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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 제 23장 다윗의 용사들
본장은 다윗의 인생 말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그는 먼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자신의 소원을 아뢰고 난 후 지금껏 다윗 왕국의 근간이 되어 왔던 용사들을 하나하나 소개한다. 첫 삼인의 용사, 둘째 삼인의 용사, 그리고 삼십 인의 용사들을 소개하고 있다. 본장은 두 가지 주제를 보여주는데 하나는 의의 통치자 곧 메시야 사상이며, 다른 하나는 이상적인 신정 국가의 충성된 일꾼들의 모습이다.
1. 다윗의 마지막 말 (23:1-7절)
다윗이 임종을 앞두고 성령에 감동되어 미래에 완성될 공의로운 메시야 왕국을 노래하고 있다. 첫째는 시의 신적 권위에 대한 자증이며, 둘째는 의로운 왕으로 말미암는 새 세계를 노래하고, 셋째는 사악한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노래한다. 다윗은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고 있었으며, 그 나라는 오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겸비한 의로운 왕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의로운 왕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다윗이 미래에 대한 사실을 성령의 감동으로 알았지만 구체적으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신 언약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 언약에 근거하여 미래의 메시야 강림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본장의 노래는 22장의 다윗의 시 다음에 배열되어 있지만 시기적으로는 각각 다른 시간대에 저작되었다. 본시는 모든 역경과 좌절을 맛본 다음 다윗의 통치 말년 곧 다윗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저작한 것이다. 전장의 시가 활기찬 흐름으로 보아 최전성기의 노래라면 본장은 그의 인생을 마감하던 때에 곧 범죄 후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와 동시에 베풀어지는 사랑과 구원에 감격했던 노래이다. 이 고백적 찬양은 단순한 다윗의 개인의 신앙과 감사를 다룬 것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공의로운 메시야 왕국을 예언했다는 점에서 ‘선지자적 찬양’이라고 부른다. 모세가 죽기 전에 신명기에서 축복의 시를 지은 것과 같이 다윗도 임종하기 전에 그의 마지막 소원을 노래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을 ‘이새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이는 다윗이 이스라엘 왕과 대비되는 호칭으로 결코 명예로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의 비천함을 드러내는 호칭이었다. 따라서 이 노래를 부를 때에 자신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말함이여’라는 말 ‘네움’은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말씀과 관련된 용어이다. 즉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한 용어와 같은 용어이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메시지를 시적 형태로 전달했던 것이다.
다윗은 본래 양을 치는 미천한 목동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되어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크게 높아진 자가 되었다. 실제 다윗은 양치는 소년 시절부터 악기를 잘 타는 자로 이스라엘에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사울 왕궁의 수금을 연주하는 자로 활동했었다.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라는 말에서 ‘노래’는 세속적인 대중가요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의미한다. 발람이 이스라엘과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할 때 그 예언의 초두에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었다.
*민24:3-4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다윗 역시 선지자적 입장에서 자신의 노래를 미래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절에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라는 말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서 말씀하셨다.’이다. 다윗은 자신의 시가 사적 감정의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주장 받은 계시적 성격의 노래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즉 다윗이 자신의 입술을 주장하는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 곧 성령임을 고백한 것이다. 다윗은 성령의 완전한 지배 아래에 있으며 이것은 다윗의 노래가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근거요 조건이다.
다윗은 이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라고 했는데 이는 선지자들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전에 취했던 형식과 일치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에서 건지시고 출애굽 시킨 선민의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백성과 맺은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강조하는 호칭이다. 다윗이 특별히 구속주의 호칭을 사용한 것은 본시가 구속 사역의 주인공이신 메시야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바위’역시 흔들림 없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시는 다윗 언약에 기초한 확신의 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라고 하셨다. 이는 이상적 신정 국가의 왕의 자세를 보여주는 것으로 일차적으로는 다윗을,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렘23:5-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왕을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다윗은 메시야 시대에 나타날 징조에 대하여 세 가지를 노래한다.
첫째, 돋는 해의 아침 빛 같다고 하였다.
메시야 시대에는 고통과 죄악과 부패의 온갖 어두운 흑암은 물러가고 기쁨과 번영과 행복의 찬란한 아침 햇살이 비추이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구름 없는 아침 같다고 하였다.
온갖 근심과 걱정의 구름이 완전히 걷힌 청명한 하늘처럼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새 날이 온다는 것이다.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아침은 참으로 하루 일상이 기쁨으로 시작될 것이다.
셋째,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과 같다고 하였다.
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상징한다. 비는 초목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며, 비가 내린 후의 광선은 초목을 더욱 싱싱하게 하고 푸르게 하고 생명력이 넘치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넘치고 활력이 넘치게 되는데 이 때 땅에서 돋는 새 풀은 참으로 싱그러운 초목이 될 것이다.
다윗은 이와 같은 메시야의 의로운 통치가 다윗의 집 후손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다. 즉 4절에 말한 신세계가 그의 후손을 통하여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 근거로 7장에 언급한 다윗 언약을 들고 있다.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라는 표현을 보면 다윗은 장차 자신의 가계를 통해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질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윗의 모든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이라는 것은 다윗의 집에 약속하신 구원과 다윗의 거룩한 메시야 소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 즉 메시야의 강림과 통치는 경건한 자에게는 축복이 되지만 불경건한 자에게는 심판이 된다. ‘사악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와 하나님의 통치에 백해무익한 자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다 내어버릴 가시나무’에 비유했는데 농부가 가시나무를 발견하는 즉시 뿌리 채 뽑아 불태우는 장면을 인용하여 창졸간에 철저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27:4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찔레와 가시가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겔28:24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가시나무를 맨 손으로 잡을 수 없으므로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한다. 즉 낫이나 곡갱이를 가지고 가시나무를 한 자리에 거두어 모아 불살라야 하는 것이다. 다윗이 이 노래를 부른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에서는 불의한 사단의 세력이 완전히 소멸된다는 것이다.
둘째, 메시야의 의로운 통치에 대적하고 해롭게 할 무가치한 자에게 임할 심판의 필연성을 깨우치고 있다.
2. 첫 삼인의 활약상 (23:8-12절)
이제 다윗 왕국의 번영에 크게 이바지했던 용사들이 소개된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첫 삼인이 먼저 소개되고 있다. 이들은 ‘솰리쉬’ 곧 다윗 왕을 호위하는 특수 부대장들로서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이들은 모두 다윗에게 충성을 바쳤다기보다는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가시는 하나님께 충성을 바친 자들이다.
*대상11:10 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우두머리는 이러하니라. 이 사람들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다윗을 힘껏 도와 나라를 얻게 하고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신 말씀대로 함이었더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 하는 자.’라고 했는데 대상 11장에는 ‘학몬 사람의 아들 야소보암’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다그몬’은 학몬에 대한 오기이며, ‘요셉밧세벳’이라는 말은 그의 이름이 아니라 ‘밧세벳에 거주하는 자’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의 본 이름은 야소보암이며, ‘아디노’는 그의 별명이다. 이 사람은 블렛세의 시글락에서 다윗과 합류하였다. 다윗은 왕의 시위군을 12개 반으로 나누고 달마다 한 번씩 교대로 근무하도록 체번제를 실시했는데 이 사람이 정월 첫 반의 반장이었다.
‘군지휘관의 두목’이라는 말은 곧 가장 뛰어난 세 장군을 의미한다. 이들은 왕이 전쟁할 때에 병거에서 왕과 함께 있었으며 왕 주변에서 호위병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요압이나 아마사가 차지했던 전체 이스라엘의 군장, 곧 ‘사르’와는 거리가 있는 직책이었다. 이 사람은 전쟁할 때에 단 번에 팔백 명을 쳐 죽였다. 그 다음으로는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다. ‘아호아’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다.
*대상8:4 아비수아와 나아만과 아호와와..
엘르아살은 대상에 보면 이만사천 명으로 구성된 2월의 반장이었다. 그는 야소보암과 삼마와 더불어 다윗의 ‘솰리쉬’로 활약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모였다.’는 말은 대상에 보면 ‘바스담밈에서 접전이 있었다.’고 기록되었고 이곳은 ‘에베스담밈’으로 이스라엘과 블레셋 간에 무수한 전투를 벌인 곳이며 국경 지역인 엘라 골짜기에 위치하였고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곳도 바로 이곳이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의 대단한 진용에 놀라 높은 고지로 도망을 쳤다. 이때 다윗의 솰라쉬 중의 한 사람인 엘르아살은 혼자서 적과 싸워 단 번에 팔백 명을 쳐 죽였던 것이다. 세 용사는 블레셋 사람들을 조롱하며 군대의 비위를 건드려 싸움을 유도했으며, 엘르아살은 칼을 손에 꽉 쥐고 많은 적군과 싸웠는데 손에 쥐가 날 정도로 블레셋 사람들을 도륙하였으며 이 날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엘르아살을 붙들어 주심으로 이룩한 것이었다.
세 번째 사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인데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보리밭을 노략질할 목적으로 밭으로 들어올 때에 백성들은 도망했으나 삼마가 밭의 가운데에 서서 적을 가로막고 블레셋 사람들을 도륙하고 큰 승리를 이루었다. 이 승리 역시 여호와께서 삼마와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3. 둘째 삼인의 활약상 (23:13-23절)
충성면에서는 첫 삼인과 다를 바가 없으나 능력 면에서 다소 뒤지는 둘째 삼인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오는 삼인의 용사들과, 그 삼인 중의 하나인 아비새에 대한 소개, 그리고 브나야에 대한 소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다윗의 권위에 굴복하여 무모한 희생을 각오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발적인 헌신과 사랑에 의하여 다윗의 요구에 순응했던 것이다. 이들의 행위는 단순한 왕에 대한 충성이라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 다윗에 대한 헌신과 충성이었던 것이다.
둘째 삼인은 아비새와 브나야 그리고 무명의 한 사람이다. 아둘람 굴은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은신했던 곳이며 이곳에서 다윗은 그의 가족과 동료들과 결합하였다. 그 위치는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이며 이곳에는 약 400명 정도가 거주할 수 있는 큰 동굴이 있고,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에 있다. 이 전투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직후 통일 왕국의 세력을 우려한 블레셋이 선제 침공함으로 발발되었다. 당시 다윗은 아둘람 동굴 근처에 있는 산성에 있었는데 이때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이전이므로 천혜의 요새인 예루살렘에 있지 못하고 그 대신 아둘람 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아마도 길보아 전투 때에 베들레헴을 차지했을 것이므로 당시에 베들레헴에 본부를 두고 진을 쳤던 것이다.
다윗은 블레셋과 치열한 전투를 하던 중에 고향 베들레헴 근처에 이르게 되었고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에 육체와 정신에 피곤이 젖어들었다. 다윗은 고향의 우물물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애타는 마음으로 이를 호소했는데 둘째 삼인이 충정어린 행동으로 결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윗이 진을 치고 있는 아둘람 동굴 근처의 물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베들레헴 우물의 물은 시원하고 깨끗한 생수였다고 한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 우물은 베들레헴에서 북동쪽으로 약 15분 걸리는 지점에 있으며 ‘다윗의 우물’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을 길어가지고 돌아왔다. ‘바카’라는 이 말은 ‘가르다.’ ‘쪼개다.’라는 뜻으로 세 용사들이 베들레헴에 있던 블레셋 부대를 정면으로 꿰뚫고 지나갔음을 보여 준다.
다윗은 이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렸는데 이는 전제물로 드린 것을 의미한다. 그가 전제로 여호와께 드린 것은 용사들의 피와 같은 물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그들의 생명의 대가인 물을 ‘피’로 간주하여 율법에 따라 한 방울도 축내지 않고 하나님께 헌납하였다.
*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다윗의 이 같은 행동은 세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 인간의 생명을 결코 헛되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모든 희생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어떠한 생명이라도 인간의 사악한 욕구 충족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웃의 생명과 인격을 존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의 생명과 인격을 보존하신다.
*잠14:25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다윗이 이 물을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한 것은 세 용사가 떠온 물이 그들이 생명을 걸고 떠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로 간주하여 ‘피를 먹지 말라.’는 율법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 삼인 중에 첫 사람은 요압의 아우 아비새였다. 그는 제2 솰리쉬의 두목이 되었는데 제 2의 삼인 중에서는 가장 뛰어났으나 첫 삼인에게는 그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아비새가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명성을 얻었다.
두 번째 사람은 갑스엘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며 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맨 몸으로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죽였다.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 사람을 죽였던 것이다. 대상에 11장에 보면 그 사람의 키가 다섯 규빗이요, 그 손에 든 창이 베틀채 같았다고 한다. 그 사람은 신장이 2m30cm이므로 손에 막대기 하나로 창을 든 거인을 죽였다는 것은 대단한 용맹과 괴력을 나타낸 것이다.
‘갑스엘’은 유다 남쪽에 있는 한 성읍이며 여호야다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이었다.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다윗 치하에서 그렛과 블렛의 대장이었으며 또 2만4천 명으로 구성된 제 3월 군대의 장관이었다. 이후에 아도니아의 반역을 분쇄한 공로로 솔로몬 치하에서 요압 대신에 군대장관에 올랐다. 그는 다윗의 시위대장이 되었다.
4. 다윗의 30인 용사들 (23:24-39절)
다윗이 통일 왕국의 왕으로 즉위할 당시 구성된 30 인 용사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다윗 군대의 훌륭한 조직력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선발된 용사와 다윗이 정복한 이방 나라에서 선발된 자로 구성되었다. 이 중에는 이방인이었다가 여호와 종교로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위해 봉사할 일꾼을 선발하는데 어떤 차별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24절에 아사헬은 요압과 아비새의 아우이며 다윗의 조카로 그 발이 들노루 같이 빠른 용사였다. 그는 이스보셋의 군장 아브넬을 추격하다가 그의 창에 찔려 죽었다. 그런데 그가 삼십인 중에 속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삼십 인의 구성은 최소한 그의 죽음 이전에 조직된 것이 분명하며 이 시기는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으로 즉위한 직후였을 것이다.
엘하난은 베들레헴 사람 도도의 아들이며, 하룻 사람 삼훗은 원문상으로는 ‘삼마’이다. 물론 11정의 삼마와는 다른 인물이다. 하룻 사람 엘리가는 역대상에는 그 이름이 빠져있다. 26절에 발디 사람 헬레스는 7월의 장관이었으며,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는 6월의 장관이었다. 그는 다윗의 대신이었던 야일 사람 이라와는 다른 인물이다. 27절에 아나돗은 베냐민 지파 내에 있는 레위인의 성읍이다. 이곳은 제사장의 성읍으로서 아비아달의 출생지요 선지자 예레미야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곳 출신의 아비에셀은 9월의 장관이었다. 후사 사람 므분내는 오기로서 ‘십브개’이다. 대상 11;29절에 십브개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블레셋 거인 삽을 죽인 사람이며 다윗 군대의 제 8월의 장관이었다.
28절에 아호아 사람 살몬은 엘르아살과 같이 베냐민 지파 아호아 사람이며 그의 이름이 대상11:29절에는 ‘일래’로 소개되고 있다. 느도바 사람 마하래는 10월의 장관이었으며 유다 지파 출신이었다. 이곳의 위치는 베들레헴 부근이다. 29절에 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렙은 대상 11:30절에 ‘헬렛’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그는 옷니엘의 후손으로서 12월의 장관이었다.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는 베냐민 사람 잇대나 블레셋 사람 잇대와 다른 인물이다. 30절에 바라돈 사람 브나야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다른 인물로서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다. 가이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는 바라돈과 마찬가지로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사람이다. 31절에 아르바 사람 아비알본은 유다 광야 저지대 아라바 광야에 살던 사람이다. 바르흠 사람 아스마웻은 ‘바후림’ 사람으로 베냐민 지파 사람이다. 32절에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는 단 지파에 할당된 아모리 족속의 성읍 사알빔에 살던 사람이다. 야센의 아들 요나단은 역대기 기록에는 ‘하랄 사람 사게의 아들 요나단’으로 나오는데 역대기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33절에 하랄 사람 삼마는 11절에 소개된 첫 삼 인 중의 한 사람 삼마와 동일 인물이다. 아랄 사람 사랄의 아들 아히암은 대상 11:35절에는 아히암의 아들 사갈로 소개된다. 34절에 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렛은 아람 사람이다. 마아가는 바산 북쪽 헬몬산 서남쪽에 위치한 아람 소국으로 다윗이 이곳을 정복하고 이 사람을 발탁하였다.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은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의 아들이었다. 이 사람은 우리아의 처 밧세바의 아버지였다.
35절에 갈멜 사람 헤스레는 유다 지파 사람이다. 아랍 사람 바아래는 유다 지파 헤브론 산악지대 사람이다. 36절에 소바 나단의 아들 이갈은 아람 소국 사람이다. 소바는 다메섹 북쪽과 레바논 산지 동쪽에 위치했던 나라이다. 갓 사람 바니는 대상 11:38절에는 ‘하그리의 아들 밉할’이라고 하였다. 37절에 암몬 사람 셀렉은 암몬 족속이었으나 용사로 발탁되었다. 요압의 병기 잡은 자 브에롯 사람 나하래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다. 브에롯은 기브온의 성읍이었으며 따라서 나하래는 기브온 족속일 가능성이 크다. 38절에 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은 모두 기럇여아림 이델 출신이다. 39절에 헷 사람 우리아는 밧세바의 남편이자 가나안 족속으로 이방인이었다. 이상 첫 삼인과 둘째 삼인 그리고 나머지 삼십일 인을 합쳐서 도합 삼십칠 인이었다. 이 용사들의 명단에는 요압이 빠져 있는데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요압은 이스라엘 전군의 군대장관이었기 때문에 생략되었을 것이다.
둘째, 요압은 헌신적으로 충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넬과 압살롬, 아마사를 살해하는 무자비한 행동을 하였고 솔로몬 왕을 대적하는 반란에 가담했기 때문에 명단에서 삭제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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