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의 경우 더욱 화가 날만 했다.
1990년 초에 KBS에서 '야망의 세월' 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될 때,
유인촌이 이명박 역을 맡고 유동근의 아내인 전인화가 이명박의 아내 역을 했는데
역시 외압으로 조기 종영되었기 때문이다.
부부가 교대로 똑같은 상처를 10년 만에 입은 셈이다.
'야망의 세월'도 처음 극중의 배경은 70~80년대의 현대그룹이었고,
주인공은 정주영 회장과 이명박 두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중반 이후부터 인기 탤런트 유인촌의 배역인 이명박 역할이 부각되고
시중의 관심이 높아지자 제작진에게 보이지 않는 정치적 압력이 가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작가가 의도한 대로 결말을 맺지 못하고
1년여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정 회장 사후에 이명박의 회고에 의하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야망의 세월' 에서 이명박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져감에 따라
정주영 회장과의 관계도 껄끄러워졌다고 한다.
당시 일에 치어 살던 이명박이 드라마 볼 시간이 없어 관심을 갖지 않은데 비해,
정 회장은 극중 등장인물인 자신과 이명박의 역할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인기 작가들과 교분이 있었던 정 회장은
드라마의 전개에 대해 직접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고,
이명박의 면전에서 못마땅한 점을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통이 큰 정 회장도 비록 이명박이 현대그룹 신화를 일으킨 동반자이기는 하나,
정치적으로는 껄끄러운 경쟁자가 될 수 있다는 예감을 가졌다고 봐야 한다.
냉정하게 보면 드라마 자체는 어디까지나 픽션이고 드라마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시청자들이 착각에 빠져서 시청하는 위험성보다
위정자들이 알아서 기는 위험성이 훨씬 심각하다
그런 얼빠진 여당의 위정자들이 보기에
KBS의 '야망의 세월' 은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 제목부터 이명박의 야망을 연상시켰을 것이다.
더구나 MBC의 '영웅시대'는 안 그래도 못마땅한 이명박을
너무 일찍 영웅으로 부각시킴으로써
후일 큰 후환(?)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미련한 확신을 갖게 했다.
비열한 정치가 내린 결론은,
'이명박이 뜨는 드라마는 무조건 만들어서는 안 된다' 는 것이었다.
국민들은 외압 때문에 드라마가 제 수명을 못 채운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말이다.
말로만 '참여정부' 이지
언론에 간여하는 비겁한 행태를 보면 '참견정부' 라고 하는 게 옳다.
드라마 '영웅시대' 가 70회로 종영되는 시점에서, 집필했던 작가 이환경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외압설 제기의 배경을 밝혔다.
그는 " '영웅시대' 1부 시작 전 MBC가 아닌 외부의 인사로부터
'앞으로 무엇 무엇을 조심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
이라는 경고성 전화를 직접 받았다." 고 주장했다.
이어 "MBC도 외부로부터 모종의 압력을 받고
조기 종영하는 것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고 했다.
그는 마지막회 대본을 극의 종결 상황에 걸맞게 쓰지 않은 것이
조기 종영에 대한 항의가 아니라고 했지만.
"나중에 기회가 오면 이 드라마를 다시 이어서 하려고
그렇게 진행형으로 남겨뒀다." 는 말을 통해
언젠가 그런 기회가 다시 온다는 확신을 가진 듯했다.
'야망의 세월' 과 '영웅시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사라진 이 비운의 TV 드라마를 통해 공중파 방송의 위력과 더불어
대한민국 정치의 유치한 현주소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김대우 저(라이언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