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28대 충혜왕(忠惠王, 1315~1344)은 주색에 빠져 방탕한 행동을 일삼다가 원나라에 의해 폐위된 임금이다. 원 간섭기의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원나라에 의해 왕의 자리에 오르락내리락했고 패륜까지 저지른 못난 임금이지만, 그는 한국 상업사에서는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다.
원나라의 생활 풍습이 더 익숙했던 충혜왕
충혜왕의 이름은 왕정(王楨)이며, 몽골 이름은 부다시리(普塔失里)로, 고려 27대 충숙왕(忠肅王, 1294〜1339)과 명덕태후 홍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31대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친형이다.
그는 고려의 생활 풍습보다는 원나라의 환경에 더 익숙해 있었다. 그는 1328년 2월 세자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 황제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속국의 왕족들이 볼모로 가서 머무는 일)하며 머물렀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자 철저한 속국이었다.
25대 충렬왕과 26대 충선왕이 원나라에 의해 왕위를 수시로 빼앗겼던 것처럼, 그의 아버지 충숙왕도 1330년 원나라에 의해 사실상 왕위를 빼앗겼다. 겉으로는 충숙왕의 양위(讓位)를 받아, 그해 2월 그가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하고 충혜왕이 되었다.
2년간의 짧은 1차 재위
당시 고려의 왕위 계승은 아버지가 고려의 왕이라는 혈통의 문제보다는, 원나라에 얼마나 강력한 지기기반이 있느냐에 따라 좌우되었다. 충혜왕은 세자 시절 원나라 승상 엘테무르(燕帖木兒)와 가까이 지냈다. 14살의 세자는 엘테무르와 함께 사냥도 하고 술도 마시며 그의 총애를 받았다. 게다가 그는 세조 쿠빌라이의 고손녀인 이렌첸반(亦憐眞班, 덕령공주)과 결혼했다.
왕위에 오른 충혜왕은 1331년 너무 가치가 커서 화폐로 쓰이기 힘든 은병(銀甁)의 통용을 금하고, 오종포(五綜布, 올이 다섯 가닥인 베)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게 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또 행정조직을 개혁하고, 5도(道)에 소금을 관리하는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원나라의 쌍성(雙城), 요양(遼陽), 심양(瀋陽) 등지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귀환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 새로운 정치를 하려는 의지를 보였었다.
방탕한 행실이 폐위의 구실이 되다
하지만 그는 2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로 가야만 했다. 그를 지지해준 엘테무르가 사망하자, 원나라에서 권력을 잡은 태보(太保, 정1품 고위직) 바이안(伯顔)이 ‘충혜왕이 본래 행실이 나빠 원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일에 누가 될까 염려스러우니 그의 아버지에게 배우게 하십시오’라면서 충혜왕의 폐위를 주청했기 때문이었다.
충혜왕은 총명하기는 했지만, 어려서부터 술 마시고 방탕하게 노는 것에 익숙했던지라 왕위에 오른 후에도 정치보다는 술과 여자를 탐하고 사냥을 즐겼다. 그의 나쁜 행실은 폐위의 구실이 되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충혜왕은 원나라에 가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원나라 황족, 귀족들과 함께 유흥을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가 엘테무르의 아들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여자를 희롱하고 다녀 간혹 숙위에도 결근하자, 바이안은 그를 두고 무뢰배, 건달을 뜻하는 ‘발피(泼皮)’라며 비난했다.
누가 고려 왕이 될 것인가
충숙왕은 아버지 충선왕과의 갈등, 원나라와의 갈등으로 인해 왕권이 허약했다. 게다가 고려 왕위는 심왕(瀋王) 고(暠)가 넘보고 있었고, 그를 지지하는 신하들이 고려에 많았다. 충숙왕 역시 이런 사정 때문에, 요동 일대의 고려인을 다스리는 심왕 고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생각하기도 했다. 충숙왕은 아들을 ‘발피’라고 부르는 등 애정이 적었지만, 1339년 3월 죽음을 앞두고 유명(遺命)으로 그에게 왕위를 다시 계승하게 했다.
그런데 원 황제에게 왕위 계승의 허락을 구하고자 하는 요청을 원나라 태사(太師, 정1품 최고 직위) 바이안이 묵살하고 황제에게 고하지 않았다. 바이안은 심왕 고가 왕이 되어야 한다며 충혜왕의 즉위를 반대했다. 이 때문에 고려 왕위는 그해 11월까지 비어 있게 되었다.
아직 왕위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충혜왕은 아버지의 여인 가운데 수비(壽妃) 권씨(權氏)를 범하고, 외삼촌인 홍융의 아내 황씨도 간음하는 등, 음란한 짓을 많이 했었다. 그는 심지어 8월 17일 서모(庶母, 아버지의 첩)인 백안홀도(伯顔忽都, 경화공주)를 강제로 능욕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증손녀라는 높은 신분을 갖고 있었다. 수치심을 느낀 그녀는 원나라에 이 사건을 알리고자 했다. 충혜왕은 그녀가 원나라에 소식을 전하지 못하도록 말의 거래까지 막을 정도로 단속했다. 그러자 그녀는 재상인 조적(曺頔)에게 자신이 폭행당한 사실을 알렸다.
심왕 고를 고려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조적은,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았다. 그는 8월 24일 국새(國璽)를 숨긴 채 군사 1천명으로 왕궁을 습격하는 반란을 일으켜 심왕을 고려 왕위에 앉히고자 했다. 이때 충혜왕은 직접 말을 타고 나와 화살을 쏘며 반격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충혜왕의 군사들이 활을 쏘아 조적을 죽이면서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원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왕이 된 충혜왕
반란을 평정한 충혜왕은 사람을 보내 원나라에 가서 왕위 계승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고려에 온 원나라 사신은 먼저 경화공주의 궁에 가서 황제가 보낸 술을 전한 후, 왕의 관저로 가서 국새를 빼앗아 경화공주에게 넘겨주었다.
충혜왕은 원나라로 압송되어 형부(刑部)에 투옥되었다. 상당수의 고려 관리들도 함께 원나라에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자칫 왕위를 빼앗길 위기였으나, 마침 충혜왕을 미워하던 바이안이 권력을 잃는 등 원나라의 정계 개편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 이를 틈타 충혜왕은 황제의 명령을 받아 왕위에 복위되고, 6개월 만인 1340년 5월 고려로 귀국하였다.
황음무도의 결과와 귀양길에서의 죽음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제 욕심을 차리다가 왕위까지 빼앗길 뻔했던 그였지만, 고려에 돌아온 후에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충혜왕은 여전히 여자들을 겁탈하고 신하들을 때려 죽였다. 결국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奇轍, ?~1356)을 비롯한 고려의 신하들이 원나라 중서성에 글을 올려 충혜왕의 황음무도(荒淫無道)를 고발함으로써, 충혜왕은 1343년 11월에 고려에 온 원나라 사신에게 구타를 당하고 포박 당해 원나라로 끌려가고 말았다.
1343년 12월, 원나라 순제 토곤테무르는 충혜왕을 죄인을 가두는 수레에 태워 게양현(현재의 광둥성 지역)으로 귀양을 보냈다. 충혜왕은 귀양을 가던 길에 다음해 1월 악양현(호남성 지역)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귀양길을 따른 신하는 하나도 없었을 뿐더러, 그의 죽음에도 고려 백성들 가운데 아무도 슬퍼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원 간섭기 고려 왕들의 비행, 왜 그랬을까
8살에 즉위해 12살에 죽은 충목왕과 12살에 즉위해 15세에 죽은 충정왕을 예외로 치면, 원 간섭기 고려의 왕들은 모두 여자관계가 복잡한 난봉꾼들이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모두 몽골의 공주들과 사이가 나빴다. 자신들이 원한 결혼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정략적 결혼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든지 원나라의 결정에 의해 수시로 왕위를 빼앗길 수도 있는 처지에 놓여 있었고, 실제로 왕위를 빼앗겼던 경험들을 갖고 있었다.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 원나라에서 황족의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고려에 오면 왕의 권위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신하들이 자신이 아닌 원나라의 정세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늘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이런 불안감이 원 간섭기 고려 왕들을 난봉꾼이 되도록 만든 요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려에는 우탁(禹倬) 등 일부 신하들을 제외하면 왕의 난행을 막기보다는 도리어 왕에게 자신의 딸, 심지어는 부인까지 바치면서 출세하려는 자들이 넘쳐났다. 충혜왕의 황음무도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돈벌이에 나선 왕
충혜왕은 음란하고 방종하며 무도하였지만, 재리(財利)를 계산하는 데 세밀한 것까지 잘 따지는 영특하고 날카로운 자질도 갖고 있었다. 그는 고려왕으로 복위를 하거나, 원나라 세도가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또 자신의 유흥을 위해서 무엇보다 자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자금줄인 고려 왕실의 재정을 튼튼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했다.
충혜왕은 재정 확보를 위해 상인들을 시켜 금, 은, 포목 등을 원나라에 가서 판매하여 이득을 얻도록 했다. 큰 이득을 얻어온 상인들에게는 장군의 벼슬을 주기도 했다. 상인들을 가까이 하고 우대한 충혜왕은 사기(砂器) 그릇을 파는 상인인 임신(林信)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기도 했다. 그녀가 은천옹주 임씨다.
점포를 차리고 공장을 만들어 왕실 재정을 확충하다
충혜왕은 왕궁에 직속되어 왕실 재정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의성고(義成庫), 덕천고(德泉庫), 보흥고(寶興庫) 등을 확대했다. 재정을 늘리기 위해 백성들의 민전을 수탈하여 불법적으로 귀속시키기도 하고, 이곳에 모아둔 베 48,000필을 자금으로 활용해 개경 저잣거리에 점포를 차려 장사를 하게 하기도 했다.
충혜왕은 신궁(新宮)을 건설하기도 했다. 신궁에는 창고가 일백 간이나 되었는데, 곡식과 비단으로 창고를 가득 채웠고, 행랑에는 채단을 짜는 여공을 두기도 했다. 또 방아와 맷돌을 많이 두었다. 이곳은 왕의 놀이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각종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이기도 했다. 신궁의 건설과 운영에는 은천옹주의 뜻이 많이 반영되었다.
충혜왕이 개경 저잣거리에 상점을 내고 물건을 직접 생산해 팔게되자, 시전 상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충혜왕으로서는 별다른 선택의 기회가 없었다. 대토지를 소유한 권문세족들이 원나라와도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세금을 더 징수하여 왕실 재정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왕실 재정을 늘리는 길로 장사를 선택한 것이다.
상업을 존중한 고려
화폐유통에 적극적이었던 고려 15대 숙종(肅宗, 1054~1105)은 개경 시가지 도로 양편에다 상업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스스로 점포를 지어 돈을 사용하여 이익을 크게 거둘 것을 장려하였다. 또 각 주와 현에 명령하여 미곡을 내어 술과 밥을 파는 가게를 열게 만드는 등 백성들에게 상업을 권장하고 돈의 유익함을 알도록 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고려 시대에는 상업에 대해 적극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장사를 해서 이익을 얻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중에서도 임금이 직접 상점을 차리고 수공업장을 만든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하지만 충혜왕이 국제무역과 장사를 통해 왕실 재정을 확보하려고 계획하고 실천했던 것은 당시 고려가 상업을 존중하고, 그 바탕 위에서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