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오늘 전국장로대회 둘째 날을 맞이합니다.
어제 첫날의 강의는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도전을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도 선입관을 버리고
주님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판단하는 마음과 부정성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덮어 정결케 하옵소서.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예후의 제칠년에 요아스가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2.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3.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4.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성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모든 은 곧 사람이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5.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자에게서 받아들여 성전의 어느 곳이든지 파손된 것을 보거든 그것으로 수리하라 하였으나
6. 요아스 왕 제이십삼년에 이르도록 제사장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는지라
7. 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위하여 드리게 하라
8. 제사장들이 다시는 백성에게 은을 받지도 아니하고 성전 파손한 것을 수리하지도 아니하기로 동의하니라
(본문 주해)
1~3절 : 북이스라엘 예후가 왕이 된 지 칠 년에 요아스가 남 유다의 왕이 되어 사십 년을 통치한다.
요아스의 어머니는 브엘세바 사람 시비아이다.
본문은 요아스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제사장 여호야다가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지만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백성들이 그곳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산당은 솔로몬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 여호와께 제사와 분향을 드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산당은 이방종교화 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산당을 제거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4~8절 : 요아스가 명령하기를 성전에 드려지는 은으로 성전의 파손된 곳을 수리하라고 한다.
4절은 성전에 드려지는 세 가지 헌금을 말한다.
첫째, ‘사람이 통용하는 은’(새번역 : ‘일반헌금’)은 사람의 숫자를 헤아려 드리는 성전세로서 인두세의 성격을 띤다. 이 성전세는 빈부를 막론하고 각 사람이 생명의 속전으로 반세겔씩 여호와께 드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둘째,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새번역 : ‘의무적으로 부과된 헌금’)은 남녀노소의 차이에 따라 드리는 성전세로서, 20세 이상 60세까지의 남자는 은 50세겔이요, 여자는 은 30세겔을 바치게 되어 있다.
셋째, ‘자원하여 드리는 은’(새번역 : ‘자원하여 성전에 가져오는 헌금’)은 특별한 경우에 드리는 감사예물이다.
그런데 아하시야와 아달랴에 이르기까지 바알 숭배가 만연했다. 비록 요시아가 왕위에 올라 온 백성이 기뻐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백성들의 성전 생활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성전에 드리는 헌금이 빈약했으니, 레위인의 생활도 팍팍하였고 또 거기서 남은 돈이 없으니 성전을 수리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전 수리비용을 제사장들이 각자 아는 사람들에게 모금을 해서 하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요아스가 왕이 된 지 23년이 되도록 제사장들이 이 일을 진행하지 못했다. 요아스의 나이가 30세가 되도록 지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해서 돈을 모금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자 요아스가 다시 명령을 내린다.
그것은, 아는 사람 중심을 모금하던 것을 멈추고, 백성들로 하여금 직접 헌금에 참여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헌금을 제사장이 관여하지 말고 성전 수리 담당자가 직접 받아서 행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은 백성으로부터 돈을 받지도 않고 직접 성전을 수리하지도 않기로 동의하였다.
이제 제사장들은 성전 수리에 관하여 일절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나의 묵상)
요아스가 성전 수리에 힘썼다는 내용이 나오므로 요아스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긍정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정직히 행했다’(2절)는 것은 여호야다의 죽음 이후에는 부정적인 무엇인가가 있다는 의미이다.
역시, 역대하 24장에는 너무도 변질된 요아스를 만난다.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다.(대하24:18) 그리고 그것을 질책하는 제사장 스가랴(여호야다의 아들)를 돌로 쳐 죽인다.
여호야다의 가르침 속에서 아주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6년 간 자랐던 요아스이기에 바알 숭배를 없애고, 성전을 수리하려는 마음이 있었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그것이 아니다.
요아스가 즉위 23년이 되기까지 성전이 수리되지 못하고 있음은 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성전을 생활화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을 자기가 자란 환경적 차원과 국가의 정책으로만 생각을 하고 성전을 생활화하려는 마음은 갖지 못했던 것이다. 백성들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여전히 산당 제사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 결과 여호야다가 죽고 나자 사달이 난 것이다.(대하24장)
요아스는 성전을 보수하기는 하지만 성전 생활화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는,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이르지 못하는 신앙생활, 십자가에 연합되지 못하고, 자기만족의 종교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성전에서 자랐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이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말씀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아담적 본성-인간의 죄성-을 이길 재간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여호야다가 죽고 나니 그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어제 몇몇 강의는 도전을 주었다.
‘한신대에 저런 교수님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강의도 있었다.
기장의 문제점과 아픈 곳을 꼭 찝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해결로 제시한 것이 잠깐 스치듯 ‘기도해야 한다’는 것과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제시해 보이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 결론이 다시 행위주의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런 교수님과 사적인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교수요 박사님이지만 직접 주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교제함으로,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십자가를 붙드는 신앙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십자가에 연합되는 삶을 살지 못하면 결국 요아스처럼 된다. 여호야다가 죽고 나니,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교회를 다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속으로는 자기소원 성취의 우상을 섬기는 모양이 되는 것이다.
요아스의 변질은 언제나 두려운 마음이 되게 한다.
하지만 아담의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 중에 스스로 주님의 길을,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오직 성령께서만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하신다.
성령은 그저 내가 ‘성령충만’을 외친다고 오시는 것이 아니다.
잠잠히 말씀 앞에 나아가 주님과 교제할 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나의 죄를 보게 하시고,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게 하시고, 자기를 부인하게 하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성전에서 자라났던 요아스가
성전을 수리시킬 때 ‘역시 요아스’인 줄 알았습니다.
알고보니 ‘역시 죄인’일 뿐입니다.
겉으로 아무리 착하고 위대한 일을 한다 해도
십자가에 연합되지 못하면
곧 우상숭배와 자기의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주님,
말씀이 아니면 지금쯤 어쩌고 있을까 생각해 보니 참 끔찍합니다.
소위 ‘주의 일’이라고 많은 것으로 저 자신을 포장하고 치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시면 단 일 초도 봐 줄 것이 없는
연약한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