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 스님은 이 융삼세간을 ‘반시’로 그려내고 있다. ‘반시’에서 만약 검은 글자를 없애면 흰 종이와 붉은 줄도 모두 없어진다. 즉 종이와 줄이 글자와 떨어진 것이 아니고, 글자에 줄과 종이가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세간을 떠나서는 기세간과 지정각세간도 있을 수 없고, 중생에게 기세간과 지정각세간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을 상징한다. 이 중생세간처럼 지정각세간과 기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존재가 평등한 융삼세간불인 것이다.
이 융삼세간불은 십신(十身) 무애의 부처님이다. 십신 중에서 중생신·업보신은 중생세간이고, 국토신·허공신은 기세간이고, 성문신·연각신·보살신·여래신·법신·지신(智身)은 지정각세간에 해당한다. 삼세간이 다 부처님인 것이다.
이러한 삼세간은 해인삼매에 의한 것이다. 삼세간의 해인은 통틀어 말해서 불해인(佛海印)이다. 부처님 정각의 보리심[佛正覺菩提心] 바다에 비친 만상이 실은 바닷물뿐인 것처럼 일체가 부처님인 것이다.
이 상즉도리는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서 일어난 파도[東風波]와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서 일어난 파도[西風波]의 비유로 설명되고 있다. 동풍파와 서풍파가 둘이 아닌 것이 상즉이다.
두 파도의 체가 물로서 둘이 아니므로 상즉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이 파도는 자성의 파도가 아니기 때문에 저 파도에 있고, 저 파도는 자성의 파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 파도에 있는 것이 즉문이다. 만약 이 파도가 아니면 곧 저 파도가 없고 만약 저 파도가 아니면 곧 이 파도가 없는 것은 중문이다. (‘도신장’)
의상 스님은 이 즉문의 연기법 역시 수십전유로 보이고 있으니, 일즉십(一卽十)은 향상거(向上去), 십즉일(十卽一)은 향하래(向下來)로 설명한다.
향상거의 경우, 첫째는 하나이니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하나가 곧 열이다. 만약 하나가 없으면 열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즉십은 하나에서 열로 올라간다.
향하래의 경우, 첫째는 열이니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열이 곧 하나이다. 만약 열이 없으면 하나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즉일은 열에서 하나로 내려온다. 나머지 여덟 문은 예에 준하니, 이 뜻으로 하나하나의 동전 가운데 열 가지 문을 갖춘다고 한다.
그래서 수십전유로 보인 동전을 초발심보살의 공덕에 견주고도 있다. 즉 ‘처음 발심한 보살의 일념(一念) 공덕이 다할 수 없다.’(‘초발심공덕품’)는 교설은 첫째 동전과 같으니, 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없음을 드러내는 까닭이다. 또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地)의 공덕’은 둘째 동전 이후와 같으니, 다른 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그리고 하나의 동전이 곧 열 동전인 일즉십(一卽十)은 “처음 발심한 때에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범행품’)는 도리와 같으니, 수행의 바탕[體]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상 스님은 연기실상다라니를 수십전법으로 설명하면서 “만일 연기 실상의 다라니법을 보고자 하면 먼저 마땅히 수십전법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균여 스님도 의상 스님의 이 말씀에 주목하고 보현행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수십전법의 방법을 따라 연기관을 배워야 할 것을 강조한다. “수십전법은 생사에 집착하는 병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약이고, 열반의 걸림없는 공덕을 이루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다”라는 ‘개종기(開宗記)’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더하고 있다.
“만약 수십전법을 배우면 보는 곳마다 집착이 없게 되고 듣는 곳마다 집착이 없게 되므로 생사에 집착하는 병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약이라고 하였다. 수십전법을 배우면 자기 몸을 떠나지 않고서도 하나하나의 터럭 구멍에서 많은 부처님을 뵙고, 하나하나의 티끌에서 많은 부처님 세계를 볼 수 있으며, 자신이 머무르는 곳이 부처님의 법계임을 보고, 또한 자기의 몸이 부처님 몸이고 자신의 마음이 부처님의 지혜임을 보게 되므로 열반의 무애 공덕을 이루는 가장 뛰어난 가르침이라고 하였다.”(‘일승법계도원통기’)
균여 스님은 또 이러한 수십전법에서 세로로 나열된 열 개의 동전에 세 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낱낱 동전 자체는 체전(體錢)이고, 첫째 내지 열째 동전은 위전(位錢)이고, 하나 가운데 열이고, 하나가 열인 동전은 덕전(德錢)이다. 같은 동전인데 연 따라 다르고, 연 따라 다르지만 동전 자체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가 열이고 일체이니, 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함에 중생의 수에 걸리지 않는다. 선재동자의 선지식 가운데 자재주동자는 이러한 산수를 잘하는 해탈문을 보이고 있다. 화엄법계의 계산법은 하나가 일체이고 일체가 하나인 셈법임을 알 수 있다.
설잠 스님은 하나의 법이 있으므로 일체가 있고 일체가 있으므로 하나가 있으며, 중생이 있으므로 제불이 있고 제불이 있으므로 중생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와 일체, 중생과 제불이 둘이 없고 걸림 없음을, 송대 야보도천(冶父道川) 선사의 게송을 빌어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죽영소계진부동 월천담저수무흔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대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먼지가 일지 않고, 달빛이 못 바닥을 뚫어도 물에 흔적이 없다.(‘화엄일승법계도주’)
‘야마궁중게찬품’의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는 상즉 법문은, 단적으로 중생이 부처임을 깨닫게 해준다.
마음이 중생이고, 마음이 부처이다. 내가 중생이냐, 내가 부처이냐는 마음쓰기 나름이다. 요즈음 ‘내안의 나’를 만나러 힐링의 길을 떠나는 이들이 많다. 내안의 나를 만난다는 것은 참 나를 만나는 것이고, 참 나를 만난다는 것은 본래의 나를 만나는 것이다. 본래의 나는 바로 부처님이니, 본래의 나인 부처님을 만남은 부처님과 다르지 않은 중생들을 만남이다. 나와 더불어 있는 모든 존재가 바로 나임을 보게 되면, 일체에 걸림 없이 자재한 삶의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