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과 걸거리에는 역사의 윤회가 있는가? 상징이라는 은유가 뿌리를 내리고 개인과 전체를 우리라는 이름의 역사적 밑거름으로 싹틔우고 고사시키는가? 화려함의 속이 참 무섭다.
오래된 역사가 버티고 있던 그 대문 밖에는 그 안 만큼이나 아픈 또 다른 역사들이 우글거리고 다닌다. 그때의 그 골목거리는 어린 낙오자들이 방랑의 시작을 시험하는 거리였다. 난생 처음 뽑히는 제도에서 밀려져 버린 울분의 희망들은 낙오자란 멍에를 지고 세상에 반항하는 갈등의 거리였다. 소 팔고 땅 팔아 올려 보낸 늙은 부모의 가슴은 광화문 하늘들만 올려 놓았었다.
명동에 가도 안암골에 가도 이태원에 가도 신촌에 가도 배지도 달지 못한 고만 고만한 재수생이라는 것들이 허망한 이름표를 달고 나도 좀 봐 달라는 듯이 속 고개만을 버쩍 쳐들고 풀죽어 당구장에들 있었다. 누구든 걸리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결기로.
그러나 누구하나의 눈길을 받지 못하고 광화문 밖으로 다시 돌아와 오늘처럼 차가운 맨바닥에 등을 붙였다. 내일의 꿈은 차가운 벽돌 바닥이라는 것을 깨닫고.
가슴 속 불이 꺼지지 않아 그저 멀리 달린다. 의정부로 쌍문동으로 마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기세로! 그 거리가 광화문과 쌍문동 만큼의 거리였고. 나를 보고 계시는 분의 모습이었다.
도봉산에 오르지도 못하고 발치에서 바라보며 그때부터 분노와 좌절을 보았다. 그 거리가 그 광장이 희망을 부르짖으며 분노의 광장으로 바뀌어 오늘도 여전히 갈등의 가슴들이 타고 있으니 이 거리의 역사 의미는 무엇일까? 오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미성숙의 비린내음으로 그 땅에서 끓는 피의 냄새가 나니 언제나 함께 흠향할 수 있는 우리의 향내를 피울 수 있을까?
첫댓글 散文인가요? 韻文인가요?
의문의 거리 앞에 서니 의문이 생깁니다 ^^*
산문이지요!
조선시대에는 육조(六曹)거리 이고
일제강점기에는 광화문통(光化門通)으로 변경되었고
이제는 광화문광장(光化門廣場)이라 하지만
붉은 악마들의 집회장소가 되고 마네요. 감사합니다.
역사적 아이러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