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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
한국공산주의운동사 |
세계사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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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8. 20 |
콤소몰로부터 고려공산청년회의 승인을 얻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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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10 |
한인 학생들을 동방공산대학으로 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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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4.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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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 남경에 반공정부 수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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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2. 27 |
제4차당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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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3 |
제1차 중앙집행위원회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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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5.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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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제남서 장개석의 불벌군과 충돌(제남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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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6. 19 |
중앙집행위원 이성태 검거, 이후 당원들 다수 검거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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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8.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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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제6차 세계대회 모스크바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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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12 10 |
코민테른 진햅위원회 테제 승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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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발표 잘 들었습니다.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기 위한 노력과 12월 테제의 내용을 알게 되었는데, 12월 테제는 한국공산주의자들에게 지령을 내려 새로운 진로 방향성을 제시했지만 새로운 지령이 아니었고 반복 서술이었습니다. 한국공산주의 실패요인으로는 일본 경찰 압력, 분파간 위화감, 지도가 영속적이지 않았던 점, 코민테른의 우유부단함이 있었습니다. 한국공산주의의 의의는 민족혁명운동의 다른 방법을 제시했고, 대중들에게 자각시키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12월 테제를 통해 실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발표 수고하셨습니다.
12월 테제는 한국공산주의운동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테제는 활동방침을 급격하게 변화시킬 만한 영감이 가득한 새로운 지령은 아니었고, 그것이 비록 경찰의 감시가 심한 한국의 상황에서 실제로 달성될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한 것은 아니었다할지라도 이 지령은 대부분 이미 수행되고 있는 것의 반복 서술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12월 테제는 한국 공산주의역사에 조선공산당의 문제에 대해 내린 지령이다. 결과적으로 민족 혁명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며 대중을 일깨우는 역할을 맡았다. 코민테른은 공인 기구로서의 역할을 계속한다. 12월 태제와 함께 주목할 내용은 동방공산대학이다. 이 곳 출신들은 해방이후에도 위력을 떨치고 권력을 행사한다. 앞선 사건을 계기로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은 공산주의는 일단락되고 해방이후에나 지속된다. 한국 공산당에 있어서 최대의 방해 요소는 일본이었지만 당의 재건을 주창한 코민테른은 결국 해체의 지령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 공산주의는 유산되고 앞으로 국내에서의 당의 붕괴 등의 내용과 이어진다.
공산주의운동에서 코민테른의 승인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다가온다. 힘의 집중에 의거한 코민테른의 1국1당주의는 승인받은 공산당으로서는 공산주의 선전의 가장 첫 발을 내딛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므로 코민테른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제 4차당때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의 관계는 공식적인 관계로 이어졌으며 결국 국내로의 공산주의의 선전을 위한 기틀을 만들어낼 수 있겠다. 후에 국내에서의 공산주의가 실패라고 생각되어지는 단계까지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사상들이 약소 계층에 존재하는 농민들과 노동자들에게 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효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훌룡한 발표였습니다.
12월 태제는 한국공산주의운동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한국공산주의운동을 실패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분석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코민테른의 결정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지령’입니다. 12월 태제에서 코민테른은 한국공산주의를 기본적인 원칙 즉 노동자와 농민이 주역으로 혁명을 이끄는 원칙에 따라서 재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러시아에 있고, 당시에는 통신이 발달하지 못해 한국까지 지령이 전해지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일제의 집요한 추적을 당하는 공산당은 해체되고 재조직되기를 반복했고, 이 과정에서 코민테른과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12월 태제 즉 4차 조선공산당 이후로 해방 이후까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은 공산당이 없게 됩니다.
1925년까지 코민테른과 한국공산주의자의 관계는 별 성과없는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한국인은 초창기에 박진순이 확립해 놓았던 코민테른 대표들의 신임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코민테른이라는 공산주의의 본부에 인정을 받는 것은 대표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코민테른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파견한 조봉우와 조봉암의 활동입니다. 이들의 활동 결과는 코민테른에의 가입 수락으로 나타났고 제6회 세계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한국 공산주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농민에게 계급의식을 주입하지 못하였고, 혁명운동과 민족개량주의운동을 구분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에도 한국 공산주의운동은 대중의 정치의식을 깨우고 한국에 공산주의를 선전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집니다. 경미 학우, 발표 수고하셨어요.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에게 지령, 12월 테제를 내립니다. 조선공산당의 문제점, 실패 요인 등의 내용이 있었지만 코민테른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바는 바로 한국공산주의운동을 다시 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코민테른은 농민, 노동자를 전면에 세워 공산주의운동의 원리원칙에 따라 새롭게 시작할 것을 지령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상황은 정치·사회적, 경제적으로도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재건은 힘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에 내린 재건지령은 결과적으로 해체지령이었으며 이후 한국에서 조선공산당은 재건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코민테른이 내린 12월 테제는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에서 국내 공산당 조직의 막을 내리게 한 분수령이었습니다. 경미 학우, 발표 수고하셨어요.^^
당이 실패하게된 원인으로는 계속되는 검거 때문만이 아니라, 한국공산주의 운동의 전개에서 나타난 그들의 지도력,유효성과 통찰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요인은 코민테른이 보여준 우유부단한 움직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코민테른은 국외 한국공산주의자들의 과거의 경험에 낙담하고, 각 파벌로부터 보내온 무책임하고 중상모략으로 가득찬 보고를 보고 실망하여, 당활동의 대부분은 한국공산주의자들 스스로에게 맡겨버렸다. 12월 테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한국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기껏해야 형식적인것에 불과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공산주의운동은 실패한 듯 보이지만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한국에 공산주의를 도입하여 민족혁명운동에 다른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그들의 희생과 과감한 행동은 대중의 정치의식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제가 너무 실패하게 된 원인쪽으로만 이해하려고 한거 같습니다.
조봉암과 조동우는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4차당 때 실질적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였지만 대표자 결정에 실폐하였습니다. 동방공산대학 출신들이 해방 이후에도 활약하였고, 이것은 공산주의 활동을 계속하기 위한 가장 큰 잠재력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12월 테제는 코민테른이 한국공산주의에 내린 지령이었고, 실패에 대한 지적이고, 새로운 방향성의 진로 설정이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의의로는 민족혁명운동에 다른 방법을 제시하였고, 대중들을 일깨우고 자각하는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은 조선공산당의 노력이 12월 테제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 수업의 내용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기 위한 한국공산주의자들의 노력을 보여주는 장이었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공인기관인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기 위한 많은 노력에도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 회의에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12월 테제의 내용에서처럼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실패를 예상한 것인지 식민지국가라는 위치 때문인지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에 비해 코민테른의 대응이 너무 우유부단했단 점에 아쉬움이 남는 수업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동방공산대학에서 교육 받은 한국 공산주의 운동가들의 열정과 잠재력으로 말미암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실패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코민테른은 조선의 공산당의 과거 활동의 잘못을 분석하고 다시 부흥을 시키기 위해 12월 테제를 지시합니다. 그러나 12월 테제는 이미 시행 되고 있는 것에 대한 반복 서술 일 뿐이었고, 영감 가득한 지령이 아니였습니다. 일본경찰의 압력과 분파간의 위화감, 지도자가 영속치 않으며, 토민테른의 유우부단함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나라는 공산주의가 실패 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패 했다고 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헛된 운동이 아니라 한국의 공산주의는 민족혁명운동의 다른 방법을 제시 하고 그동안의 무지한 대중을 일깨워줬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
12월 테제는 실제적으로 해체 지령이었습니다. 실패에 대한 지적과 함께 새롭게 한국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이는 이후 공산주의 운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고, 이를 이끌어 갈 주역으로 동방공산대학에서 교육받은 이들이 후에 중심축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후에 전개될 내용이 기대되는 봐입니다.
코민테른은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승리한 이후 일련의 나라들에서 창건된 공산당들이 아직 장성하는 혁명운동을 독자적으로 지도하리만큼 충분히 준비되여 있지 못하였던 조건에서 각국 공산당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할수 있는 국제적인 조직체가 요구되였습니다. 국제공산당은 이러한 요구를 반영하여 창건되였고국제공산당은 레닌에 의하여 준비되고 실현되였습니다.
12월 테제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이 채택한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지침서입니다. 12월 테제를 통해서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실패를 지적하고 새로운 진로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의 재조직을 명령하였는데 공장노동자와 빈농등을 조직에 끌어들이고 민족개량주의나 기회주의적 지도자들의 냉담성과 우유부단성을 폭로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테제가 국내에 전달된 뒤 그 영향은 광범하였는데, 우선 기존의 조선공산당이 해체되고 당을 재건하기 위한 각종 운동이 활발하여졌습니다. 그리고 민족통일전선조직이었던 신간회가 해체되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이번 발표를 통해 코민테른의 승인과 동방공산대학, 12월 테제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코민테른의 승인 이전에는 한국공산주의자와 코민테른의 관계는 별 성과가 없었지만 코민테른의 승인이후 한국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운동의 새로운 노력을 하게 됩니다.
코민테른은 자신들의 하위지부라 할 수 있는 조선공산당이 파벌싸움을 계속해서 함으로써 공산주의운동이 전개가 잘 이루어지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승인을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듭니다.
동방공산대학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후에 해방이후에도 동방공산대학 출신들이 활발히 활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12월 테제는 조선공산당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코민테른에서 지령을 내린 것으로 과거 활동의 잘못을 분석하고 새로운 활동을 지시한 것으로 한국공산주의운동에 분발 할 것을 코민테른에서 지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 12월 테제 역시 지난 활동의 반복을 거듭하면서 실패하게 됩니다. 코민테른의 지령은 강제성을 가지고 있다고 배웠습니다.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령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방이 될 때까지 어느 당도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파벌투쟁으로 코민테른의 신임을 얻지 못한 조선공산당은 신임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코민테른이 12월 테제를 통해 지령을 내리게 됩니다. 이 12테제가 가지게 된 의의는 표면적으로는 재건지령이였지만, 12월 테제를 기점으로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은 당은 없었고, 해방 이후에 재건이 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그 때 당시 상황으로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는다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12월 테제는 조선공산당과 신간회가 해체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이너스적 요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르기 위하여 공장노동자와 빈농에 기반을 둔 당을 재건하기 위한 운동 및 노동조합이나 농민조합의 운동이 활발해진 것은 플러스적 요소라고 분명히 이야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재미있는 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제1차 조선공산당을 제외하고 2차, 3차, 4차 당은 모두 해외지부가 존재했습니다. 저희는 조선공산당의 해체라고 했을 때 보통 국내의 조선공산당만을 그 대상으로 여기기 쉽지만, 실상은 해외의 조선공산당도 고려의 여지 없이 해체되었습니다.
국내에서의 재건 운동은 활발했습니다. 비록 압정에 의해 실질적으로 해방 이전까지 조선공산당의 뒤를 이을 새로운 당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해외에서의 당은, 특히 만주와 일본에서는 조선공산당 총국들이 해체되면서 중국과 일본의 공산당으로 각각 흡수되어버린 채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벌의 대립을 무산시킨다는 뜻은 좋지만 그 대신 우리는 해외에서의 기반도 잃어버린 셈입니다. 해외의 공산주의자는 이제 '조선'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를 위한 공산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12월 테제는 선택이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 선택을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좋은 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시야를 편협하게 가지면 당연히 고려되어야 할 것들을 놓치기 마련입니다. 넓은 시야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경험과 노력도 중요하겠지요.
코민테른은 12월테제에서 조선공산당의 재조직 방침을 지시합니다.그리고 혁명의 중심인물로 공장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로 규정하고 이전 조선공산당은 지식인과 학생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파벌싸움도 심했고 혁명을 할 수 없었다고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당에 끌어들이라고 지시합니다. 12월테제에 의해 당의 재건을 위한 운동과 노동조합 농민조합운동은 활발해 졌지만 해외의 조선공산당은 해체됩니다. 그리고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12월테제이후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12월테제는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한국공산주의자들에게 내린 지령을 말합니다. 12월테제에서 한국공산주의운동이 실패한 이유 중 한국의 경제체제가 농업위주였기 때문에 공업노동자가 적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다음에 나타나는 경제체제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공산주의는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달한 후에 나타나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공산주의가 발생하기에는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실패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코민테른의 승인 이전에 상해파와 이르크츠크파의 파벌투쟁으로 코민테른의 신임을 얻지 못하던 한국 공산주의자는 1차당을 설립하여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고자 조봉암과 조동우를 코민테른에 파견하였지만 실제로 관계가 개선된 것은 4차당 때의 일입니다. 공산주의 활동을 계속하기 위한 가장 큰 잠재력은 동방공산대학의 학생들이고 이들이 국내에 왔지만 경찰의 감시로 성과는 없었으나 해방 이후에도 활동하여 잠재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코민테른은 한국공산주의자들에게 실패지적, 새로운 진로 등에 대한 지령을 내렸지만 이미 수행되고 있는 것의 반복이었고 한국 내의 여러 상황 때문에 이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발표 너무 잘 들었습니다. 코민테른은 한국 공산주의자의 실패에 대한 지적과 함께 새로운 진로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며 12월 테제를 지시합니다. 하지만 영감이 가득한 새로운 지령이 아닌 한계점을 드러내며 실패하게 됩니다. 이에는 일본경찰의 압력과 분파간의 위화감, 코민테른의 우유부단함과 영속적인 지도가 없었던 것도 한 몫 하게 됩니다. 하지만 민족혁명운동에 다른 방법을 제시하며 대중들을 일깨우고 자각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것에 의의를 둘 수 있습니다.
민경미 학우의 발표 잘 들었습니다. 이번 절에서 12월 테제를 보면서 코민테른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코민테른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원칙아래 엄격한 이데올로기를 고집하였습니다. 마치 레닌의 엄격성이 그대로 코민테른에 반영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에 한국공산주의자들은 지나친 주도권 싸움으로 인해 파벌문제가 야기되었고 조선 인민 노동자들과는 괴리된 다툼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로 인해 한국공산주의운동에 제대로 된 방향성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국 당내의 파벌문제와 일본경찰의 압력이 한국공산주의운동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한국공산주의운동에 가장 큰 한계점은 파벌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지도세력 간의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한국공산주의가 더욱 우리민족에게 호소력있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코민테른의 승인으로 동방공산대학에 학생들을 파견하였지만 경찰의 감시로 인해 제대로 된 활동을 펼치지 못하였다. 12월 테제는 한국공산당의 실패 요인과 새로운 진로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 하였습니다. 하지만 테제의 활동 방침은 변화를 가져올 새로운 내용이 아니였으며, 현재 실정에 맞지 않거나, 이 지령은 대부분 이미 수행되고 있는 것의 반복 서술에 불과했습니다.
열심히 발표해 주신 경미 학우,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이 발표를 통해 눈여겨본 것은 바로 '12월 테제'였습니다. 12월 테제는 한국공산주의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작용합니다. 한국의 공산주의자는 농민과 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우는 원칙에 따라 공산주의운동을 제대로 하라는 코민테른의 '지령'을 따라야 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를 뚫고 말처럼 쉽게 그 지령을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보다 근본적으로 분석해 보면 재건하라는 지령은 사실상 해체지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 재건을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해체였기 때문입니다. 조선공산당이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지령의 내용이 해체지령이었음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12월 테제는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위기의 요인이었지만 12월 테제후에 지속적으로 동방공산대학 학생들의 노력이 있었으므로 공산주의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았다. 몇 번의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궈낸 값진 열매다. 그 뒤에는 동방공산대학이라는 젖줄 같은 교육기관이 있었다. 그리고 12월 테제. 그것은 조선공산당의 실패를 말함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다. 비록 그 제안들이 실현가능성이 부족하고 새로운 방법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조선공상당의 국내활동은 일제의 탄압, 서로간의 위화감, 국내사정의 무지 와 코민테른의 무심함으로 그 활동이 실패인 듯 보였지만, 대중을 일깨워놓은 그들의 선전활동을 무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수업을 참가하지 못하고 혼자 책을 읽고 깨우치려니 참으로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곱절 이상의 시간을 들여서 간신히 맥락만을 이해하고 늦게나마 댓글을 답니다.
12월 테제의 영향으로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위기를 겪게됩니다. 그한국 공산주의운동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실패한 듯 보이지만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한국에 공산주의를 도입하여 민족혁명운동에 다른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그들의 희생과 과감한 행동은 대중의 정치의식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또한, 한국 공산주의운동은 그동안 무지의 존재였던 대중들 특히, 노동자들의 의식을 일깨우고 자각하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한국에 공산주의를 널리 ‘선전’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습니다.
예비군 훈련 때문에 올려진 것 보고 몇자 적습니다.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한국 공산주의자들에게 지령을 내린다. 이것이 12월 테제이다. 이 12월 테제의 이 지령은 대부분 이미 수행되고 있는 것의 반복 서술에 불과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운동은 사회적으로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익을 옹호함으로써 대중을 일깨우는 데 자극을 주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당시 공산주의 운동을 위한 공산당은 코민테른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공산당으로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코민테른은 12월 테제를 통해 한국공산주의가 나아갈 비전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들이 나아가야할 방향이자 그들이 지켜야만 하는 명령이긴 하지만 12월 테제는 논리상으로 맞는 지령이었으나 현실성이 모자랐고, 한국의 특수성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어 한계가 있었습니다. 조선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지령은 한국에서의 공산주의 실패 원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