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멜 영성
도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관상기도』
구원의 마리헬레나 지음
거둠의 기도
이냐시오 성인도 기도할 때 마치 신발을 벗어놓고 들어가듯이 오관을 밖에 벗어두고 시작했다고 한다.
“이성이여, 의지여, 그리스도의 산으로 올라가자. 오관이여 너는 밖에 있거라!” 하면서 기도를 시작하였다.
기도는 보고 들음에서 한발 떨어져, 오관으로 느끼는 것에는 마음을 끊고, 보이지 않으나 신앙의 눈으로,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을 마음의 눈으로, 신앙으로 찾아가는 것이다.
오관이나 자아(ego)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제 모든 능력을(오관이나 자아)를 떠나 하느님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 때문에 자아이탈이 필요하다.
다음은 어떤 자매님의 이야기이다.
이분은 전날 밤 기도를 많이 했다는데 처음에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본 얼굴보다 더 기운이 없고 맥이 빠져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별 다른 일은 없었고 정말 기도를 열심히 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를 하시기에 거꾸로 가는 것 같을까요? 어떻게 기도 하셔요?” 물어보자
“저는 원래 우울한 편인데 자기 안에 들어가 기도하면 더 다운되고 더 우울해져요!”
“그 자기 안으로 들어가 기도하라고 어디에서 배웠어요?”
“책에서요…또 많은 기도 강의 때마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던데요?…”
이를 어쩌나! 어째서 자기 안으로를 자아(ego)로 알아들었을까? 자기 안이란, 자기 영혼 안에 계신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우리말의 낱말이 부족해서 버려야할 자아(ego)와 찾아야할 자기를 뚜렷이 구별해주는 낱말이 없는 것은 딱한 일이다.
데레사 성녀가 자기의 안으로, 자신의 안으로 했을 때는 (A)의 더 안으로 들어가 영혼 안에 계신 하느님께 가라는 뜻이었다.
“자기의 안으로 들어가라”는 뜻은 자기의 일부인 (B)감성영역에 갇혀 있거나 머물지 말고, 자기(B)를 떠나 더 깊은 하느님이 계신 곳까지 들어가라는 뜻이다.
이처럼 자기(ego)안으로 들어가는 분이 생각보다 많을 것 같아 안타깝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자신의 더 깊은 안쪽으로 즉 영혼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자아와 오관)을 영혼 안으로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거둠의 기도라 부른다.
“영혼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등져 문을 닫고 그 안에서 주님과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고 싶어 할 때면…나는 일부러 「들어가고 싶어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기도하고 싶어 하느님을 향해 내 마음이, 내 영혼이 쏠려가고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열망이 바로 기도의 핵심이자 정수이다.
하느님과 함께 있고 싶은 갈망이 세찰수록 하느님을 향해 마음이 날아가기에 하느님 아닌 세상 것에서 저절로 멀어지고 지금까지 어쩔 수 없이 먹고 살아가야 했기에 했던 일들을 미련 없이 놓아버리고 이 짧은 시간만이라도 하느님 안에 더 깊이 들어가려고 몰입을 하기에 오관은 들어올 엄두도 못 낸다.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과 애틋함이 저절로 오관 세계를 떠나게 만들고 하느님 안에 잠겨있게 한다. 오관을 방해꾼처럼 성가시게 느낀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둘만의 고요한 시간을 오붓하게 지내고 싶어하는데 짬 모르는 아이가 자기도 끼어들려고 기웃거릴 때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애석함을 영혼도 느끼는 것이다. 여기서 데레사 성녀는 이 “사랑의 밀회”를 영혼이 원해서 주도한다고 표현했다. “주님과 함께 천국으로 들어가고 싶어 할 때면…”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고 싶어 하고 할 수 있다는 우리의 의지에 달렸지 초자연적인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완 29,4) 고요의 기도가 수동적 관상이라면 거둠의 기도는 능동적 관상이라 할 수 있다. 거둠의 기도가 “왜 초자연적인 것이 못되느냐 하면 이것은 감관의 침묵이 아니라 다만 영혼 안으로 감관들을 거두어들이는 것뿐이기 때문이다.”(완 29,4)
영혼이 제 모든 능력(기관)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수고스럽고, 특히 처음 기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쉽지만은 않다. 펄럭거리며 날뛰는 말처럼 감관들을 길들여서 잡아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가의 신부도 그토록 신랑을 그리며 하는 말 “나는 잠들었지만 내 마음은 깨어 있었지요.” 하고선 막상 신랑이 나타나서 “내게 문을 열어 주오, 나의 누이 나의 애인, 나의 비둘기, 나의 티 없는 이여! 내 머리는 이슬로, 내 머리채는 밤이슬로 흠뻑 젖었다오.”(아가 5,2)하고 고백하자마자 얼른 일어나 문을 열 것 같은데, 그토록 님을 그린다는 신부가 하는 소리는 “옷을 이미 벗었는데 어찌 다시 입으오리까? 발을 이미 씻었는데 어찌 다시 더럽히오리까? 나의 연인이 문틈으로 손을 내밀자 내 가슴이 그이 때문에 두근거렸네.”(아가 5,3~4) 우리 모두는 아가의 신부처럼 주님을 만나기를 열망한다고 하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노크하는 사랑하는 주님의 소리를 듣고도 얼른 달려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왜일까?
관상 은혜를 받는 자가 하느님을 찾아 얻어 만나는 수가 적은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문밖에서 이슬에 젖은 채 서성이고 있는 것보다 내 사정에 더 마음이 가는 것이다. 씻은 발을 버릴까 싶고 벗은 옷 다시 입어야 하고… 내 마음에서 내 입장을 먼저 보는지 상대를 먼저 보는지에 따라 내 행동이 달려 나가 문을 열 수도 있고, 내 입장부터 생각하느라 꾸물거릴 수 있다.
우선순위를 누구에게 두느냐? 나인가? 하느님인가?
이것이 영혼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