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한 가정, 그리고 가족 간 우애
그제 오(관우) 원장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오 원장님은 어머님 1주년 추도예배를 드린다고 하셨다.
작년 이맘때 오원장님 모친께서 돌아가셨을 때 제주도에서 1박 2일 동안 머물렀다.
오 원장님은 전화로 “내일 김포공항에 함께 가자.
아침 8시 반까지 너희 집으로 갈게.
제주에서 올라올 동생네 식구들을 픽업해 의정부 ‘영화교회’로 갈 거다.”라고 하셨다.
어제 아침, 평소처럼 하던 일을 하면서 오 원장님 전화를 기다렸다.
그런데 ‘제주공항에서 10시 출발’로 바뀌었다면서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셨다.
아빠는 그때부터 ‘12시 30분까지 의정부 용현동 도착’을 염두에 두고 이런저런 궁리를 했다.
‘집에서 책을 읽다가 오 원장님께서 집으로 오시면 함께 김포공항으로 갈까?
김포공항에서 동생네 식구들을 태우고 만가대 마을을 지나갈 때 거기서 만나 동행할까?’
원래 어제는 오 원장님과 같이 김포공항에 가기로 했기 때문에 등산 계획이 없었다.
그러다가 오 원장님 동생네 식구들이 김포공항에 늦게 도착한다고 해 생각을 바꿨다.
김포공항으로 출발할 때까지 집에서 기다리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시간이나,
수락산 들머리까지 지하철로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산완료 시각 12시 30분’을 예정하고 산에 오르기로 맘먹었다.
장암역까지 가면서 <총·균·쇠> 50쪽 정도를 읽음으로써 이제 600쪽을 넘어섰다.
앞으로 읽어야 할 분량이 100여 쪽 정도 남았다.
그동안 <총·균·쇠>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다.
09시 49분, 장암역을 나서자마자 석림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노강서원 직전에서 좌측으로 진입해 10시 17분에 석림사 능선 위에 올라섰다.
10시 34분에 첫 번째 전망바위, 10시 37분에 두 번째 전망바위를 밟았다.
10시 48분, 세 갈래 갈림길(장암역-주봉-도정봉)에서 도정봉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11시 정각에 도정봉 앞에 섰으나 거기서 쉬지 않고 곧장 만가대를 향해 내려갔다.
도중에 하산완료 때까지 걸릴 시간을 어림잡아보니 다소 여유가 있었다.
천천히 걷다가 물속에 발을 담근 채 잠시 머물렀다 가려고 계곡으로 접근했다.
양말을 벗고 흐르는 물속에 발을 넣자마자 빼야 했다.
피부에 닿는 햇볕은 뜨거울 정도였지만 계곡물속은 아직 얼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등산로로 올라와 조금 내려가니 벤치가 설치돼 있는 쉼터가 나타났다.
거기서 오 원장님께 전화를 걸어 몇 시쯤 만가대에 도착할 수 있냐고 물었다.
오 원장님께서는 좀 늦어질 것 같으니 그냥 걸어가라고 하셨다.
숲속 벤치에 앉아 30분 정도 책을 읽다가 내려가 오 원장님 차를 타고 함께 가려고 했는데.
만가대 초소 앞을 12시 정각에 지나갔고, 12시 30분에 ‘영화교회’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안녕하세요!”라고 큰 소리로 인사했다.
1층 모임 공간에는 아빠가 모르는 몇몇 분들이 계셨다.
잠시 후 안 보이시던 사모님께서 수박 여러 조각을 담은 쟁반을 들고 나타나셨다.
아빠는 화장실에 들러 얼굴과 손을 간단히 씻고 나와 시원하고 달콤한 수박을 입에 넣었다.
땀을 흘린 후 먹는 수박 맛, 그 기분이 어땠겠니?
10여 분이 지난 후 의정부 친구 신강호(아들에게 수학을 가르쳐준)가 도착했다.
거의 같은 시각에 오 원장님 가족들이 속속 들어오셨다.
동시에 미리 와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에스더가 남편과 함께 나타나 인사했다.
그때를 맞춰 목사님께서 밖으로 나오셨다.
몇 분 후 위층에 있는 예배당으로 올라가 오 원장님 어머님 1주기 추도예배를 드렸다.
오 원장님 어머님의 한 평생은 자녀들과 그 후손들을 위한 헌신이셨다.
목사님께서는 당신의 묵묵한 기도의 힘이 오늘날 후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고 하셨다.
추도예배를 마치고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한정식 집으로 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식사 후 오 원장님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여동생 별장(양평)으로 이동했다.
서울 가서 술이나 한잔 하자는 오 원장님 제안에 강호는 괜찮다고 하면서 집으로 갔다.
오 원장님께서는 할머니를 뵈러 가는 아빠를 워커힐실버타운 안까지 실어다주셨다.
한밤중 잠자리에 들기 직전 방이동 작은아빠가 전화를 걸어왔다.
술이 적당히 된 상태였던 작은아빠와 생맥주 500cc를 놓고 오늘 새벽까지 얘기를 나눴다.
이화여대에서 있었던 ‘한국언론학회’ 모임에서 발표한 ‘공감지수’가 호평을 받았다고 했다.
공감지수는 작은아빠가 기획위원으로 있는 ‘함께하는 경청포럼’에서 개발했다고 했다.
작은아빠는 7~8년 후 강원도 인제로 내려가 생활하겠다고 했다.
미리 그곳에 땅을 사 사과나무를 심고 주말마다 내려가 농사를 배우겠다는 것이었다.
작은아빠 대학 선배가 함께하는 제천 어느 대안공동체에 5천만 원을 출자(기부)하겠다고 했다.
아빠에게도 계좌번호를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사양했다.
아빠처럼 한국행정연구원 000 박사께서도 작은아빠에게 빨리 박사논문을 쓰라고 권했단다.
작은아빠는 교수의 길보다 젊은이들이 줄어드는 농촌으로 가겠다면서 보류하겠다고 했다.
술에 취했을 때 작은아빠는 늘 “형(아빠)보다 더 나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고 말한다.
아빠는 우리 집안 장남으로서 항상 동생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단다.
할머니께서 가장 중히 여기는 것은 형제 간 ‘우애(友愛)’이다.
할머니 손에서 자란 아들 역시 언제나 가족을 소중히 여기면서 동생들에게 잘하길 바란다.
대한민국 모든 장병들과 함께하는 태풍부대 육군18사단 상병 김0, 화이팅!!!
첫댓글 짜임새있게 생활하는 모습..
아름답습니다..
고맙습니다.
즐거운 저녁 되시길 바랍니다.
에릭님
늘 글과 사진을 보면서 많은것을 배우게되어서 고맙습니다.
형제 간에 우애...
참 멋지십니다.
고맙습니다.
저녁시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주말 역시 등산 하셨네요 ㅎ
편안한 밤되십시요~
새로운 한주도 화이팅입니다^^
고맙습니다.
늘 좋은 일만 일어나길 기원합니다.
항상 일정한 생활이 대단해 보이십니다.
전 물론 아이들이 있긴하지만 등산은 언제했는지도 기억도 나지않고 한다해도 날잡고 가야할듯해서 부럽기만 합니다.
고맙습니다.
아이들을 훌륭하게 양육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멋진 에릭님.
참 대단하십니다.
가족의 사랑도 대단하고요...
고맙습니다.
윤 교수님 가족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동생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