도자들도 병마용을 관람했는데,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은 1978년 병마용을 관람하고는 '현존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가 진시황 병마용의 발견으로 인해 8대 불가사의가 됐다'며 '피라미드를 보지 못했으면 진정으로 이집트를 여행한 것이 아니고, 병마용을 보지 못했다면 진정으로 중국을 여행한 것이 아니다'고 극찬했다. 실제로 내가 본 바로도 그랬다. 상상햇던 것보다. 한국에서 듣던 이야기보다. 자료에서 보아오던 것보다 훨씬 웅장하고 그 사료가 잘 보존되어 있다. 병마용들에게서 진시황과 그 당시의 사회상과 풍조 등을 여실히 배우게 된다. 죽기 전에 꼭 와 봐야 할 곳에 왔다는 것이 참으로 대견하고 흐뭇하다.
* 진시황릉 병마용갱 공원
진시황릉 병마용갱 1호관에서 일행들이 츹어져 각자 관람을 했다. 우리 부부는 주요 전시실은 1호관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서 오래 머물며 더 많이 보고 나왔다. 들어간 문이 아니고 그반대쪽의 문으로 나오게 되엇다. 바깥으로 나오니 휴식 공원이 있다. 푸른 나무숲과 벤치가 아름다워서 잠시 의자에 앉아서 휴식했다. 그 옛날 이곳은 석류나무 밭이었단다. 그 석류나무 밭 밑에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이곳 병마용갱을 발견한 것이다. 잔디 공원도 조성해 놓았다. 진시황은 이렇게 변한 풍경을 보면, 자신의 지하 세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을 보면, 무어라 말할까. 참으로 세월의 무심함이 배어 있는 애련한 공원이다.
* 진시황릉 병마용갱 2호관
진시황릉 병마용갱 1화관에서나와 공원을 거쳐 간 곳은 2호관이다. 현재 2호갱은 발굴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전시되어 있다. 2호관은 약간 넓다. 발굴 중이다. 오늘도 2호관 한쪽 구석에서 사람들 여럿이 모여 불을 켜고 작업모자를 쓰고 발굴작업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시안의 병마용은 진시황의 사후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져 진시황릉의 갱 안에 오랜 기간동안 묻혀 있었다. 1974년 우물을 파던 한 광부에 의해 발견돼 시작된 발굴작업은 현재까지도 아직 땅 속에 묻혀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병마용들을 위해 계속되고 있다. 2호관은 확실히 규모가 작고 아담하다.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자세히 보니 도자기와 용사, 말 등의 쓰러지고 깨어져 망가진 형상들이 진흙 속에 막혀 있다. 그 예날의 물픔들과 사람들, 말들이 엉켜 있다. 그리고 곳곳에 발굴하려고 진행하는 현장이 그대로 놓여 있다. 이곳의 땅을 파면 저런 유물들이 나온 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그 당시 진시황의 거대한 권력과 위엄을 상상해 볼 수 있는 현장이다.
* 진시황릉 병마용갱 3호관
3호관은 아직 미발굴 상태이고 면적이 좁다. 3호갱은 면적이 520㎡으로 凹모양이다. 발굴 된 병마용들은 소규모로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역시 현재까지도 발굴 작업이 진행중이다. 학자들은 발견된 3개의 갱 외에도 진시황릉 근처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더 많은 병마용갱이 묻혀 있을 거라고 보고있다. 이렇게 진시황릉의 병마용갱을 모두 관람하고 나왔다. 중국의 거대한 역사 유적지다. 이것이 서안을 먹여 살린다는 것은 과언이 아니다. 유적지에 서린 역사도 대단하고, 그뮤모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고, 또한 잘 보존된 것에 대하여 놀랍다. 우리 나라 어느 곳에 이런 유적 하나 없을까, 상상해보며 참으로 부러운 유적이다.
* 진시황제 병마용갱 유적 박물관
진시황릉 병마용갱 1호관에서 3호관까지 관람한 후 곁에 있는 박물관 큰 건물로 갔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마크가 문앞의 벽면에 새겨 놓았다. 박물관 1층에는 진시황릉 관련 박물관이고, 2층에는 도예품이 있다. 무덤에서 출토한 청동기마상도 있다. 말이 네 마리였다. 무덤에서 출토된 물품과 무덤을 재현하여 자료들을 잘 모아 보존하는 소중한 박물관이다.
* 중국 서안 진시황제릉 박물관
진시황릉 병마용갱을 모두 관람하고 나와 이곳에서 제공해주는 셔틀버스로 진시황릉 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진시황은 생시에 꽃을 좋아했던가. 이곳에도 정원에 고운 꽃을 가꾸어 놓아 아름답다. 죽어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 거하면 행복할 듯하다. 박물관에 입장하여 가이드로부터 이곳의 위치와 진시황릉에대하여 설명을 들었다. 이곳 지역은 중국에서 중시이 되는 아주 중요한 위치라는 것도 알려준다. 진시황은 선견지명이 있던 훌륭한 임금이라고 전한다. 병마용갱 서쪽에 위치한 진시황제 때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병마용갱 주변에서 발굴된 주요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지요. 당시 사용했던 거울과 건축하는 데 사용했던 도구 등의 생활용품, 아름다운 회화와 조각, 서예, 마차까지 무척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것은 1980년 진시황제 무덤 서쪽 20m 지점에서 발굴된 두 대의 마차다. 1호와 2호 마차로 불리는데, 각각 4마리의 말이 끌고 있다. 진시황제가 전국을 순회할 때 탔던 마차를 모델로 만든 것으로 보고 있다. 실물 크기의 2분의 1로 축소해서 만든 것이다. 청동 위에 금과 은으로 도금하고 그 사이사이에 색을 칠해 놓은 채색 마차로, 최고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말은 높이 90cm, 길이 110cm에 무게가 170~190kg에 달하며, 말 4마리가 끌고 있는 청동 마차는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무겁고, 또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작은 1호 마차의 경우 자그마치 3064개의 부품을 연결하여 만들었고 2호 마차는 이보다 더 많은 3462개의 부품을 사용했다. 마차 하나를 만드는 데 이토록 많은 부품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이 마차들의 무게는 자그마치 1000kg이 넘는다. 우리는 지금 정원의 숲길을 걸어 진시황릉 무덤이라는 곳으로 간다. 이곳은 모두 석류나무 밭이었다. 진시황 족적을 따라 아름다운 길을 걸어, 걸어 들어간다.
* 중국 서안 진시황제릉
진시황릉은 석류밭 사이의 산이다. 한참을 걸어 들어온 곳에서 진시황의 무덤이라는 큰 산이 보인다. 진시황릉은 병마용갱에서 약 1.5㎞ 떨어져 있다. 이 무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한자와 유네스코 마크를 새겨놓은 거대한 바위가 있다. 그바위 바로 앞 주변은 관람하기에 좋도록 잘 다듬어져 있는 마당이다. 진시황릉을 중심으로 좌백호는 화산이고, 우청릉은 태산이다. 기원전 246~208년 36년에 걸쳐 70만 명이라는 대인원이 동원돼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76m, 동서 폭 345m, 남북 길이가 350m에 이르는 능 앞에 서면 마치 커다란 산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발굴이 되지 않아 그냥 멀리서 능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저녁 무렵이어서 석양이 산정에 드리우고 그늘이 점점 짙어져 진시황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솟구치는 분위기다. 남의 나라 제왕이지만 저 산속 어딘가에 그가 묻혓다고 생각하니 더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어서 산으로 나근 길을 따라 한동안 걸었다. 사람을 가고 없는데 세계인들의 그의 숨결을 찾아 목마른 횡보를 한다. 다음 여정으로 시간이 촉박하여 더 가까이 가 보지 못함이 아쉬웠지만 진시황 무덤 산자락 아래에 머물다 간다는, 나의 족적을 남기고 간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돌아서 나왔다.
진시황릉은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중국 산시성 린퉁현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시황제의 구릉형 묘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했던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의 무덤으로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의 거대한 능이다. 사마천이 저술한 <사가>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되어 중국 천하를 통일한 이후에는 70여 만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발사하는 비밀스러운 장치도 갖추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아직 발굴로 밝혀진 바는 없다. 능은 장방형의 두 겹의 담장으로 싸인 능원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쪽 담과 바깥 담의 사변 길이는 각각 2,525.4m, 6,294m이며, 현재는 지상에서는 능의 흔적을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담벽 아래에서는 도수도(陶水道), 능원 내외에서 3곳의 건축유지와 수많은 배장묘와
순장묘가 발굴되어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가 확인되었다. 특히 능원 동문 밖의 거대한 병마용갱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었고, 능원 밖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형도묘는 건설 당시의 가혹한 강제노역의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진시황은 세계의 역사를 바꾼 100명의 위인 중 한명이며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릉이다. 능묘는 37년간이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의 둘레가 6㎞, 높이는 40m에 달합니다. 무덤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야산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내부는 개발이 되지 않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고 해도 내부는 볼 수가 없다. 진시황이 무덤을 설계할 때 훗날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은 등을 이용한 여러 가지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그 비밀을 풀 수 없어 과학이 조금더 발전하여 그 비밀을 풀 수 있을때 발굴 한다고 한다. 따라서 진시황릉까지 간다고 해도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 사진 촬영을 하거나 릉 위에 오르는 정도의 관광을 할 수 있다. 요새는 릉 주변을 아름다운 공원으로 만들어 미니 전동카나 마차로 릉 주위를 돌거나 공원 주변에 전시해 놓은 옛 유물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아방궁(阿房宮)은 중국 진시황제가 세운 궁전으로, 규모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동서 700m, 남북 약 120m에 이르는 2층 건물로 무려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건설 당시에는 죄수 70만명이 동원됐다고 하며, 진시황제의 생전에는 완성되지 못하고 2세 황제에 의해 걸쳐 완공됐다. 그 이후에 불에 타 지금은 기초부분과 일부 흔적만 남아있지만, 아직까지 그 당시의 거대함과 웅장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굉장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다. 말이나 마차를 타거나 무기를 지닌 병마용들은 형상이 사실적이어서, 당시의 의복과 무기 등의 형태와 구성, 시황제의 사상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진시황제는 열세 살에 왕위에 올라 영정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었지만 그의 야망은 웅대하여 왕위에 오른 지 16년이 되자 본격적으로 주변 국가를 하나씩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30년, 국력이 가장 약한 한나라를 공격하고 곧이어 조, 위, 초, 연나라를 정복했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는 막강한 국력을 갖춘 제나라를 점령하면서 불과 9년 만에 주변의 여섯 나라를 정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완성하였다. 영정이 주변 나라를 침략하는 데 동원한 군사는 백만 명이 넘었다. 또 장군과 지휘자들이 사용했던 말도 만 필이나 되었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백만 명의 군인이 있는 나라는 미국과 중국, 러시아 정도가 전부다. 그런데 2200여 년 전에 군사 백만 명을 이끌고 정복 전쟁을 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지만 영정의 군대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기록에 의하면 단 한 차례 전투에서 적군을 4만 명이나 몰살시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천하를 통일한 영정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새 칭호가 필요했다. 작은 진나라 왕에서 통일 국가의 왕이 된 영정은 자신을 ‘황제’로 칭하고, 새로운 대국의 왕을 의미하는 진시황제로 부르도록 했다. 오늘날 중국의 영어 명칭인 차이나(China)도, 바로 진(Chin)에서 비롯되었다. 통일 국가를 완성한 진시황제는 서둘러 새로운 정책을 세웠다. 진시황제는 봉건주의를 무너뜨리고 전국을 쉽게 다스리기 위해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세우는 데 집중했다. 전국을 군현으로 개편하고 자신의 지시가 빠른 시간에 전국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행정 조직도 개편했다. 또 관료는 물론이고 백성들에게도 이전에 사용하던 여러 문자체를 쓰지 못하게 하고 비교적 단순한 예서체만 사용하도록 했다. 문자를 통일하여 많은 백성들이 보다 쉽게 학문을 접할 수 있게 만든 동시에 중앙 정부의 뜻을 곧장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한 일이었다. 그리고 복잡했던 도량형을 표준화시키고, 마차 바퀴의 모양도 통일시켰다. 문자와 도량형의 표준화는 진나라는 물론이고 이후 중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진시황제는 정책 개편에 이어 대규모 공사를 시작했다. 만리장성 건설을 시작으로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하여 관개 시설을 고치고, 변방과 수도 시안(당시 장안)을 연결하는 도로와 운하를 건설했다. 또한 황제가 살 아방궁과 죽은 뒤 묻힐 묘지까지 공사를 했다. 진시황제는 시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7km 지점에 자신이 죽은 뒤 묻힐 안식처를 짓기 시작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7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10년 넘게 공사를 했다고 한다. 진시황릉은 인공으로 만든 묘지라기보다 산처럼 보인다. 한 면이 400m가 넘고 높이가 76m에 이르러, 현존하는 단일 무덤 가운데 가장 크다. 한 세기 뒤에 기록된 책에 따르면, 무덤 안에 ‘아름다운 가재도구와 보석, 진귀한 물건뿐 아니라 궁궐과 탑, 관청 건물까지 세워져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000년 넘게 전해지던 소설 같은 이야기는 1932년 묘지 주변에서 일하던 농부들에 의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농부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인형을 발견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같은 모양의 인형 4개가 잇따라 발견되었어다. 이후 40여 년 동안은 특별히 발견된 것이 없다가 다시 관심이 집중된 것은 1974년이었다. 진시황릉 근처의 들판에서 우물을 파던 농부들이 흙을 빚어서 만든 170~190cm 정도 크기의 인형을 발견했다. 과거에 황제를 호위하던 병사로 진시황제가 죽기 전에 미리 지하에 묻어 둔 것이다. 이후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많은 유물이 동시에 발굴되면서 전 세계의 관심이 진시황릉 근처의 들판에 쏠리게 되었다.
아직 발굴을 시작하지도 못한 진시황제의 능을 비롯하여 거대한 성곽 유적지와 당나라 때 건설한 양귀비의 흔적으로 가득한 화청지,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을 보존해 놓은 쯔언사 다옌탑 등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최고의 문화 도시 서안은 중국 고대 문명을 알 수 있는 문화의 보고다. 진시황 지하궁전도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가지 않는다. 아직 발굴하지 못해 볼수 없는 진시황릉의 지하 내부 모습을 여러 문서자료와 현대과학기술을 동원하여 탐구 분석한 결과에 근거하여 재현해 놓은 모형전시관이다. 지하궁전은 진시황릉을 가상으로 꾸며놓은 곳이다. 진시황릉을 아직 발굴하지 않고 있기에 예상하여 만들어 놓은 곳이다. 서안은 진시황으로 인해서 세계의 수많은 발걸음이 모이는 도시다. 우리 부부는 이토록 어마어마한 중국의 역사 한 담면을 생생하게 보고 가는 것에 대하여 매우 보람되고 뜻깊은 여정이라고 서로 동감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잘 선택한 여행지다.
* 중국 서안 진시황릉 입구 석류 장사
진시황릉 박물관 바로 앞 길거리 곳곳에 석류 장사들이 줄지에 늘어서 있다. 여기뿐만 아니라 서안 여행하면서 석류를 파는 장면을 참 많이 보았다. 한국의 사과처럼 석류를 판다. 이곳의 석류는 한국의 사과격이다. 석류를 비닐 봉지로 싸서 판다. 나는 처음에는 몰라서 왜 사과를 비닐붕투에 한 개씩 넣어서 팔까 의아했었다. 서안의 석류는 수출하지 않는다. 자체소모가 가능해서란다. 모두 진풍경이다.
* 중국 서안 화청지 공원
진시황릉을 떠나 이제 화청지에서 장한가 쇼를 보기 위해 화청지 주변으로 이동한다. 버스에서 하차하여 먼저 화청지 공원을 걸어서 석식식당으로 간다. 식당 가는 길에 본 공원은 참으로 여러 가지 전시물들이 있다. 시가지 도로변에도 단 현종과 양귀비의 동상을 높이 세운 조형물의 공원이 보인다. 그 옛날의 토담이 길게 늘어서서 공원을 빛낸다. 토담 길을 따라 걸어서 식당으로 갔다.
* 중국 서안 화청지 공원 곁 채선당 석식
화청지 주변에 있는 채선당 식당에서 샤브샤브 요리로 석식을 했다. 현지 중국인에게도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는 중국식 훠궈(火锅) 전문점이다. 깔끔한 인테리어는 물론 요금 대도 그에 비해 높은 편은 아니며, 6시 이후 예약 없이 방문할 경우 1시간 이상 대기는 생각하고 가야 할 정도라고 하니 그 인기를 실감나게 하는 대목이다. 신선한 재료와 함께 맛도 매우 훌륭한 편인 중국식 전통 샤브샤브 전문점 채선당에서는 찍어 먹을 소스는 셀프지만 종류가 20가지 이상으로 다양하게 먹을 수 있다. 음식 재료 종류가 정말 많다. 테이블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한국인에게도 잘 맞는 신선한 채소와 고기, 두부, 여러 종류의 버섯, 무, 파 등 20가지 이상의 메뉴를 무한정 제공한다. 음료까지 무료다. 맛있게 잘 먹었다. 식사를 하고 나오니 어느새 바깥에는 진한 어둠이 서러있다. 식당 앞에는 기념품을 파는 젊은 여인도 있고, 주변의 고풍스런 건물이 은은한 불빛 조명에 그윽한 옛 풍경을 자아낸다.
* 중국 서안 화청지 장한가쇼 화청지 곁에 있는 채선당 식당 2층에서 석식 후 장한가쇼를 관람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화청지에 귀빈용 문으로 입장했다. 장한가쇼는 세계 10대 쇼 중 하나이며 중국 6대 쇼 중 하나다. 화청지 입장문 앞에는 2천 명 이상이 관객이 길게 줄을 서 있다. 화청지 장한가의 객석은 2800석이다. 입장료가 상석은 19만원이다. 우리 일행 좌석은 4번 째 열로 가이드가 미리 예매했다. 우리 좌석은 중앙이다. 양쪽 좌우에도 좌석이 있다. 낮에 왔을 때는 평지였는데 좌석이 땅에서 솟아 올랐다. 낮에 본 연못 앞에 무대를 설치했다. 그러니까 화청지 연못 앞의 땅 속에는 지금 객석의 장치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침으로 기막힌 연출이다. 공중에도 줄을 매어 놓았다. 산 위에 기와집들이 보인다. 산에 총총 별이 떠 있고, 달 등이 설치되어 있다. 장한가는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 이야기다. 중국 당대의 시인 백거이가 젊은 시절에 지은 서사적인 장가 '장한가'를 가무쇼로 제작한 것이다. 제재는 현종 황제와 양귀의 비련에 관한 것이며, 4장으로 되었다. 제1장은, 권력의 정상에 있는 황제와 절세가인 양귀비의 만남과, 양귀비에게 쏟는 현종황제의 지극한 애정 등을 노래하였다. 제2장에서는, 안녹산의 난으로 몽진하는 길에, 양귀비를 어쩌다 죽게 한 뉘우침과 외로움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제3장은, 환도 후 양귀비의 생각만으로 지새는 황제를 묘사한다. 제4장에서는, 도사의 환술로 양귀비의 영혼을 찾아, 미래에서의 사랑의 맹세를 확인하게 되었으나, 천상과 인계(人界)의 단절 때문에 살아 있는 한 되씹어야 할 뼈저린 한탄이 길게 여운을 끈다. 장한가무쇼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꽃피웠던 오리지널 궁전터인 '화청지'에서 펼쳐지는 야외공연으로, 뒤로는 여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화청구룡호를 무대로 삼은, 중국최초의 대형 역사가무쇼다. 3000여명의 전문연원들이 당현종과 양귀비의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를 양정상열, 시총이교, 생리사별, 산경중봉 등 4파트 11막으로 구성하여 예술적으로 표현한 공연이다. 중국의 고도 서안은 예로부터 장안이라고 불리웠는데 인류문명과 중화민족의 발원지중의 하나이다. 오늘의 서안은 고대문명과 현대문명이 서로 융합되고 옛성구와 신성구가 각자의 매력을 뽐내며 인문자원과 생태자원이 서로 의지하는 국제화 대도시이다. 장한가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창작한 실경 역사뮤지컬이다. 이는 당나라때의 시인 백거이의 장헌가를 각색한 당현종과 양귀비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담고있다. 양귀비는 당나라 현종의 비다. 절세미인에 총명하여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황후 이상의 권세를 누렸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 도주하던 중 살해되었다.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에 양녀가 되었다. 양아버지의 임지인 사천성에서 자랐다. 17세 때 현종의 왕자의 비가 되었다. 현종의 무혜비가 죽자,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었다. 물색하던 중 수왕비 옥환이 절세의 미녀라는 소문을 듣고 황제가 온천궁에서 그녀를 보고 총애를 받게 되었다. 현종은 수왕에게 새로운 여자를 아내로 주었고 옥환을 태진이란 이름의 여도사로 삼고 현종 가까이에 두었다. 궁중에 들어오자 6년만인 27세 때 정식으로 귀비로 책봉되었다. 양귀비는 다년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이 난 황제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세 자매까지 한국, 괵국, 진국부인에 봉해졌다. 또한, 6촌 오빠인 양소는 품행이 나쁜 인물이었으나 현종에게서 국충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이외 양씨는 많은 친척이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하였다. 그녀가 남방 특산의 여지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히 말을 보내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다. 755년 그녀의 친척 오빠인 양국충과의 반목이 원인이 되어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 귀비등과 더불어 사천으로 도주하던 중 장안의 서쪽 지방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호위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현종에게 양귀비의 목숨을 요구하였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양귀비는 군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정사(正史)도 그녀를 절세의 풍만한 미인인데다가 가무에도 뛰어났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백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다. 백거이는 구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으로 하여 <장한가(長恨歌)> 노래한 바와 같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현종은 당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712∼756). 안으로는 민생안정을 꾀하고 경제를 충실히 하였으며, 신병제를 정비하였다. 밖으로는 국경지대 방비를 튼튼히 하여,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노후에 도교에 빠졌으며 양귀비로 인해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였다. 그는 심복 장병을 인솔하여, 위황후와 안락공주 일당을 제거한 뒤 아버지 예종을 제위에 옹립하고 자신은 황태자가 되어 실권을 잡았다. 28세에 마침내 예종의 양위로 즉위하였다. 당시 그와 대등한 권세를 가졌던 태평공주 일파를 타도하여, 측천무후 이래 반 세기에 걸친 부인의 정권 개입을 근절시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현종의 치세는 수십 년의 태평천하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자 정치를 등한히 하고, 도교(道敎)에 빠져 막대한 국비를 소비하였다. 특히 자신의 며느리이자 35세나 연하인 양귀비(楊貴妃)를 궁내로 끌어들인 뒤 정사를 포기하다시피 하였다. 국정은 권신 이임보가 대신 맡아보게 하였다. 755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 사천으로 난을 피해 가던 도중에 양귀비는 호위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이듬해 아들 숙종에게 양위하고 상황으로 은거하였으며, 장안으로 돌아온 뒤 죽었다. 그는 다재다능하였으며, 특히 음악에 뛰어나 스스로 작곡까지 하였다. 서도에도 능하여 명필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저녁 어두운 밤에 화청지에서 열리는 뮤지컬 장한가는 대단했다. 현종과 양귀비의 애절한 사랑을 담은 내용도 아름답고, 장엄한 무대장치와 여산에 설치한 별치들, 다, 기와집 등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나게 큰 규모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소설 장한가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니 문학성도 잠재되어 있어 시인인 나에게는 더욱 큰 감동이었다. 출연자들도 많고 모두가 거대한 스케일의 뮤지컬을 공연한다. 화청지 뒤쪽에 자리한 여산을 배경으로 여산과 화청지의 모든 건물들이 무대가 된다. 300명이 넘는 배우들의 화려한 의상과 군무가 관람객의 시선을 고정 시킨다. 차가운 물 위에서 춤을 추는 장면도 있다. 현종과 양귀비가 방안에서 사랑하는 훈훈한 장면은 아름다웠는데 양귀비가 죽고 현종이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은 가슴 시린 비극이었다. 거의 미친 사람처럼 열연하는 출연자가 서늘하도록 슬픈 감동을 주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오작교를 이어 견우직녀가 만나듯 현종과 양귀비가 만나는 장면에서는 목이 메어왔다. 사랑은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작업이며, 나이를 초월한 영혼의 갈망임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나는 간간이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촬영했다. 두고두고 보고 싶은 장한가쇼이기에 눈과 가슴에 담고도, 사진에 동영상에 담아간다. 가슴저리도록 아름다운 사랑, 그리고 영혼으로 연출하는 출연자들의 장면 하나하나에 뜨거운 찬사의 박수를 보낸다.
이 작품에서는 변화무쌍한 서사의 사이사이로 사랑의 기쁨, 외로움, 괴로움 등의 서정이 섬광처럼 번쩍이며, 외길 사랑으로 탄식만 해야 하는 현종이 새로이 창조되어 인간으로서의 사랑의 비중을 역력히 상징한다. 노래의 형식도 칠언이어서 유창하고 아름다운 가락이 감겨들며, 행마다 리듬이 박동하고 때로는 각운을 바꾸어 가면서 장장 120행에 걸쳐 선율이 흐른다. '동자해음장한곡'이라는 말이 있듯 무수한 사람들이 이를 애창하였으며, 시가와 소설과 희곡으로 취급되어 중국 근세문학사상 무한한 제재를 제공하였다. 특히 <장한가전(傳)>은 이 시의 내용을 이야기체로 바꾸어 보라는 백거이의 권유로 진홍이 지은 전기소설이며, 양귀비의 입궐에서부터, 그녀가 죽은 후 현종의 명을 받은 방사가 그녀의 영혼을 만날 때까지를 <장한가> 그대로 답습하였다.
2017년 10월 18일 수요일 화산 북봉 등정, 전신마사지
* 중국 서안에서 화산 가는 고속도로
오늘은 서안에서 화산으로 간다. 오늘은 중국 19차 당대회를 9시에 북경에서 개최한다. 1주일간 열린다. 아침 중국 티브이 뉴스에 크게 나왔다. 1921년에 1차로 열렸다. 서안에서 화산까지는 120Km로 2시간 30분 소요된다. 고속도로를 달려서 간다. 안전벨트를 꼭 매야 한다. 매지 않으면 운전기사가 4만원 벌금을 내야 한다. 중국은 대통령 임기가 10년이다. 공산당이 97년 유지하고 있다. 가이드는 이번 우리 여행이 '중국을 제대로 알고 가기' 여행이라고 타이틀을 붙여준다. 당대회는 주로 지방 개발에 대하여 발표한다. 국회의원 격의 참석자가 8천석이다. 서안 인구는 1100만명이다. 그 중에서 만1천명이 서안 주민이고, 1백만 명이 외지에서 들어온 주민이다. 기차역이 5개 있다. 대학은 73개 있다. 릉이 131개 있다. 박물관이 110개 있다. 중국 내 한인이 183만 명이다. 가이드는 여러 가지를 가르쳐준다. 건강수칙으로 3가지를 말한다. 긍적적인 마음, 걷기 운동, 검은 색 음식을 소개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약간 전해준다. 모택동은 83세에 사망, 장개석은 76세에 사망, 등소평은 93세에 사망했단다. 한국인은 음식이 좋고 운동을 많이 하는데 급한 마음이 조금 나쁘다고 한다. 지금 서안에서 화산으로 가고 있는데 고속도로 중앙분리대가 나무 숲이다. 시원하게 전개되는 고속도로를 달려가며 중국의 자연풍경을 본다. 이것도 세계여행에서 중요한 탐방이다.
* 중국 화산 매표소 입구
버스에서 하차하여 국제호텔에서 중식을 했다. 화산 입구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화산국제호텔은 최근에 오픈한 준 5성급 호텔이다. 특히 한국인 매니저가 관리하고 있어 종업원들이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것이 특징이다. 매콤한 물고기 요리, 한국 김치, 고기 야채, 차고버섯 요리, 목이버섯 고기볶음, 건두부 야채, 닭고기 탕을 최대한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 한국 주방장이 요리하여 제공한다. 그래서 정말 모든 요리가 우리 입맛에 잘 맞고, 아주 맛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버스를 타고 화산으로 가는 셔틀버스로 타는 곳으로 이동했다. 셔틀버스 타는 곳에서 가이드가 화산 입장권을 사오는 동안 기다리며 화산 기념물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휴식했다. 그리고 셔틀버스로 15분 간 이동하여 화산으로 간다. 점점 맑은 계곡물이 흐른다. 아찔한 수직 바위 절벽산 옆으로 지나간다. 이것이 화산의 시작이라고 예고하듯 전개되는 비경이다.
* 중국 화산 북봉 케이블카로 등정 셔틀버스가 화산 북봉 케이블카 승차장에 내려준다. 케이블카 승차장에서 6명~4명씩 탑승한다. 우리 부부는 5명이 함께 탑승했다. 탑승 후 화산으로 케이블카가 올라간다. 점점 높이 올라가면서 운무 깔린 풍경을 선사한다. 케이블카가 연달아 왕복으로 운행하고 있다. 저 아래로 아득한 화강암 바위 절벽산이 전재된다. 기막히고 아슬한 비경이다. 10분 정도 올라가는데 어떤 구간에서는 아찔한 바위절벽산 옆을 지나가며며 아찔한 두려움으로 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천길 낭떠러지의 꿈 속 같은 공중에 오직 케이블카에 목숨을 매달고 우리는 화산으로 오르고 있다. 저 아래로 우리의 버스가 정차하고 있는 주차장도 보이고, 우리가 승차했던 케이블카 승차장도 보인다. 점점 산정으로 다가가고 있다. 운무가 산을 휘감아 모든 걸 감싸 안는다. 화산은 중국 오악(五岳) 가운데 한 곳이다. 오악은 중앙의 숭산, 동쪽의 태산, 남쪽의 형산, 북쪽의 항산 그리고 서쪽의 화산을 일컫는다. 중국의 섬서성 남쪽 진령산맥에 위치해 있다. 서안의 동쪽으로 약 120 km 지점에 있다. 화산은 중국의 오악(五岳)중 서악(西岳)에 속하는 명산으로 다섯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악 중에서도 높이는 가장 낮지만 산세가 가장 험난하다. 보통의 산들이 흙과 암석으로 이뤄졌다면, 화산은 오로지 화강암으로만 되어 있어, 큰 바위 덩어리 하나가 거대한 봉우리를 이루고, 산 전체를 이루고 있다. 빛을 받으면 눈부시게 빛난다하여, 빛날 화(華)자를 써서 화산이라 불리며, 험준한 자연경관과 좁은 통로, 가파른 바위, 높은 산등성이 등반으로 유명하다. 현재 북봉과 서봉에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어, 보다 쉽고 편안하게 화산에 오를 수 있다. 서봉상행 후 북봉하행 완주코스의 특징은 상행탑승시, 거대한 화산 암석체를 가까이서볼 수 있다. 서봉에서 북봉까지 내리막길 이동이라 체력적인 부담이 적으며, 다양한 전망포인트에서 화산 경치를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서봉상행 후 북봉하행 완주코스는 총 4시간 소요된다. 풍경구 입구에서 셔틀버스로 약 40분 이동힌 곳에서 서봉상행 케이블카를 탑승하여 약 25분 간 오른다. 서봉케이블카 하차하는 곳은 서봉 2080m 지점이다. 서봉에서 중봉까지는 직선연결로 금쇄관, 오운봉, 창룡령, 기념정을 지나 북봉 케이블카 탑승직에 도착한다. 서봉에서 이곳까지는 편도 2시간 30분 소요된다. 북봉하행 케이블카를 탑승하여 약 15분간 내려온다. 하산한 그곳에서셔틀버스로 약 10분 이동하여 화산 입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서안 시내로 이동하는데 약 2시간 30분 소요된다. 화산(華山)은 중국의 5악 중 한 곳으로, 산세의 웅장함이 으뜸인 데다 험준함이 중국 5대 명산 중 최고라 '기험천하제일산(寄險天下第一山)'으로 불린다. 세계적인 탐험가들이 즐겨보는 '죽기 전에 보아야 할 자연절경 1001' 도서에도 등재될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중국인들에게 화산은 중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무협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화산파(派)'의 본거지인 화산은 그 자체 이름만으로 아드레날린을 용솟음 치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불린다. 중국인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중화(中華)’의 ‘화’가 바로 이 화산의 ‘화’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오악 중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제일 높고 산세가 험해 오래전부터 무림 고수들과 수행자들이 즐겨 찾은 곳이다. 도교 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한 화산에는 총 21개의 도교 유적지가 있다. 산 아래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셔틀버스를 타면 케이블카 입구로 갈 수 있다. 6명이 꼭 붙어 앉으면 꽉 찰 정도로 작은 케이블카를 타면 거의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정상으로 올라간다.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감히 창밖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아찔하지만 경치만큼은 태어나서 다시 보지 못할 절경이다. 높이 2,437m의 험준한 바위산으로 조양봉(동봉, 2,090m), 낙안봉(남봉, 2160m), 연화봉(서봉, 2,080m), 운대봉(북봉, 1,614m), 옥녀봉의 다섯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으며, 험준한 산길과 가파른 계단길, 철난간이 걸려 있는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곳을 지나 산정에 이르면 위하평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우리 일행은 원래 계획은 화산 서봉으로 등정하여 북봉으로 하산하려고 했다. 그런데 일행 대부분이 연로하고, 몸이 불편한 사람도 있어서 서봉에서 북봉으로의 하산 코스 중에 가파른 계단이 여러 곳 있다하여서 코스를 바꾼 것이다. 수월한 북봉 으로 등정, 북봉으로 하산하는 코스다. 높이도 서보은 2080m고, 북봉은 1610m다. 모든 조건이 수월한 코스다. 나 역시 이 코스가 마음에 들었다. 북봉 케이블카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가파른 곳을 지나갈 때는 오금이 저릴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중국의 오악 중 하나의 산에 지금 오르고 있음에 그저 감사하고 행복하다.
* 중국 화산 북봉정상 등정
케이블카로 화산에 올라와 하선하였다. 그곳에서부터 걸어서 화산의 계단을 걸어서 산정으로 오른다. 아주 가파른 게단도 있다. 오금이 저리도록 급경사 계단이다. 원래 우리는 서봉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북봉으로 걸어와서 북봉 케이블카로 하산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봉에서 북봉으로 오는 산길이 험악하여서 다시 조정한 것이다. 북봉으로 등정하여 북봉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젊은 사람들은 지장 없지만 아니든 사람들에게는 오르내리기 힘든 급경사의 화강암 바위 계단이 많아서 그렇다. 계단을 설치한 것이 아니고 화강암 한 덩어리로 탄생된 화산은 거의 모든 계단이 화강암 바위산을 깎아서 만든 것으로 그 폭이 좁고 간격이 높다. 나 역시 그런 험악한 계단의 산길을 어려워서 북봉으로 왕복 등정을 원했다. 우리 부부 외에도 대부분 일행이 노인들이어서 모두 이 코스를 찬성하였다. 북봉 정상으로 가는데 어느 길목에서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서봉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북봉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 부부는 북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오르는 길목에는 견과류를 파는 가게도 있고 화장실, 쉼터, 절 등의 건물이 있다. 고사목과 큰 바위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더 가파른 계단으로 오르니 북봉의 최정상에 다다랐다. 정상을 사각으로 둘러친 난간에 붉은 천과 사랑의 열쇠가 많이 걸려있다. 5악 중 하나인 중국 화산 북봉 정상에 올랐다는 것에 대하여 벅찬 감동이다. 북봉 최정상은 해발 1612m다. 화산 북봉 정상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비록 케이블카에 의존하여 쉽게 올랐지만 오늘의 이 감격은 오랜 기억 속에서 우리 부부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 중국 화산 북봉정상에서 하신 길
다시 하산하여 내려오며 올라갈 때 제대로 보지 못했던 풍경들을 보았다. 큰 바위 아래에 설차여 놓은 책돌비도 만났다. 큰 고사목도 보고, 화강암 둥근 바위의 등을 깎아 90도 각도에 가까운 계단을 만들어 놓은 것도 보았다. 그리고 그 계단으로 조금 올라가 보았다. 이런 계단이 서봉에서 북봉으로 넘어 올 때 길게 있다는 것이다. 나는 몇 계단 오르다가 무서워서 얼른 내려왔다. 신이 만든 계단이고, 신이 허락하여야 오르내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여전히 운무가 드리운 산이다. 갈림길에 다다랐다. 우리 부부는 서봉으로 오르는 길은 택하지 않았다. 그대로 아까 올라왔던 북봉 케이블카 승선장 하산길로 내려갔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등정을 성공한 것이라고 자부한다. 나는 중국 화산 정상에 등정한 사람이라고, 용기 충천한 가슴으로 계단 하나하나에 감사하며 내려왔다.
* 중국 화산 북봉 케이블카 하산
북봉 케이블카 승차장에서 케이블카를 탑승하고 다시 하산한다. 오를 때도 보았던 화산인데 그 절경이 눈과 가슴을 서늟도록 비경이다. 지난 밤 비가 왔다. 그래서 운무가 아직도 서려 있다. 하지만 오늘 비가 오지 않는 것만도 큰 행운이다. 운무로 제대로 산을 보진 못했지만 이 정도 본 것도 큰 축복이다. 긴 공중의 줄을 따라 대롱대롱 매달린 케이블카가 지산으로 서서히 내려가며 화산과의 아쉬운 이별을 고한다.
* 중국 화산 북봉에서 하산하여 본 비경
케이블카 승차장에서 위로 올려 보이는 화산이 비경이다. 낮은 지대에서 바라보는 화산의 모습이 아득하게 드러내며 바위절벽산이 수직으로 기막힌 풍경을 선사한다. 붉은 건물과 케이블카와 함께 어우러셔 더욱 비경으로 기막힌 장관이다.
* 중국 화산에서 셔틀버스로 주차장까지 이동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버스 주차장으로 이동한다. 15분 정도 달리며 화산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 가파른 바위 절벽산과 화강암 바위 살결이 무섭도록 아슬하고 찬란하다. 만일 햇살이 서린다면 정말 화산, 그 이름 만큼 화려한 빛을 발했을 것 같다. 이 화산華山에서 빛날 '화華'자를 따서 중화민국이란 이름을 지었다니 중국인에게 이 화산이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는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셔틀버스를 타고 주차장에 와서 하차하였다. 뒤돌아 보니 화산의 장엄한 산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져 잇다. 장엄한 풍경이다. 버스를 타고 이제 서안으로 간다.
* 중국 화산에서 서안 가는 길
화산을 떠나 서안으로 간다. 화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도로의 로터리에 북경에서 개최하는 19 당대회 홍보 설치물이 높게 세워져 있다. 가끔씩 햇살이 나온다. 그래서 창가의 햇살이 눈부셔서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자유로운 시간이어서 나는 우리 부부, 또는 나의 셀카를 찍으며 간다. 그리고 메모도 정리하고 바깥 풍경도 보고 아주 유익한 시간이다.
* 중국 서안 전신마사지
화산에서 서안으로 돌아와서 전신마사지를 받았다.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서 여행사에서 제공한다. 중국한방지압의 결정체로, 수십가지의 한약물에 전문안마사가 마사지하여, 여행에서 쌓인 피로를 풀어주어 관광을 더욱 즐겁게 하는 차원에서다. 나의 당당자는 남자다. 정성껏 마사지를 잘 해준다. 고마웠다. 일행 중 7명의 남자분들은 남자방으로 가고, 여자 9명은 여자방에서 함께 받았다. 화산 등정의 여독을 풀어줌에 더욱 고마웠다. 석식 후 호텔로 돌아와서 일행 대표의 방인 1507호실에 16명 모두 모여서 개인 소개시간도 갖고 담소도 나누고, 시낭송과 노래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또한 맛있는 과자 등을 한국에서 사 와서 조국에 대한 향수로 잘 먹었다. 술은 중국의 유명한 술을 가이드가 제공해 주어서 고마웠다. 마음이 통하는 문인들이 많아서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있기를 서로 소망하며 각자의 방으로 돌아왔다.
2017년 10월 19일 목요일 대명궁유적지, 섬서박물관, 섬서가무쇼
* 중국 서안 노보텔 호텔에서 본 아파트
우리가 유숙한 서안의 노보호텔은 앞으로는 도로가 있고, 뒤로는 큰 아파트가 있다. 우리 부부의 방에서 창문을 열면 뒤 의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중국의 아파트는 주차장을 아파트 값의 20~30% 주고 사야 된다. 아파트도 껍질만 사서 내부 인테리어는 개인이 집값의 1/3쯤 거액을 들여 공사한다. 건물 임대를 50년~70년간 한다. 소유주가 바뀔 때마다 다시 50년~70년 임대한다. 다시 살면 재계약한다. 계약서에 땅은 국가 소유, 건물만 개인 소유 명시한다. 시가지 이동 중에 가이드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곳곳에서 보이는 도심의 아파트에 대해서도 나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우리 나라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서 아파트를 만날 때마나 주차장을 찾아 보기도 하고, 신기한 시선으로 고정시키곤 했었다. 오늘도 7시 모닝콜, 8시 조식, 9시 출발이다.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3시간 50분 간 꼿꼿하게 서 있었다고 세계적으로 보도가 나갔단다. 놀라운 일이란다. 문호를 개방한다고 했단다. 시진핑 고향이 서안이다. 지금 64세다. 지금 부인은 두번째란다. 부인은 세번째 남자란다. 오늘 여행 코스는 대명유적지, 섬서박물관, 섬서가무쇼다. 라텍스 공장 견학도 있다. 가이드로부터 버스 이동 중에 이런저런 중국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는 시간도 유익하다.
* 중국 서안 대명궁 유적지 영화 관람
대명궁에 도착하여 먼저 첫 일정으로 중국 IMAX 3D영화 <대명궁전기>를 관람했다. 입구에서 나누어 주는 눈 보호 안경을 받고 입장표를 받아 지정된 자리에 착석하여 관람했다. <대명궁 전기>는 발굴 현장에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인하여 신비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공원 7세기 당나라는 중국 고대 역사상 제일 휘황한 시기이고 대명궁은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유혹했다. IMAX 영화 제작 특징에 부합 되기 위하여 시각적 충격을 주는 장면을 많이 넣었다. 예를 들면 궁중가무쇼, 황가말 타기 축구시합, 귀족 사냥 장면, 무술 시합 등을 넣어 관중들로 하여금 생동감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영화 상연시간은 40분이다. 영화감독은 진테무(金铁木)다. 대명궁이 건설되기까지의 역사적 이야기가 중심이다. 인물들이 실감나게 제작되어 행동과 모습이 사실을 잘 유추하도록 한다. 가끔씩 툭툭 내 앞으로 다가오는 장면 혹은 인물, 혹은 화살 등으로 움칫하기도 했다. 궁 안에서의 공주와 이방인의 사랑도 애련한 감동을 준다. 영화를 관람한 후 밖으로 나왔는데 영화관의 문이 여러 곳에 있어서 한참을 헤매다가 가이들르 만났다. 매우 큰 대명궁이고, 매우 큰 극장 건물이다.
* 중국 서안 대명궁 유적지
서안의 대명궁 터가 상당히 넓다. 대명궁에 입장하여 먼저 영화를 보고 궁을 탐방한다. 서안의 국가 유적지 공원이다. 중국 산시성[섬서성] 시안[西安]에 위치한 궁 유적지다. 당대 장안성 삼대 궁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곳이다. 634년에 세워졌고, 당태종 이세민이 태상황 이연을 위해 더위를 피하는 장소로 만든 하궁(夏宫)이다. 이곳은 당왕조의 권력이 집중된 곳이었으며, 당조 말기 낙양으로 천도할 때 파괴되었다. 현재는 인덕전과 함원전 두 곳의 유적지만 대외에 개방되고 있다. 인덕전은 황제가 궁정연회를 열거나 손님을 접대하던 장소이고, 함원전은 장안성의 상징적 건축물이다. 대명궁은 원래 당나라 장안(長安)에 있던 황궁에 딸린 정원이며, 장안성 동북쪽의 용수원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당나라의 정치 중심지였으며,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규모가 큰 궁전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홍루몽>에서는 이것을 황궁 안에 있는 하나의 건물로 설정했는데, 제17~18회에 따르면 가원춘이 정월 대보름에 이곳에서 등불놀이를 구경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대명궁 국가유적지 공원은 세계문화유산이며 국가에서 중점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당태종 정관 8년에 건설하기 시작했고 면적은 3.2만킬로미터다. 유적지에 다시 대명궁을 건설하고 당나라 문화를 전시하고 있는 특색을 띠고 있다. 대명궁(大明宮)은 당의 궁성으로 장안 금원 동남쪽에 위치한다. 정관8년 634년 태종(이세민)은 태상황 이연이 더위를 피할 장소를 위하여 성 북쪽 용수원에 수축하였다. 원래는 영안궁으로 명명했으나, 후에 대명궁으로 칭하였다. 다시 봉래궁, 함원궁 등으로 칭하다가 다시 대명궁으로 불렀다. 궁성은 동서 3리, 남북 5리의 타원형을 띠고 있다. 용삭 3년(663) 고종이 이 곳으로 궁을 이전함을 계기로 이후의 여러 황제들 대부분이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다. 당말 군벌들이 혼란을 야기하여 전화에 휩싸여 폐허가 되었다. 단봉문은 대명궁 정남문이다. 황제가 왕위에 오른 후 경축하기 위하여 이 문에서 죄수들의 죄를 면하였고 책봉 의식, 연회 등의 활동을 했다. 박물관은 유적전시를 주요로 하고 유적 자체의 보호, 사진, 모형을 결합하여 관광객들에게 역사와 현대의 소통의 창을 제공하고 있다.
* 중국 서안 대명궁 함원전 유적
전동차는 다시 함원전 앞에 내려주었다. 그곳에서 다시 함원전이 유적을 살펴 보았다. 원래의 모습을 사진으로 전시해 놓았다. 함원전은 대명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시킨 아주 소중한 유적이다. 옛 건물은 지하에 있고 그 터만 남아서 길게 놓여 있다. 함원전은 대명궁 전정 중 제일정전이다. 대조회 때 외국과 주변 민족 정권 도지사들이 함원전에 모여 대조회를 거행했다. 또한 문무백관들이 조회를 치르기도 하였다. 지금 유지만 볼 수 있지만 매우 웅장하다. 함원전을 떠나 대명궁 안을 걸어서 나오는데 영화관 앞에서 중국 전통의상을 입은 여자들이 우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어 주었다. 모두 대명궁에서의 흐뭇한 여정이다.
* 중국 서안 시가지 아파트
이번 여행에서 가이드는 중국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려 주었다. 그 중에서 하나가 아파트에 대하여서다. 중국의 아파트는 건물과 주차장이 별개란다. 아파트 건물을 임대하며 돈을 지불하고도 별도로 주차장을 사야 주차가 가능하단다. 주차장 값은 아파트 값의 20~30%나 된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아파트를 2억에 임대하면 주차장 값을 4천만원~6천만원을 다시 지불해야 되다는 것이다. 아파트도 껍질만 건설해 놓앗단다. 임대하여 사서 내부 인테리어는 개인이 해야한단다. 집값의 1/3쯤 거액을 들여 공사해야 한다니, 우리로서는 그것도 믿기 어려운 대목이다. 중국은 건물 임대를 50년~70년간으로 한단다. 소유주가 바뀔 때마다 다시 50년~70년 임대한다. 다시 살면 재계약하면 된단다. 계약서에 땅은 국가 소유로 명시하고, 건물만 개인 소유로 명시한단다. 나는 서안 시가지 이동 중에 가이드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곳곳에서 보이는 도심의 아파트를 예사롭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우리 나라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서 크고 작은 아파트를 만날 때마나 주차장을 찾아 보곤 했다. 한동안 신기한 시선으로 눈을 고정시키곤 했었다. 서안의 아파트들은 대부분 화사하고 고층이 많다. 예전 2000년대 초반에 중국에 왔을 때는 수도인 북경에서도 잘 보이지 않던 그런 화려한 풍경이 지금은 지방 도시에서도 종종 보인다. 그만큼 중국이 빠르게 발전한 것이다.
* 중국 서안 대안탑 북광장 주변도로 풍경
라텍스 공장을 견학한 후 중식은 삼겹살과 된장찌개, 나물, 김치, 생채 등의 요리로 먹었다. 그리고 대안탑 북광장으로 이동한다. 버스에서 하차하여 많이 걸어서 간다. 대안탑 북광장으로 가는 뒷길에는 나무와 상가들이 많다. 상가거리를 지나간다. 동상도 거리 곳곳에 많이 세워져 있다. 골목길을 지나가니 부자마을로 들어갈 예정이라는 모노레일이 공중에 길게 설치되어 있다. 내년에 오픈한단다. 부자마을은 32Km 둘레란다. 곁에는 대안탑 북관장과 분수 광장이 있다. 대안탑은 유명한 명소다. 그래서인지 대안탑 북광장 주변 또한 매우 잘 조성된 건물이 있고 멋진 낭만이 흐르는 거리다.
* 중국 서안 대안탑 북광장
중국 서안의 대안탑 북광장 주변은 매우 혼잡하다. 그래서 입장문 앞에는 도로의 중앙에는 경찰차가 주차하여 있고 경찰이 총을 차고 차에 서서 주변을 감시한다. 그것으로 보아 이곳 대안탑이 얼마나 중요한 유적지인지, 세계인들의 걸음이 얼마나 모이는지 알게 한다. 그 만큼 우리는 안전에 주의해야한다. 대안탑 북광장으로 입장하여 들어가니 그곳에도 사람들이 매우 많다. 대안탑 북광장은 서안 옛 역사의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이 당나라때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지어진 탑이다. 길이 64.5M에 7층 높이로 되어있는 탑이다. 넓은 광장에 커다란 삼장법사의 동상이 세워져있고, 그 뒤로 대안탑이 높이 세워져 있다. 그곳을 떠나 입장문했던 문의 반대편으로 나오니 분수광장이 보인다.
* 중국 서안 대안탑 분수광장
분수광장에서는 분수가 높고 낮게 춤을 춘다. 아주 웅장하고 큰 규모의 분수다. 대안탑 앞 광장에서는 다양한 음악 공연과 레이져 분수쇼를 즐길 수 있다. 다시 버스가 주차된 곳으로 이동하며 아름다운 건물과 거리 풍경을 보았다. 버스를 타고 떠나올 때도 분수광장이 아름다운 자태로 한동안 보였다.
* 중국 서안 섬서역사박물관
서안의 섬서역사박물관은 엄청나게 큰 규모의 박물관이다. 외형도 그렇고 내부의 규모는 더욱 그렇다. 이런 규모의 박물관이 서안에 110개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1층은 선사, 고대, 청동시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2전시실과 3전시실이 있는데 시대별로 다량의 자료들을 나누어 전시해 놓았다. 지하박물관은 지하 1, 2, 3층에 있는데 입장료가 비싸다. 더 좋은 전시물이다. 전체면적 7만여평방미터의 국가급 역사박물관으로 중국에서 가장 큰 규모와 가장 현대화된 역사박물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중앙에 위치한 건물은 2층 높이로 원시시대부터 1840년 아편전쟁 중에 섬서성에서 출토된 각종 전시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서쪽의 주제 전시관에는 주로 실크로드 등 섬서성의 역사, 문화 등에 관련된 문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주요 전시품은 청동기, 도용, 금·은 장신구, 당나라 무덤 벽화 등이 있다. 동쪽의 역사문화전시관에는 주로 중국과 외국의 문화 교류를 주제로 한 전시품들이 있으며, 전국 각 성과 시의 문화 전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은 현대적인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전시관 내에는 문물보호 센터, 도서관, 다용도 학술보고실 등이 갖춰져 있다. 컴퓨터를 이용한 전시품과 자료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동 조절 에어컨과 인공 조명시스템, 6개국어 동시통역 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다.
* 중국 서안 장안로 풍경
섬서는 행정구역으로 서안의 섬서성이다. 옛날의 장안시다. 서안에 공용자전거가 가장 많다. 장안로를 지나간다. 미술관, 붉은 가로등, 석류나무 등이 아름다운 거리다. 붉은 가로등은 저녁이면 빨갛게 불을 켠다. 화청지에서 장한가쇼를 보고 밤 늦은 시간에 이동할 때 특히 화려하게 빛나던 붉은 가로등이다. 우리가 유숙한 노보호텔 앞에서도 보았던 가로등이다. 서안 시가지 곳곳에서 아주 특히한 가로등으로 아름다움을 전시한다. 장안로에서 아주 가까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 중국 서안 장안성 남문
장안로에서 장안성 남문을 지나간다. 장안성 바로 옆 도로를 달린다. 한국의 남대문 격인 성문이다. 그리고 조금 가니 서안 성벽이 길게 보인다. 성벽 바로 곁의 도로를 따라 가면서 서안 성벽을 계속 보았다. 우리나라 고구려의 고선지 무관과 신라시대 학자인 최치원 선비가 장안성에서 활동을 했다. 당나라 때 이곳에 온 우리나라의 두 사람이다. 성벽을 따라 가는 길은 매우 복잡했다. 자동차가도 많고 사람도 많다. 아마 이곳에 도심 복판이고, 지금이 퇴근 무렵이어서 성밖으로 왕래는 사람과 대중교통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이것도 버스 안에서 보는 중국 서안 도심 거리의 진풍경이다.
* 중국 서안 시가지 공용자전거
서안 도심의 넓은 도로변으로 석식을 하기 위해 왔다. 주변에는 공용자전거가 많이 매어 있고, 공용자전거를 이용하며 도로를 달리는 사람도 종종 보인다. 공용자전거는 색상이 노랑, 빨강색이어서 금새 눈에 띈다. 근처의 식당으로 가서 사천요리로 석식을 했다. 사천식 요리로 유명한 천부명언은 철판 두부 요리, 야채볶음, 파 고기볶음, 목이버섯 고기볶음, 풋고추 삼겹살 볶음, 철판 당면 양배추 요리, 물고기 찜 등을 사천식으로 제공한다. 맵고 짠맛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다. 이제 석식식당 바로 건너편으로 가서 섬서가무쇼를 볼 것이다.
* 중국 서안 섬서가무쇼 관람
섬서가무 극장은 서천요리 식당에서 도보로 길만 건너면 되는 거리인데 공연시간이 임박한 관계로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저녁시간이어서 주변이 어둡다. 도로가 혼잡하고 경찰의 단속이 심하다. 차량과 인파의 행렬을 뚫고 간신히 섬서가무 극장에 도착했다. 입장객도 많아 장사진이다. 극장 안으로 들어와서 자라에 앉았다. 섬서가무쇼는 음악과 무용 등의 공연으로 한국의 예술의 전당 공연과 유사한 쇼다. 식사와 함께 공연을 보는 팀도 있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와서 좌석만 찾아 앉았다. 우리 부부는 앞줄에서 3번째 자리에 앉았다. 일행도 모두 그 주변에 앉았다. 춤이 아름답다. 궁중음악을 재현한다. 왕과 왕비가 나와서 춤을 추며 궁중무용도 재현한다. 사회자는 남녀로 고전 복장을 입었다. 무대 앞 객석의 양쪽 벽면에 여인 그림이 화려하다. 양귀비가 아닐까 싶다. 섬서가무쇼는 당나라 궁녀들의 움과 당태종 이세민 황제시기 소림사 무술쇼다. 태평성세시기 즉 양귀비와 당현종시기를 재현하였으며, 그때 당시 궁녀들의 문무 백관류의 쇼이며 아주 화려한 옷차림으로 네 번 무대가 바뀌며 진행된다. 또 많은 소수민족의 전통복장 차림을 하고 나와 각 민족의 특징과 고풍적인 생활모습을 춤으로 표현한다. 배쇼라는 악기의 울림이 귀를 사로잡으며, 모든 단원이 노래와 춤으로 피날래를 장식한다. 생각보다 아주 웅장하고 무대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무용의 고전적인 중국의 전통쇼다. 잘 감상하고 밤길을 달려 호텔로 향했다.
* 중국 서안성벽 야경
서안 섬서극장에서 가무쇼를 관람하고 호텔로 돌아오며 본 서안 성벽의 야경이다. 성 안에서 성문 밖으로 나오며 성벽 바로 곁의 도로를 달려서 아주 자세히 보았다. 매우 아름다운 조명을 발하는 비경이다.
2017년 10월 20일 금요일 중국 서안공항 출발, 인천공항 도착
* 중국 서안 호텔주변 산책
오늘은 서안공항을 떠나 인천공항으로 가는 날이다. 아쉬움으로 노보호텔 주변을 크게 돌며 산책했다. 중국의 아파트와 아파트 주차장을 보았다. 빌라 안의 길도 걸었다. 노후된 주택인대 보수를 하지 않는다. 빌라 안에 유치원이 있다. 문 입구에서 유치원 교사인 듯한 여자가 마스크를 하고 체온계로 등원하는 아이들의 체온을 재고 확인한 후 들여보낸다. 학부모와 손잡고 등원하는 아이들 모두에게 그렇게 한다. 참으로 건강관리에 많은 신경을 쓰는 교육제도라고 생각되었다. 빌라를 나와 호텔 가까이에 오니 아파트 앞에 남녀 여럿이 모여 율동으로 아침 운동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참으로 건전한 하루의 일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바로 인도에는 공죵자전거가 많이 있다. 오늘 호텔을 떠나기 전 아쉬움으로 돌아본 산책길에서 중국 서안의 여러 가지 소중한 모습을 보았다.
* 중국 서안 노보텔 호텔 출발
이제 정말 중국 서안의 마지막 시간이다. 호텔 8층 로비에 가서 룸키를 반납하고 출발 준비를 했다. 로비가 상당히 크고 여러 가지 편의 시설을 갖추어 놓았다. 책코너, 장난감 코너, 휴식 코너 등 아름다운 공간이다. 우리 부부의 방은 1510호다. 7층에 식당이 있다. 그 동안 7층과 15층만 오르내리다 8층 로비에 와보니 새로운 정경들이 신비롭다. 호텔을 출발하여 서안 공항으로 간다. 1시간 정도 소요된다. 가이드는 그 동안 우리가 여행한 곳들을 대충 더듬어 준다. 우리가 오른 서안 성벽의 문은 동문이었다. 비림은 922년 전부터 2천년 동안 수집한 3천 개의 비석이 있다. 그 3천 개 중 1천 개는 무덤 비석다. 나머지 2천 개는 서예가들의 비석다. 실크로드는 로마까지 8200Km다. 중앙아시아 쪽에서 들여온 물품은 카페트 등 섬유제품과 유리공예품이다. 위수강을 건너간다. 서안 북쪽의 강이다. 경수강도 있다. 안개 낀 아침이다. 우리나라 고구려의 보장왕 무덤이 고재촌에 있다. 서안 동쪽에 있다. 제후급으로 무덤을 조성해 놓았다. 한국의 왕릉보다 크다. 무덤 2/3의 흙은 파손 유실 되었다. 도굴꾼들이 구멍을 내어 놓기도 했다. 화청지는 겨울 온천별장이다. 양귀비가 11년 거주한 곳이다. 안녹산의 난으로 고선지가 동관 지나가다가 당나라에 항복했다. 화청지 건물은 복원한 것이다. 목욕탕 바닥은 예전 그대로다. 대명궁은 서안 북쪽에 있다. 대명궁의 함원전으로 인해 대명궁 유적지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함원전의 유물 등은 지하에 보전되어 있다. 중국 서안 대명궁 등의 여러 가지 설명을 들으며, 지난 여정을 정리하여 되짚어 보며 간다. 참으로 유익한 시간이다.
* 중국 서안공항 출발
중국 서안공항에 도착했다. 이곳은 제3터미널이다. 서안공항은 아주 크다. 제3터미널까지 국내 및 국제 공항이 있다. 우리는 아시아나 항공 13시 10분 비행기다. 공항 검색이 철저하다. 기방을 다 열어보고 통과 시킨다. 신발도 다 주물러 본다. 안전한 공항 직원들의 자세가 까다롭지만 돋보인다. 12시 40분에 보딩이다. 17번 게이트다. 우리 부부의 좌석은 39C, 40E로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앞뒤로 떨어진 좌석이었는데 일행 남자분이 바꾸어 주어서 39A, 39C로 창가 좌석이다. 중앙의 좌석이 공석이어서 편하게 간다. 통로 건너편 좌석도 공석이어서 남편이 그리로 가서 앉아 나는 좌석 3개를 혼자서 편하게 간다. 서안공항 상공은 농토와 주택들이 많다. 서안은 산이 없는 도시라는 말이 증명된다. 이륙하자 곧바로 구름 층을 뚫고 올라가 창공으로 진입한다. 하얀 구름송이들이 곱다. 자상은 산맥줄기가 장엄히다. 청명한 창공이 청빛으로 비경이다. 지상은 온통 산맥이며, 그 산맥 사이로 더러 민가가마을이 보인다. 기내 중식으로 치킨, 빵, 샐러드, 알로에쥬스, 물, 차를 먹었다. 아주 맛있는 우리 한국음식이다. 내 조국의 음식이 최고다. 베이징에 가까워지자 상공은 검다. 도시의 탁한 공기를 상징한다. 우리가 저런 오염된 공기 속에서 산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에 갈 때보다 시간이 약간 덜 걸린다. 비행기가 이제 황해바다 상고으로 진입한다. 고도를 낮추는 지 귀가 멍멍하다. 이제 서서히 중국 서안 여정이 마무리 되고 있다.
* 인천공항 도착
내 조국 한국 인천공항에 비행기가 17시 10분 정시에 착륙했다. 맑고 좋은 날씨다. 내일은 작은 아들 처제 결혼식이 대치동에서 오후 5시에 있다. 작은 아들이 우리집에 와서 우리를 태우고 간단다.좋다. 여독으로 피곤하겠지만 손주들과 만나는 것이 좋다. 오늘 밤 푹 쉬고 휴식할 것이다. 내 족구은 언제나 평화로운 품이다. 4박 5일 간의 행복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에 대하여 감사하다. 세계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면 언제나 내 조국에 대하여 고맙고 감사하다.
사실 이번 중국 여행은 감자기 오게 되었다. 서초문협의 강기옥 감사님이 주선하여 서초문협 회원일행과 강선생님의 서초구청 역사문화유적 해설강의를 듣는 수강생들이 함께 다녀온 중국 서안 역사유적탐방 여행이다. 우리 부부는 그 동안 세계탐방을 90여개 국가를 했지만 중국 서안의 진시황릉 병마용갱은 가 보지 못했던 곳이라서 이번 기회에 다녀온 것이다. 중국은 땅이 넓어서일까. 모든 것들이 크고 우람했다. 사람들의 마음도 그럴까. 아마도 그래서 여유로운 자세일 것이다. 넉넉한 땅이 참 부럽다. 우리 부부는 이제 60대 후반이다. 남편은 70살이 넘어도 세계탐방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점점 힘들어진다. 오히려 남편이 더 피곤해 한다. 그 동안 참 많은 국가들을 탐방해왔다. 중국에 다녀온 것만도 6번째다. 그래도 중국은 보아야 할 곳이 남아 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진시황릉 병마용갱이다. 지하무덤에 서 있는 병사와 말동상들이 기막힌 풍경이었다. 복원된 병사와 말은 세워져 있어 그날을 재현하고 있다. 복원이 안 된 곳은 흙더미에 덮여 있다. 흙을 긁어 낸 곳에는 병사와 말이 깨어져 조각조각 묻혀 있기도 했다. 그 조각들을 모아 붙여서 완성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장안 성벽, 즉 서안 성벽은 14Km의 긴 성벽이다. 그 긴 성벽이 서안 시가지에 뻗어 있다. 야경이 매우 아름다웠다. 우리의 호텔은 성 밖 북쪽에 있어서 섬서성 박물관 관람 후, 그리고 저녁에 섬서가무쇼를 관람한 후 서안 성벽을 통과하여 오며 성벽의 야경을 보았다. 화산은 운무로 잘 보지 못했다. 그러나 하산한 지상 가까이에서는 그 웅장한 자태를 그런대로 잘 보여 주었다. 신은 어찌하여 저리도 큰 화강암 바위 한 덩어리를 중국에 내려 놓았는지...중국 5악 중 가장 낮은 산이 화산이라는데 아득한 높이였다. 화청지에는 연못, 화청궁, 목욕탕 등이 있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의 족적이 서리어 있어 후세인들의 걸음이 고인다. 현종은 양귀비를 본 순간 반하여 그녀를 사원의 중으로 들였다. 35세 연하에 며느리라는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양귀비를 궁 밖 도교사원에 보내고 밀애하기도 했다.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이다. 그녀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그녀만 곁에 있게 하였다. 사람은 갔는데 그들의 전설 같은 사랑 이야기는 아직도 남아서 흘러 세계인을 부른다. 교포 가이드는 이봉춘이다. 그는 한국에 가서 자기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부탁을 많이 했다. 정말 성실하게 가이드 역할에 충실했던 교포였다. 금년 봄부터 사드배치 건으로 한국과 중국을 왕래하는 여행객이 적어, 그는 살기 어렵다고 했다. 중국에서 버스가 이동할 때 한시도 착석하지 않고 서서 설명해 주는 그가 직업의식에 충실한 사람임을 드러내 주었다. 내 조국의 피가 흐르는 성실한 남자임을 보여 주었다. 그 가이드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이제 나는 시인으로서의 사명에 더욱 충실하여 고마운 내 조국에 보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