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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9. 묵상글 ( 주님 수난 성금요일. - 목마르니 참으로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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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9. 주님 수난 성금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목마르니 참으로>
“목마르다.”(요한 19,28)
빛이
빛이기에
꺼뜨려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빛에 목마르니
참으로 빛이다
사랑이
사랑이기에
버림받는 순간에도
여전히 사랑에 목마르니
참으로 사랑이다
베풂이
베풂이기에
빼앗기는 순간에도
여전히 베풂에 목마르니
참으로 베풂이다
섬김이
섬김이기에
짓밟히는 순간에도
여전히 섬김에 목마르니
참으로 섬김이다
살림이
살림이기에
죽임당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살림에 목마르니
참으로 살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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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9. 주님 수난 성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3. 28. 성목요일 강론글 말미에 --
내일과 모레 강론은 올리지 않겠습니다.
남은 성주간 잘 보내시고
부활 대축일에 기쁘게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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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9. 주님 수난 성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6.25 전쟁 때, 외국에서 파견된 한 군의관이 추운 겨울에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리 밑에 벌거벗은 한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기에 동사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품에서 한 아기가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여인은 자기의 모든 옷을 벗어 아이를 덮어주고 자신은 얼어 죽은 것이었습니다. 이 군의관은 다리 밑 양지바른 곳에 여인을 묻어주고, 이 갓난아기를 자기의 양녀로 삼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기가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 군의관은 성인이 된 양녀를 데리고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다리 밑 무덤을 찾아가서, 무덤의 주인공이 너의 생모였고 너를 살리기 위해 얼어 죽었음을 말해 주었습니다. 딸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잠시 뒤에 자기 재킷을 벗어 무덤을 덮으며 말했습니다.
“엄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의 사랑을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사랑이 중첩됩니다. 주님께 우리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 그때 얼마나 외롭고 아프셨어요?”
오늘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특별히 수난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얼마나 외롭고 아프셨을까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향해 침을 뱉고 뺨을 때리는 멸시와 배척을 표시합니다. 무한한 사랑만을 전해주신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은 그 사랑을 그대로 되갚아 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악의에 찬 목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결국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다 이루어졌다.”라는 한 마디만 남기시고 말입니다. 멸시와 배척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또 악의에 찬 목소리에도 묵묵히 계십니다.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묻히십니다. 주님의 고통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 역시 완벽한 사랑의 실천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에 진정으로 보답하는 것이며, 주님과 함께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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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은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당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로레타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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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9. 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는 인간의 역사와 보이는 역사 속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보이는 역사 안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를 우리는 흔히 신비라고 부릅니다.
사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통이나 슬픔, 악이나 죽음 등은 심각한 도전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우리의 무력함과 연약함, 혼란과 비참함은 우리의 존재자체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부당한 처사나 불의의 사고나 재난 등은 참으로 우리를 참담하게 만들고 슬픔과 고통 속으로 몰아갑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당한 사건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계획된 악이 저지른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그분의 수난은 사고가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 죽음은 (성경에 이미)‘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악할 만한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는 신비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그 고통이 기쁨이요, 그 패배가 승리요, 그 배척이 사랑이요, 그 어둠이 빛이요, 그 죽음이 생명이요 구원이라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신비입니다. 또한 그 무력함은 전능함 안에서, 그 비참함은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결코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이해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신비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길을 능동적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결연하게 가십니다. 어둠 속을 걷되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패배 당하되 승리로 나아가며, 죽음의 길로 걷되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로 제시해주십니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본래의 당신의 사랑에로 되돌아오게 이끄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요, 동시에 완성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한다.
“십자가의 하느님의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저 함성의 신비를 들으십시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결코 비통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경배하며, 승리와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설혹 가슴 쓰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네 가슴이 심하게 쓰리고 아려올 때, 바로 그 때가 오히려 우리 안에서 사랑의 십자가를 꽃 피우시고 계시는 그분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 고통 안에서 예수님을 관상하여 할 때입니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안에 옵니다. 곧 십자가의 고통이 끝난 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십자가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우리의 죽음 위에서 싹을 틔웁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그 속에서 당신의 참된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는 죽음의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퍼주고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이토록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신비, 곧 죽음을 통한 사랑의 신비를 살아갑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는 당신 사랑의 십자가를 입 맞추며 경배합니다.
오, 참으로 아름다운, 이토록 시린, 우리의 말문을 막는, 형언할 수조차 없이 강한, 사랑의 십자가여!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주님!
오늘도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나의 허약함과 악 앞에 서 있습니다.
당신의 고통과 죽음 속에 감추어진 신비를 알게 하소서.
그 사랑을 알고, 그 신비를 살게 하소서.
고통에서 기쁨을, 패배에서 승리를,
어둠에서 빛을, 죽음이 생명을 이끄소서.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어가고,
패배 당하여도 승리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네 쓰린 가슴에서 사랑을 퍼 올리소서.
무력함이 전능함 안에서, 비참함이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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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9. 주님 수난 성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십자가 없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존재하지 않으며 십자가는 제대 위에 항상 놓아두어야 하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그분 스스로 짊어지신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적으로 생각하면, 십자가는 패배요, 절망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그 십자가가 희망과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3)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차마 피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이 넘쳤고 의인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죽음이었기에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하고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악의 고리를 끊어야만 하였기에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길이기에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을 살리는 길이었기에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이 살아있는 책”(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한국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님은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님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오 하느님, 죽어서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습니다. 죽음도 서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1,24). 하고 콜로새 공동체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고 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서 그분처럼 사랑을 증언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일상에서 오는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십자가는 여러분은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성녀 쥴리 빌리아르).
오늘 십자가 경배를 통하여 사랑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을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하고 기도한 순간들이 헛구호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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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9. 주님 수난 성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재임 중에 한국을 2번 방문하였습니다. 1984년 5월에는 103위 시성식을 위해서 방한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신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여의도에서 시성식이 있었고, 저는 현장에서 자리를 정리하는 질서요원으로 봉사했습니다. 1989년에는 제44차 성체대회를 위해서 방한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신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여의도에서 파견미사가 있었고, 저는 성체분배를 하였습니다. 한국을 방문한 참가자들에게 행사장소로 안내하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 신학교에서 미사를 하였을 때입니다. 저는 중앙 통로 자리에 있었고,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져서 하혈이 멈추었던 것처럼 교황님의 제의가 제 발에 스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발을 살짝 통로 쪽으로 내어 놓았습니다. 어쩌면 사제가 되고자 하는 간절함이 제게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제가 되었고, 33년 동안 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2005년 4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그때 교황님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2009년 2월에 선종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세요.” 교황님과 추기경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은 성금요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복음을 전하셨고, 말씀과 표징으로 새로운 권위를 보여주셨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7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 일곱 가지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삶을 통해서 꼭 실천하도록 권고합니다. 오늘 성금요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나의 영혼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반당하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3번이나 넘어지시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극한의 고통 중에 하느님의 침묵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그러니 절망 중에, 고통 중에 예수님께 의탁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짐을 진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노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목마르다.’입니다. 2000년 전에는 제자들의 배반 때문에 목이 마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의 외침 때문에 목이 마르셨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 때문에 목이 마르셨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목이마르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신앙인들 때문에 목이 마르십니다.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기 보다는 취미 활동과 재물에 더 관심이 있는 사제들 때문에 목이 마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렸던 베로니카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목마름을 우리들이 희생과 선행으로 채워드려야 합니다. 네 번째는 ‘다 이루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 중에는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는 신앙의 길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 번째는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성모님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요셉성인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합니다.
여섯 번째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죄인은 삶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가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 죄인은 구원받았습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절대평가입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커다랄지라도, 아무리 우리 죄가 많다할지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유다는 희망을 버렸고, 구원의 길에서 멀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절망을 버렸고, 뉘우치고 회개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 중에는 ‘나는 안 돼!’라는 열등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새도, 들의 꽃도 다 헤아리시는 분입니다. 일곱 번째는 ‘어머니 이 사람이 아들입니다. 이분이 어머니시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제자를 아들로 돌보아 주기를 부탁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금요일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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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9. 주님 수난 성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거룩한 종교의 상징이 왜 하필 사람 죽이는 형틀인 십자가였을까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일등 공신들이었던 제자들은 사실 십자가의 주님을 그리 가까이서 보지 못했습니다. 겁이 많아서 멀찌감치 어딘가 숨어서 봤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부활한 주님은 가까이서 만져보기도 하고, 함께 식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활한 예수님의 모습을 신앙의 상징으로 삼지 않고 굳이 말라 쪼그라든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 죽음의 형틀을 상징으로 삼았을까요.
여타 종교들의 신상들은 영광과 위엄을 드러내는 고품격의 상들입니다. 신앙하는 대상이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상징은 다른 종교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다른 종교들의 상징은 구도의 길을 걸어온 결과로써 얻을 수 있는 영광스러운 결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십자가 상징은 그 결과인 부활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로 향하기 위한 과정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몸을 날씬하게 하려고 비싼 돈을 들여 운동기구를 사놓았습니다. 그 운동기구를 살 때는 날씬한 모델이 광고했기 때문에 나도 그 운동기구만 있으면 그렇게 되겠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날씬한 모습만 꿈꾸면서 땀 흘려 운동은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과정이 낳게 될 훌륭한 결과만을 미리 맛보게 되면 그 과정에 소홀하기가 쉽습니다. 어떻게 굴러가든 이 과정 자체(종교 생활) 에 몸만 담고 있으면 나도 저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이 될 거라고 하는 안일한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지 않습니다. 단지 십자가가 부활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그 위에 달린 사람의 직접적인 증거를 통해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피하고 행복만을 추구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게으른 본성에 대한 경고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에만 가고 싶어 하지 예수 믿고 십자가 지는 것은 피하고 싶어 하는 우리 본성을 비추어 주는 등대와도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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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회
요즘 들어 많이 생각나는 음식이 있습니다.
미나리와 깻잎
그리고 한치를 썰어 버무린 한치회~
학창 시절 가족과 함께 회식으로 즐겼던
그 한치회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많던 한치 횟집은 다 어디 간 걸까요?
이제 추억이 된 한치회~
아쉽지만….
그래도 추억으로 남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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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9. 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예수님처럼
-주님의 섬김의 종답게, 순종의 대사제답게, 진리의 왕답게-
오늘 수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평생 삶이 보입니다.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인간 만물상 같습니다. 여러분 얼굴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정과 죽음을 통해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문하게 됩니다. 오늘 요한의 수난복음은 물론 두 독서를 보면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믿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처럼 “주님의 섬김의 종답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종으로서 한결같이 섬김의 삶에 충실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전생애와 수난과 죽음을 통해 그대로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의 실현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모습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수난의 의미가 환히 드러납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때문이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온전히 “우리를 위해서”라는 주님의 종, 예수님의 삶입니다. 죄로 이지러진 우리의 실상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주님의 종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 수난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깊이 감지되는 무죄하면서도 참된 사람으로서 주님의 종의 모습이 우리를 회개에로 이끕니다. 주님의 종처럼, 섬김의 종으로서 이웃을 위해 주님의 종답게 살도록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둘째, 예수님처럼 “순종의 대사제답게” 사는 것입니다.
대사제답게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제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모두 주님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수난과 부활을 통해 대사제 예수님을 발견했고 그들의 고백은 옳았습니다. 히브리서의 고백은 우리에게도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우리의 곤궁한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대사제 예수님은 철저히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 새삼 우리 인생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가는 순종의 학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전생애를 요약한다면 섬김과 순종일 것입니다. 주님의 섬김의 종으로서 일관하셨고, 순종의 대사제로 일관된 삶이셨습니다. 말그대로 모든 고난을 순종의 계기로 삼으셨으며 순종하는 모든 이의 구원의 되셨습니다.
오늘 수난복음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삶은 순종이자 순종의 여정입니다. 일상의 고난중에 크고 작은 순종의 여정에 충실할 때 대사제 예수님처럼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처럼 진리의 왕답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 수난기에서도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답게, 진리의 왕답게 존엄한 품위를 지니고 자신의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시다. 진리가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가 되어갈수록 자유로운 왕다운 삶입니다. 진리의 왕이신 주님을 닮아 진리의 연인으로 불리기를 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요 진리의 협력자로 불리기를 원한 베네딕도 16세 교황입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가 우리에게는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진리가 무엇이오?”
새삼 화두처럼 주어지는 빌라도의 “진리는 무엇이오?” 라는 물음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 묻는 빌라도는 바로 무지를 반영합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사랑하고 알아갈수록 예수님처럼 진리의 왕다운 삶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주님의 섬김의 종답게”, “순종의 대사제답게”, “진리의 왕답게” 참사람이 되어 살아갈 제자리는 어디일 까요? 바로 수난복음 후반부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성모님과 함께 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머물 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성모님을 모시고 평생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유언같은 당부 말씀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자매님들은 “어머니의 딸입니다.”로 바꿔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이어지는 당부는 믿는 모든 이들에 해당됩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어머니 성모님을 모신 애제자가 상징하는바 우리 믿는 모든이들입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주님의 종답게, 대사제답게, 왕답게 참사람이 되어 살아가야할 영원한 삶의 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성모님과 함께 뿐임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는 대로 죽습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잘 살아야 잘 떠나는 선종의 죽음입니다. 오늘 수난 복음중 예수님의 마지막 임종어가 예수님의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요약합니다. 참사람이 되어 잘 살다 잘 죽고 싶습니까? 미리 묘비명이 될 임종어를 정해놓고 좌우명 삼아 사시길 추천합니다. 제 경우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 좌우명 고백시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임종어가 그대로 예수님의 평생 삶을 요약하면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과 죽음이 되게 합니다. 평생 진리에 목말라했던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진리이신 하느님을 목말라했습니다.
“목마르다”
그리고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한 삶이요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께 맡기는 삶입니다.
“다 이루어졌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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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9. 주님 수난 성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0)
영은 그리스도의 뜻을 거슬러 떠나지 않는다
영이 육체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영의 죽음은 하느님께서 영을 버리셨음을 뜻합니다. 육체의 죽음은 영이 육신을 버렸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죽음이 벌인 까닭입니다. 육신이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버렸기 때문에 영이 할 수 없이 육체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은 자기가 원치 않아도 육체를 버려야만 합니다. 육신이 자신의 의지로 하느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은 육체가 자기 자신에게 폭력을 가해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는 한 자기가 원할 때 육체를 버릴 수도 없습니다. ‘중개자의 영은 그분의 육에 죽음이 온 것이 죄 때문이 아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원치 않는데 억지로 육을 떠나신 것이 아니니까요. 그분의 영은 그분께서 그렇게 되기를 뜻하셨기에 떠났으며,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 그분께서 바라신 방식대로 떠났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께서는 육과 완전하게 결합되어 하나를 이루고 계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도 있고 그것을 다시 얻을 권한도 있다”(요한 10,18).
-아우구스티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5 만물이 존재의 평등을 공유하고 있다
한 대가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을 종종 묵상한다고 합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루카 1,28).
마리아가 은총을 가득히 받았다고 해도, 내가 은총을 가득히 받지 못했다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셨다고 해도, 내가 그 아들을 낳지 못했다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로 하느님은 지금도 완전한 영혼 안에서 아들을 낳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분만용 침대에 누워 계신 것은 하시는 일마다 아들을 또다시 낳기 위해서입니다. 한 이교도 여자가 야곱 족장의 아들 요셉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신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일마다 하느님이 환히 빛나니까요”(창세 39,23 참조).
우리가 아들 안에서 성령과 연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들과 더불어 아버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사랑으로 아들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 안에서 아들을 사랑해야 합니다.(145)
✝️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세례는 새로운 창조
여러분은 오늘 교회의 지도자인 바오로 성인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사람이 됩니다”(2코린 5,17).
이 말씀에 대해 우리가 눈에 보이는 창조물을 언급히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믿으면”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 말씀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발견하면, 그는 그리스도 앞에 새로운 창조물로 서 있는 것이 됩니다. 나쁜 길에서 벗어나 좋은 길로 걸어가게 되고, 착각에서 벗어나 진리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하늘을 보게 되고 새로운 창조의 영역을 얻는 것과 같은 큰 이익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오로 성인이 의미하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말을 덧붙입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이 말씀으로 그는 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죄의 무거운 짐을 마치 겉옷을 벗듯이 벗어 버린 사람은 오류로부터 해방된 사람이고, 정의의빛으로 빛나는 사람이며, 새롭고 빛이 나는 임금의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탐닉과 무절제 속에서 살던 어떤 사람이 갑자기 절제되고, 단순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 기쁨을 가진다면 이것은 참으로 새롭고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이전에 절제를 모르고 완전히 이 세상의 쾌락에만 몰두하던 사람이 예기치 않게 갑자기 자신의 욕망의 주인이 되어 더 이상 육체 속에 살지 않는 사람처럼 절제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간다면 이것은 참으로 새롭고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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