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각산 기슭에 자리 잡은 성북동 정법사. 매
일 새벽 3시면 이곳 대웅전 옆 조실채에선 문틈 사이로 환한 불빛이 새나온다.
경내의 오래된 노송을 닮아버린 구순의 석산(石山) 노스님 예불이 시작된 것이다. 온갖 삼라만상이 모두 안락해지기를 바라는 발원을 시작으로 노스님의 구성진 염불소리가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지난 40여 년 넘게 성북동의 하루는 석산 스님의 염불소리와 함께 그렇게 동터오고 있는 것이다.
기도ㆍ염불ㆍ사경이 하루 일과
고향이 강릉이던 스님은 1936년 고성 건봉사로 출가했다. 당시 나이 열일곱, 세속의 삶이 참으로 덧없이 보였고 머릿속에는 온통 스님이 돼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던 탓이다. 그렇게 시작된 출가생활. 산중의 배고프고 고된 일상에도 스님은 무작정 부처님이 좋았고 절이 좋았다. 낮에는 일을 하며 틈틈이 사집을 배웠고 저녁에는 염불당에서 염불을 배웠다.
어찌나 신심이 나던지 경전이든 염불이든 한번 들으면 절로 외워졌다. 노스님들로부터 “석산이 염불을 제일 잘한다”는 칭찬도 많이 들었다. 특히 스님은 당시 한창 진행되고 있던 건봉사 만일염불결사에 동참하면서 하루 4번 2시간씩 염불정진에 매진했다. 신라 경덕왕 때 이곳에서 27년 5개월 동안 빠짐없이 염불한 대중들을 아미타불이 현신해 극락세계로 인도했듯 이번 염불만일회 결사가 끝나는 날 또다시 그렇게 될 거라는 확고한 믿음도 생겼다.
“염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여러 스님들의 장엄염불 소리를 들으면 신심이 새록새록 솟았습니다. 여기가 바로 정토가 아닐까 싶은 정도였으니까요.”
석산 스님은 당시 건봉사에서 만해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태산 같은 기상을 지녔던 만해 스님은 건봉사에서 당당히 선(禪)법문을 했고, 석산 스님에게도 무자(無字)화두를 주었다. 그러나 스님은 화두보다 염불이 더 좋고 가슴에 와 닿았다. 그러나 인연은 스님을 건봉사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정진만 하던 스님이 서울과 인연이 닿은 것은 해방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후 혜화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은사 보광 스님이 목청 좋고 신심 좋은 석산 스님에게 가회동포교당 원주 소임을 부탁했고, 이를 뿌리칠 수 없었던 스님은 그곳에 머무르며 스님을 도왔다.
그 인연을 시작으로 스님은 그곳에서 대중들과 더불어 기도하고 염불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 해방이 됐고 또 오래지 않아 한국전쟁이 터졌다. 스님은 전쟁을 피해 평택의 한 사찰에서 지내다가 휴전이 되자 해인사로 공부하러 떠났다. 불교를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건봉사 만일염불회에 참여
“당시 강원에서 공부하려면 쌀이나 돈을 내야 했어요. 해인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화 전이라 대처승들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피난 다니던 가난한 중이 돈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다행히도 쌀과 돈 대신 건봉사에서 배운 염불을 가르치고 그곳 강원에서 공부를 하며 사교과를 마칠 수 있었지요.”
스님은 해인사에서 사집을 배운 뒤 다시 범어사로 향했다. 대교과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스님은 그곳에서도 염불을 가르치며 경전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큰 가르침은 문자가 아니라 범어사 조실이었던 동산 스님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당시 노전 소임을 맡았던 스님은 새벽 3시면 목탁을 치며 도량석을 돌았다. 그러나 목탁을 치기 전 비로전, 관음전, 산신각, 팔상전, 탑전 등을 돌며 일일이 절을 하고 대웅전에 가장 먼저 자리 잡고 앉는 것은 늘 동산 스님이었다.
비가 오고 눈보라가 몰아쳐도 어긋남이 없는 스님의 일상이었다. 또 예불이 끝나면 빗자루를 들고 더럽건 깨끗하건 늘 도량청소를 했다. 석산 스님은 그 모습을 7년이나 지켜보았다. 지난 구십 평생 동안 만공 스님을 비롯해 한암 스님, 만해 스님, 효봉 스님 등 당대의 많은 선지식을 지켜보았지만 동산 스님을 가장 존경하는 것도 지극한 신심과 성실함 때문이다.
“큰스님께서 예불하고 마당을 쓸던 그 자체가 가르침이었습니다. 매일 쓰는 마당에 뭐 딱히 쓸게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닦을 것이 없는 것을 닦는 것이 바로 올바른 수행이라는 무언의 말씀이지요. 사람들마다 갖추고 있는 불성이야 더 없이 맑고 깨끗하지만 탐진치로 불성이 가려져 중생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빗질은 닦을 게 없는 그 불성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거지요.”
중생 위함이 곧 부처 마음
석산 스님은 그렇게 범어사에서 7년을 지내다가 1960년 은사 스님이 입적하자 다시 상경했다. 그리고 스님은 가회동포교당을 정리해 이곳 성북동 절터에 조그만 법당을 마련하고 정법사라 이름 지었다. 서울시내에 이런 도량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깊은 산사의 정취가 한껏 느껴지는 이곳이 스님은 마음에 쏙 들었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절문 밖을 나서지 않은 채 오로지 기도와 염불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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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거처하는 곳의 출입문. 스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참다운 출가자라고 말한다. |
그렇게 10년, 20년, 30년, 40년…. 성북동의 노보살님들은 지금도 석산 스님을 염불 잘하고 계율 잘 지키는 천진불 스님이라고 말한다.
“계율은 중생의 스승으로서 그것을 지킬 때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며 평생을 ‘스님’으로서 올곧게 살아온 것도 그렇거니와 신도들에게 늘 염불을 권하고, 특히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까 싶을 정도로 스님의 염불소리가 참으로 지극했기 때문이다.
“염불은 간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염불하는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고 그 마음이 곧 남을 위하고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아침저녁으로 하루 1시간씩 시간을 정해놓고 지극정성으로 염불해 보세요. 매일 천 번 이상 염불을 하게 되면 마음이 참으로 편해지고 부처님 가호도 옵니다. 또 내 길이 밝아지고 극락에도 갈 수 있습니다.”
석산 스님은 하루 종일 조실채에 머물며 그곳을 도량 삼아 기도하고 염불하고 축원하며 십수년 째 대학노트에 빼곡히 『금강경』을 사경한다. “없는데서 와서 없는 데로 가는 도리를 깨우쳐 사람들이 헛된 욕심을 버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선지식이 되는 세상을 발원하며 한 글자 한글 자 써내려 간다”며 맑게 웃는 노스님. 그 천진한 얼굴이 한 겨울에 만나는 따사로운 훈풍마냥 한없이 정겹기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