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던가.
초록과 황토를 가르는 일직선, 중국의 KTX인 객운전선(客運專線)이 보기에도 시원스럽다. 정주에서 낙양을 거쳐 서안까지 가는 고속전철인 것이다.
시속 250㎞ 이상 달리는 고속전철을 2020년까지 1만 2,000㎞ 건설할 계획이라 하는데. 그런 추세라면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철길도 그리 멀지는 않을지 모른다.
IC에서 빠져나와 탁 트인 공간에 자리한 함곡관(函谷關) 여유구(旅游區). 도착한 시각은 10시 40분. 디자인이 멋진 정문에 ‘도관고금(道冠古今)’이란 글씨는 고풍스럽다.
그리고, 첫 번째로 맞닥뜨리는 노자상(老子像)! 금빛이 찬란하다. 높이 28m, 구리 상에 황금 33㎏을 들이붓다시피 한 노자상은 팔공산 통일대불보다 훨씬 크다. 얼핏 어리둥절해진다. 청정(淸靜), 무위자연(無爲自然)―, 노자사상은 그런 것이 아니던가.
쉽게 생각하자.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절대 진리가 없이 갈수록 끝도 없이 팍팍해지는 인간살이, 신비한 존재에게 절대적 귀의를 하고 싶은 심정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라고.
노자상 옆으로 도덕경(道德經) 5천여 자가 돌판에 새겨져 있다. 한쪽은 도경(道經), 한쪽은 덕경(德經). 가서 다 읽으란 의미는 아닐 것이고, 누굴 기 죽이나. 거창하다, 세계 최대의 글자판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또 하나의 '천하제일(天下第一)'이 된다.
‘도가지원(道家之源)’이라는 글이 여러 곳에서 눈에 뜨인다.
노자가 주나라의 쇠퇴를 간파하고 서쪽으로 나가 은둔하려다가, 이 곳 함곡관에서 도덕경 5천여 자를 관원에게 구술해 주고, 그 후 소식이 끊겼다….
선생님 말씀이다.
그렇지만 도덕경이 노자의 저술인지는 분명치 않고 노자의 존재 자체도 분명치 않으며, 이런 분명치 않은 점을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노자와 도덕경을 인정하는 한, 함곡관이 도가문화의 발상지요 성지(聖地)임은 분명하다.
함곡관 앞. 넓은 개활지는 낙양 쪽이고, 누각 너머 좁게 파진 곳이 서안으로 가는 길, 옛 ‘장안고도(長安古道)’다. 오른쪽 언덕을 따라 황하가 흐르고, 행정구역은 삼문협시(三門峽市, 地級市로 우리의 광역시에 해당) 관내의 영보시(靈寶市) 함곡관진(鎭).
그 골짜기 위를 21세기의 30번 고속도로가 가로지르고 있다. 노자가 지나갔다는 그 서쪽 하늘에….
성문 뒤로 상자처럼 파진 좁은 골짜기, 바로 함곡(函谷)이 보인다. 몇몇이 폭 4, 5m의 좁은 길을 4, 5분쯤 걸었을까. 적막하고, 왠지 으스스해서 돌아섰다. 시간도 없었지만.
원래 내가 아는 함곡관은 노자와 도덕경에 관한 그런 휘황한 이야기가 아니다.
일부당관 만부막개(一夫當關 萬夫莫開), 필쟁의 전략요새, 문화교류의 인후부(咽喉部), 이런 방면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당태종, 이백, 두보, 백거이 등이 여기서 시(詩)를 읊고 부(賦)를 지은 100여 편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안치된 옛 표석을 쓰다듬어 본다.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이제 수목 사이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는….
삼문협댐(三門峽大壩) 풍경구에 왔다. 댐을 '대패(大壩, 따빠)'라 한다.
입구에 댐 공사전의 삼문협(三門峽)이 그려져 있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황하, 상류 쪽 급류의 세 섬 사이로 세 군데 협곡이 있는데 이름하여 신문(神門), 귀문(鬼門), 인문(人門).
이를 합쳐 삼문협(三門峽)이라 부르는데, 까마득한 옛날 우(禹)임금이 치수할 시절에 판 세 갈래의 배수협곡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삼문협은 고대에는 황하 중류의 물류 소통에 중요한 지점이었다. 아름답지만 험준한 지형은 소통에 지장을 주고, 당나라 이후 삼문협 상류의 장안(長安)은 역사의 주무대에서 밀려났다는데….
하여튼 세 섬을 폭파하고 콘크리트 댐을 만든 것이 삼문협댐이다.
광대한 황토고원을 흘러온 물, 댐 상류나 하류나 흙탕물일 뿐이다.
눈으로 보아도 그냥 흘려보낼 뿐, 물을 담는 담수(湛水) 기능은 없다. 홍수 조절은 몰라도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댐의 모습이나 풍광은 아니지 않는가. 황하 고수기(枯水期)에는 약간 물을 담는다지만.
1957년 착공 당시에는 홍수 조절, 발전, 용수 공급 등 다목적댐의 기능에다가 황하를 맑게 하여 푸른 물이 흐르도록 한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성인출(聖人出) 황하청(黃河淸)’, 모택동 치하에서 있음직한 아부성 주장도 있었다고 한다.
전문가가 지적한 ‘진흙모래(泥沙)의 퇴적’이란 문제가 예상보다 심각했던 것이다.
댐 하류 장공도(張公島), 옛날 장(張)씨인 뱃사공이 여기에 살면서 급류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을 구했다는 섬이다.
장공도 안 가장 큰 바위에 새겨진 ‘연단로(煉丹爐)’라는 붉은 글씨. 노자가 이 바위 위의 구덩이에서 선단(仙丹)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장생불사, 신비의 영약 같은 것을 찾는 사람이 있으니, 그 옛날은 오죽했을까. 도교의 단약으로 인한 폐해를 적은 기록도 많은 모양이다.
‘만리황하제일패(萬里黃河第一壩) 삼문협(三門峽)’.
내용은 거창한데 팻말이 보잘 것 없다. 일부러 흙탕으로 칠해 놓은 듯이.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최대의 역사가 여러차례의 보수공사로 빛을 잃었다.
그리고 이런 우연도 있는가.
당시 중국 최고의 수리공정전문가로서, 삼문협댐 건설에 유일하게 반대한 학자, 그의 이름이 황만리(黃萬里)다. 황하 만리를 책임지려는 듯 그의 격렬한 반대투쟁은 22년간 현대판 유배생활로 이어진다.
황만리는 장강 삼협댐(長江三峽大壩)의 건설에도 반대했다.
“삼협댐을 만일 건설한다면 결국은 폭파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는데…. 2001년에 생을 마감한 이 학자가 우리의 4대강 사업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다.
동해안에 가면 38선을 표시하듯, 제방 위에 하남 ․ 산서성의 경계를 표시했다.
‘한 걸음이 2개 성에 걸치다(一步跨兩省)’, 표현도 재미있고, 이런 데서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없다. 남들 따라 나도 한 컷.
이제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남성을 떠나야 한다. 허전하고 아쉽다.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하긴 석달이나 삼년을 산들 얼마나 알겠는가만. 사흘 동안 부지런히 다닌 걸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201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중국 제1위로 한때 1억 명을 돌파했던 하남성은 1천만 명이 빠져나간 9,400만 명으로, 연해지방의 광동(1억 430만 명), 산동(9,580만 명)에 밀려 3위로 추락하고 있다.
사람은 살기 좋은 곳, 일자리가 있는 것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수도권 시군 인구가 2,30년 전에 비해 약 3배 이상의 급팽창을 보이는 반면, 지방의 시군은 3분의 1 수준으로 오그라든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황하를 건너 이제 산서성으로 들어간다.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서쪽이라 해서 ‘산서성(山西省)’, 더 서쪽은 황하를 건너 섬서성(陝西省)이다. 그러니 산서성과 섬서성은 정확하게 황하를 경계로 한다.
약칭은 ‘진(晉)’, 춘추시대 진나라의 본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서남쪽 끝 운성시(運城市, 地級市, 인구 500만)에 여장을 풀었다.
하룻밤 묵은 도원국제주점(桃源國際酒店).
아침 먹고 버스를 기다리는 느긋한 시간, 호텔 로비에서 낯익은 인물을 만난다.
안경 선전에 등장한 바둑기사 섭위평(聶衛平, 녜웨이핑). 80년대 중일(中日)바둑전쟁의 스타로 떠올라, ‘철의 수문장’ ‘13억 인민의 영웅’으로 불렸다. 어벙한 생김새와 인간적인 면모가 지금도 인기를 타는 모양이다.
88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의 제1회 응창기배(應昌期盃) 세계바둑대회, 그 결승5번기는 20세기 최고의 빅매치로 불린다. 한중일 바둑 삼국지에서 분수령을 이룬 대국이기 때문이다. 자타가 우승을 의심치 않았던 섭위평, 그 때문에 대만 재벌 응창기 선생이 중화민족의 자존을 노리고 거액(우승상금만 40만 달러)을 투자한 것이리라. 그러나 너무나 뜻밖에도 한국의 조훈현에게 무너진다. 바둑의 변방에서 수직상승한 한국 바둑은 이후 20년간 세계를 제패하게 되고….
축구와 바둑에서 비롯된 중국의 공한증(恐韓症), 근래 섭위평의 후배들은 공한증을 깨끗이 잊은 채 유례없는 맹위를 떨치고 있다.
첫댓글 노자상 하며 글자 크기까지 대륙적 이네요.
황허강은 늘 탁해서
백년하청이 아니라 만년을 가도 맑아지지 않을 셈이고요~
삼문협댐으로 황하를 맑게 하려 했다니, 비록 실패했지만 모택동의 그 꿈은 대단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