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첫 버스, 6411호 외 2편
- 만인의 기억을 위해
고성혁
1956년생, 시집 <낡은 시네마 필름처럼>, <귀항>, 산문집 <그저 자는 듯 죽게 해줍시사>
새벽 네 시의 첫차는 출발 십오 분 만에 만석이다
누가 어느 정류장에서 타고
어디서 내릴지 모두가 알고 있는 매우 특별한 버스
한 달 팔십오만 원을 받는,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서 강남으로 가는,
이름은 있지만 아주머니로 불리는 승객들의
‘6411호 청소 근로자 버스’
금세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노회찬과 또 다른
노회찬을 상상하며 나는 운다
아무리 어려워도 죽으면 끝인데 왜, 라며
남편이 병든, 허리가 아픈, 손목이 저린 빌딩 청소 아주머니가
비닐 깔개를 꺼내 버스 뒷문 계단에 깔고 앉아 먼발치 아직 어둠이 깊은
2018년 7월 27일을 바라보며 되뇌고 있다
십년 넘은 양복 두 벌과 낡디 낡은 구두 한 켤레가 전부인,
그럼에도 국회에서 유일하게 신문배달 수고비를 올려주었다는
지지리도 못난 우리들의 영웅
나쁜 일이 있을 때 먼저 나서고 좋은 일이 있을 때 뒷걸음치던 사람
분노조차 겸손했던 사람
세브란스 병원 빈소에는 이름 없는 조문객이 새 구두를 놓고 갔다
산자들의 것이란다, 그의 노회찬은 새 구두를 신고 날아올랐을까
천국으로 가는 새여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하나
아깝지 않은 게 없고 버릴 것이 없는 사람이 갔다
폭염경보 같은 화인을 남기며
불꽃 용접공, 우리 대표님, 사랑하는 동지가 갔다
날마다 국어사전을 읽던 사람이 첼로 소리를 내며
다섯 시 십 분에 6411호는 선릉역에 도착했다
유시민이 노회찬의 등 뒤에서 말했다
형, 좋은 사람, 회찬이 형, 다음 생애 또 만나요
수천만의 노회찬이 그의 찬란한 비행을 보았다
아,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여
그를 둘러싼 우주가 눈부시다
* ?6411호 버스: 2012 정의당 대표 수락연설에서 노회찬은 새벽 첫 청소근로자들이 대부분의 승객인 새벽 첫 시내버스의 고단한 풍경을 얘기했다.
꽃다발
- 퇴역에 대하여
꽃은 다발이 되는 순간
슬픔으로 찬란하다
순간의 격정이 지나고 나면
꽃들의 그윽한 향기와 화려한 자태는
이미 클래식이다
꽃들은
서로를 안고 꿈처럼 진다
꽃을 쳐다보며
꽃을 보낸 사람들의 성의를 삶의 내부로 끌어들여도
꽃잎은 어김없이 떨어진다
남겨진 리본과
꽃대의 고독이 사무치다
떨어진 꽃잎을 모으며
기념(紀念)의 뒤에 남겨진 말들을 생각한다
부질없이 시간 앞에 부서지고 말 것들
꽃의 흔적이 기억처럼 담을 넘으며
붉은 깃발을 흔든다
이제 꽃들의 사유를 따라
떠나야 한다
꽃은 지고
꽃은 슬픔이 된다
광주공원
구석은 구석에 부려져 있다
멀어지는 해의 슬리퍼 소리만큼
공원에 어둠이 쌓인다
구석의 살림살이는 맨몸에 닿는 찬 감촉과
그 감촉을 지탱해주는 벽뿐이다
그것은 비둘기처럼 모여 앉은
영감님들의
오래된 레퍼토리와 같다
한낮의 봄볕이
영감님들의 가슴에 오래된 저자거리의
분내를 일으켜도
그들은 이미 입영 도장을 받은
넓적다리가 아니다
외투 안을 치닫는 바람과
강퍅한 세월의 언덕에 찍힌 종점행 차표
건너편 정육점 걸쇠에 걸린
흐벅진 고기들이 푸르기만 하다
어쩌다 손길을 내밀어도
꿈쩍도 않는다 구석이라며 손사래를 치고는
두 손가락으로
상처 하나만을 집어 들고 물러앉는
손목 위 파리한 힘줄
공원을 지날 때마다 과거로부터 밀려오는
웃음소리를 듣는다
불 꺼진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세상의 이야기와
둥글게 말고 마는 몸의 기억들
닳아버린 시간이 철컹철컹 깃을 세운다
구석은 날마다 심지를 밀듯
작별의 제의를 닦는다
붉은 십자가와 편의점의 불빛에 아롱대는
광주공원 계단 위 차가운 구석
버스 차창에 흔들리는 광주공원의
이 저녁풍경
우리들의 구석자리
공원을 지날 때마다 과거로부터의 오래된 소리를 듣는다. 할아버지들이 둥글게 몸을 말고 듣는 빛나는 세상의 이야기들, 불 꺼진 방안에서 귀를 세우고 듣는 먼 곳의 소식들. 공원의 따스했던 온기를 바라기하며 그들이 겪는 내밀한 삶의 찌꺼기들.
햇볕이 따스한 광주공원의 오후에 할아버지들이 모여 앉아 있다. 안쓰럽다. 비둘기처럼 모여 앉은 할아버지들. 그들에게도 봄꽃 같은 과거가 있었을 것이다. 모여 있는 돌계단, 중절모를 삐뚜름히 쓴 채 천변을 나는 이름 모를 새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보는 영감님들. 영감님 중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 자판기 앞에 선다. 커피를 꺼낸다. 그들의 마음속에 울려 퍼지는 오래된 레퍼토리. 시간은 천천히, 그러나 강철 같은 규칙으로 떠나고 과거는 늘 밀물처럼 몰려온다. 시간을 담은 세월은 쇠락한 빈집처럼 쓸쓸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과거를 생각하며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벤치를 찾아 파리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다. 그들이 가는 곳은 구석이다. 구석은 곳곳에 펼쳐졌다.
구석의 가슴 안에 고인 시간의 연금술. 단단하고 거칠거나, 모질게 두껍거나, 고약하고 매몰차거나를 가리지 않고 매 순간 부딪쳐 쌓인 ‘지금’. 그러나 과거 어느 한 순간, 따뜻한 봄볕 같았던 날, 분내 가득한 마담에게 쌍화차를 사주며 취했던 낭만은 이미 물처럼 흘렀고 이제 희미한 추억만 남았을 뿐이다. 그들의 무릎은 ‘갑’종 입영 도장을 받던 그 날의 튼실한 넓적다리가 아니고 힘줄에는 가냘픈 윤곽만 남았다. 외투 안에는 찬바람이 불고 강퍅한 안식의 언덕에는 비가 흩뿌리고 있다.
누군가 어색한 손길을 내밀어도 꿈쩍도 않는다. 가까이 다가서면 오히려 물러서는 그들. 구석이라며 손사래를 치는 희미한 미소가 짐짓 과거와 미래를 짐작케 한다. 그들의 미소를 읽으며 가슴을 문지른다. 적요한 침묵과 이내 번지는 한 컷의 허무.
구석의 살림살이는 갈수록 적어져 이제 맨몸에 닿는 차디찬 감촉과 그 감촉이라도 지탱하게 해주는 벽뿐이다. 황혼을 따라 흐르는 새들, 영감님들이 새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 가는 집 또한 구석이다. 오래된 침묵과, 불 꺼진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세상의 이야기. 둥글게 말고 마는 몸의 기억들. 닳아버린 시간이 철컹철컹 깃을 세운다. 그가 누린 세상은 그의 몸만큼 허물어졌고 그가 간구했던 세상도 이제 낯설기만 하다. 그가, 부비고, 마시고, 노래하던 시절은 돌고 돌아 이제 낡은 시네마 필름이 되었다.
시간 속에 남은 역사는 언제나 구석일 뿐이다. 아니라고 해도 언젠가는 구석이 되어 웅크린 자세로 놓이는 것들. 누구도 사라진 것들의 의미를 오래 새기지 않는다. 누군가 슬리퍼를 끌고 쩔걱쩔걱, 뒤뚱거리며 걸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사라질 때에야 이름을 부르지만 거기서 호명은 멈춘다. 그 광경이 어둠처럼 내려앉는다. 잊고 또 잊는 우리. 세상 안의 늙은 이치들.
가야한다고, 떠나야한다고, 작별의 제의를 펼치고 싸릿대 같은 손을 흔들며 날마다 자신의 등에 혼불을 켜는 구석. 혼불을 따라 하루살이처럼 나는 허무. 허수아비 같은 회한을 쫒고 나면 등이 시리다.
광주공원 계단 위의 저무는 저녁. 붉은 십자가가 눈부신 모습으로 떠 있다. 편의점 불빛이 대낮처럼 반짝인다. 카바이드 불빛의 현란한 진열과 황홀한 액세서리들. 건너편 정육점 걸쇠에 걸린 흐벅진 고기들이 푸르기만 하다. 익숙한 삶의 풍경 위에 새들이 난다. 그 광경 안에서 차가운 구석자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골목 안에 허물어진 저녁이 낮달처럼 무디다. 버스 차창에 고단한 풍경이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