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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백파] ☆ 안개 자욱한 겨울 관악산 ― *
▶ 2023년 01월 14일 (토요일)
* [오늘의 산행 코스]
* 시당역(10:00, 5인)→ 남현동→ 암벽 암봉길→ 사당능선[2인의 산행]→ 낙성대 갈림길→ 하마바위→ 마당바위→ 전망대→ 안부 6거리→ 통천문-촛대바위→ 관악산(冠岳山) 정상-[연주대]→ 연주암(점심식사)→ (자하동천)계곡길→ 과천향교→ * 땅이야
* [프롤로그 ; 새해 덕담] ― 로댕 이야기, 따뜻한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은 근대 조각의 아버지라 불리며 세계적 조각가로 추앙받는 작가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그는 총명하지는 못하였고, 3번이나 프랑스 국립미술학교(그랑 에콜) 입학시험에 응시했지만 매번 낙방했다.
그 후 형사였던 아버지가 퇴직하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석공 일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누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고 수도원으로 들어갔지만, 로댕의 재능을 아낀 데이말드 신부의 설득으로 다시 작업장에 돌아왔다. 그렇게 건축 석공 일에 종사하며 나뭇잎, 포도송이 등 건축에 쓰이는 장식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예술보다는 먹고살기 위해서 날마다 열심히 돌을 쪼았다.
그러던 어느 날 로댕의 재능을 알아본 어떤 사람이 진심 어린 충고를 했다.
— "여보게, 눈에 보이는 나뭇잎만 만들지 말고 내면의 것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떤가?"
로댕은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로댕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먹고살기 위해서 보이는 것에만 몰두해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로댕은 육안으로 보기에 좋게 만들어서 많은 값을 받을 수 있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진정한 예술가의 안목으로 내면을 생각하며 사물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로댕은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24년이 지난 그의 나이 40세(1880)에 마침내 불후의 명작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했다. 그의 필생의 작품 〈지옥문〉(1880~1917, 브론즈)에 등장하는 많은 작품 중 가장 중심적인 존재인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발아래 펼쳐진 구원받을 수 없는 지옥의 영혼들을 내려다보며, 인간의 숙명에 대해 끝없는 명상에 잠겨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1904년에 독립된 작품으로 세상에 나왔다.
— 우리는 일상에서 '눈'을 통해 무언가를 보고 판단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한다. 하지만,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마음의 중심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 속에서 새로움을 찾기도 한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 더욱 소중한 것들이 더 많다.
2023년 새해를 맞이하여, 순정(純正)한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서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 해를 보냈으면 한다. 안동 도산의 퇴계선생 16대 종손 이근필 옹(92세)이 신춘휘호를 보내주셨다. ‘造福’(조복), 두 글자이다. ‘남이 주는 복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자신이 복 받을 일을 하라’는 뜻이다. 참신하고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다!
* [관악산(冠岳山)] — 한남정맥 백운산에서 분기한 암산
오늘의 산행지 관악산(冠岳山)은 서울[漢陽]의 조산(祖山)이다. 한반도의 중추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이 금강산·설악산·오대산·태백산·소백산·조령산·희양산을 거쳐 내려오다가 중조산(中祖山)인 속리산(俗籬山) 천왕봉에서, 한남금북정맥이 분기하여 북상하다가, 안성 칠현산에서 다시 분기한 한남정맥(漢南正脈)이 수원의 광교산—의왕 백운산을 경유하여 청계산 줄기로 이어진다. 청계산 이수봉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줄기가 과천의 매봉에서 (과천터널)—과천벌로 내려와 다시 안양시 관양1동에서 관악산(冠岳山) 줄기의 암봉으로 솟아오른다. 이 산줄기는 관악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뻗어나가 남태령을 넘어 우면산에 이르러 그 맥을 다한다.
관악산(冠岳山)은 한강(漢江)을 경계로 하여 강북[漢北正脈]의 삼각산(三角山)과 마주하고 있다. 관악산은 삼성산과 함께 옛 금천의 진산(鎭山)인 금지산경(衿芝山經)을 이루는데, 이 산경의 최고봉이다.
돌올(突兀)하게 솟아있는 암봉들로 이루어진 관악산의 모양이 마치 불꽃과 같아 풍수적으로 화산(火山)이 된다. 그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경복궁 광화문 앞 양쪽에 해태상[水氣]을 세워놓았다. 일종 비보풍수(裨補風水)인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경복궁 불탄 것은 보면 관악산의 화기가 더 센 것인가? 아니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산(山)이 문제가 아니라 정치를 잘못한 나라의 임금이 궁궐을 비우고 도주하여 백성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이다. 1492년 4월 30일, 관악산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불타오르는 경복궁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 작금의 대한민국의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 극단으로 분열된 정치(政治)는 나라의 근본을 흔들고, 역사와 국민에게 엄청난 패악(悖惡)을 저지르고 있다. 법을 어기고도 아무 잘못이 없다고 강변하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모른다.
* [우중의 관악산 산행] — 사당역, 남현동에서 사당능선으로 오르는 길, 암릉을 타고!
오전 10시, 사당역 6번 출구 앞 소공원에 산우들이 만났다. 오늘은 2023년 1월 새해 들어 첫 산행이다. 늘 한결같은 채홍철을 비롯하여, 이정식, 엄동렬 부부 그리고 필자 등 다섯 명이 참석했다. 우천(雨天) 때문인지 참석한 대원이 많지 않았다. 그것도 채홍철·엄동렬 부부는 오늘 결혼식 등 다른 일정이 있어 끝까지 산행을 할 수 없다고 한다.
오늘의 산행은 관악구 남현동에서 시작하여 사당능선을 타고 관악산 정상 연주대로 올라가는 여정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틀째 계속해서 내리는 겨울비이다. 우리의 산행 계획은 매월 둘째 주 토요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우리는 계획대로 산을 오르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래서 오늘도 산을 오른다. 각자 우장을 하고 차가운 비를 맞으며 산길에 접어들었다.
오늘은 남현동에서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올라가다가 작은 능선을 넘었다. 계곡에는 아직 얼음장이 그대로 있고 그 밑으로 콸콸콸 물소리가 들린다. 언젠가 필자는 ‘봄은 계곡의 얼음장 속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쓴 바 있다. 얼음 속의 물소리가 청신한 기분을 환기한다. 계곡을 가로질러, 남현동 둘레길을 걷다가 좌측의 암봉을 타고 올랐다. 바위는 화강암이라 미끄럽지는 않았으나 가파른 절벽은 아찔하고 팍팍했다. 그리고 네 발로 가파르게 올라가는 암봉, 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 [사당능선 아래의 솔밭] — 담백하고 구수한 배추적에 뽀얀 막걸리 한 잔 나누고
본격적인 사당능선 오르기 직전, 한적한 솔밭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채홍철 총무는 결혼식에 가야 하고, 임동렬 산우도 긴요한 일이 있어 여기쯤에서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신년 하례주(賀禮酒)인가 중도 하산주(下山酒)인가. 뽀얀 막걸리 한 잔씩을 나누었다. 엄동렬 부인이 새벽에 일어나 부쳐온 ‘배추적’으로 안주를 삼았다. 싱싱한 배추의 시원한 맛이 입안에 감돌고 씹을수록 담백하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잠시 환담을 나누다가 세 사람은 사당역으로 도로 하산했다. 결국 오늘의 산행은 이정식 대원과 호산아 둘이서 하게 되었다. 우리 둘이는 의기투합, 관악산 정상을 찍기로 하고 산행을 계속했다. —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
* [사당능선 2인의 종주] — 하마바위와 마당바위를 지나서 이어지는 산길
오전 11시 05분 사당능선에 올라섰다. 가늘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관악산은 암산이어서 우리가 산행하는 사당능선도 암릉이다. 바위를 타고 그 오르내림이 아주 아기자기하다. 맑은 날이면 고도가 높아질수록 산 아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오늘은 주변의 풍경이 모두 안개 속에 잠겨버렸다.
솔밭 사이의 평탄한 능선을 타고 조금 오르다보면, 낙성대(落星垈)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이정표가 있다. — 낙성대(落星垈)는 고려시대 전기 강감찬이 태어난 곳으로,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번지에 위치해 있다. 서울대학교 후문으로 들어가는 길 초입에 있다. 낙성대(落星垈)는 그가 태어날 때, 큰 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이다. 강감찬(姜邯贊, 948∼1031) 이 태어난 낙성대를 보존하고, 강감찬을 기리기 위해 1974년에 낙성대공원이 조성되었다. 공원 안에는 사괴석(四塊石)으로 쌓은 409m의 담장 안에, 강감찬 장군을 모시는 사당 안국사(安國祠)가 있다. 공원의 광장에는, 높은 단(壇) 위에 강감찬의 기마상(騎馬像)이 세워져 있는데, 거란을 크게 무찌른 강감찬의 기상이 그대로 살아 있다. 지하철 2호선이 개통하면서 역 이름으로도 쓰인다.
오전 11시 14분, 하마바위를 지났다. 안개 속이지만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이 그윽하다. 비를 맞으며 안개 속에서 걷는 산길이 호젓하고 좋다. 다시 바위를 타고 테크 계단을 올라갔다.
오전 11시 25분 K8, 마당바위에 올랐다. 마당바위는 사당능선의 명소(名所)라고 할 수 있다. 평탄하고 널찍한 암반은 많은 사람들이 휴식하기에 좋은 곳이다. 날씨가 좋으면 주변의 장엄한 산세와 저만큼 서울 시기지의 풍경을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처이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더운 숨을 가다듬었다.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암송 한 그루가 인상적이다. 암벽이나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소나무는 그 풍치도 고고하지만 생명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신비함이 있다.
마당바위를 지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오르고 내리는 아기자기한 암릉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능선 길은 평탄하게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이다. 자욱한 안개 속이지만 길이 열려 있다. 오르고 내리고 다시 올라가는 산길. 그리고 아득하게 올라가는 나무테크 계단 길, 지루할 틈이 없다.
* [사당능선 헬기장 그리고 테크 전망대] — 그리고 가파른 바위고개
성긴 빗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가파르게 또는 완만하게 올라가는 바위 능선을 타고 오른다. 능선의 헬기장을 지나고 벤치를 갖추고 널찍하게 시설된 전망대를 지났다. 날씨가 좋으면 이 전망대에서 관악산 주봉과 주변의 산세를 조망할 수 있고 골짜기에 자리한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그런데 오늘은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산행을 진행했다. 그리고 가파른 고개를 넘었다.
* [안부의 육거리] — 정상을 향하여 가파른 암릉길을 치고 오르다
가파른 고개를 넘어, 12시 정각에 ‘안부 육거리’에 도착했다. 이곳 6거리에서는 동쪽으로 사당능선, 좌측으르 관악사지로 가는 길, 정면으로 연주대 정상으로 가는 암릉길, 서울대로 내려가는 계곡길(등산로 폐쇄), 과천으로 가는 용마능선, 우면산을 가는 남태령 능선으로 갈라지는 곳이다.
오늘 우리는 관악산 정상(연주대)으로 가는 암릉 길을 잡았다. 두 사람은 촛대바위 암봉을 넘기로 하고 가파른 산길을 치고 올랐다. 정상으로 가는 이 길은 관악산에서 가장 가파르고 험한 산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무테크 계단이 아득하게 올려다 보인다. 계단의 끝에는 ‘통천문(通天門)’이 있다. 큰 바위가 두 개의 바위 사이에 걸쳐져 있어 자연스럽게 그 아래의 암문(巖門)이 되었다.
통천문을 지나고 나면, 가파르게 솟은 암봉이 길을 막는다. 유아독존(唯我獨尊) 촛대바위 등 울퉁불퉁한 바위들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다. 날씨가 맑으면 관악산 정상의 ‘통신탑’과 원형의 '기상대'의 모습이 아득하게 올려다 보이는 곳이다. 오늘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좌우는 모두 천 길 낭떠러지, 차가운 바람이 온몸에 엄습한다.
촛대바위를 넘어 안부(鞍部)로 내려섰다가 다시 가파른 경사의 긴 계단을 차고 오른다. 그리고 다시 암봉을 지나 다시 지그재그의 길고 높은 계단, 짙은 안개 속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이 올려다 보인다. 정상에 이르는 막바지 길목이다. 계단이 설치되기 전에는 좌측의 깎아지른 암벽에 설치된 고정 자일을 타고 정상에 올랐었다. 관악산에 가장 아찔한 절벽의 난(難) 코스에 지금은 가파르고 아득한 테크 계단을 설치해 놓은 것이다.
* [관악산 정상] — 정상의 깎아지른 졀벽에 올라 앉은 연주대(戀主臺)
오후 1시 35분 관악산 정상(629m)에 올랐다. 안개가 짙어 주변의 풍경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상의 동쪽 절벽에 연주대(戀主臺)가 있다. 바위를 깎아서 만든 좁은 암벽 길을 따라 연주대를 찾았다. 아득한 절벽 위에 자리하여 그 자체가 절경일 뿐 아니라 주변 경관이 매우 뛰어나 가히 보는 이로 하여금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영험한 기도처로도 유명하다.
비를 맞으며, 연주대(戀主臺) 좁은 입구에 들어서니, 좁은 안내소 안에서 보살님이 일러서서 친절하게 맞이했다. 따끈한 차 한 잔 드시고 가라고 한다. 연주대에는 응진전(應眞殿)이 있다. 응진전 앞 좁은 마당에 석등이 하나 있고 그 위에 홍련(紅蓮)의 불등(佛燈)이 자욱하게 걸려 있다. 이정식 대원이 신발을 벗고 들어가 참배를 했다. 나오는 길에 친절하신 보살님의 법명을 물었더니 보현행(普賢行)이라고 했다. 보현보살(普賢菩薩)은 석가모니불을 오른편에 협시해 부처님의 행원을 대변하는 보살이다.
해발 629m 높이로 관악산 정상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있는 대(臺)이다. 통일신라 문무왕 17년(677) 의상대사가 관악사(冠岳寺)를 창건하고 연주봉에 암자를 세웠기에 의상대라 하였으나, 지금은 연주대로 불린다. 연주대(戀主臺)로 불리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조선 개국 후 고려의 유신들이 관악산에 은거하면서 망국의 수도인 개성(송도)을 바라보며 그리워했다는 이야기와 충녕대군이 왕위[世宗]에 오르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이곳에 입산하여 경복궁을 바라보며 국운의 융성을 기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 연주대에는 현재 응진전이 있다. 법당 안에는 석가여래 등 삼존불상이 모셔져 있고 응진전 옆 암벽에는 인공의 감실을 마련한 마애약사여래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 [효령각(孝寧閣)] — 독실한 불심으로, 91세까지 장수한 효령대군
오후 1시 50분, 관악산 정상에서 가파른 계단 길을 내려와 연주암(戀主庵)에 이르렀다. 경내로 내려가는 길목의 산록에 효령각(孝寧閣)이 있다. 효령각에는 효령대군의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다. 조선 전기 몇 남지 않은 초상화라는 점에서 경기도문화재 81호로 지정되어 있다. 효령대군 후손인 이정식 대원은 관악산을 올 때마다 참배를 한다. 오늘은 비가 내려서인지 영정각의 문을 잠겨 있었다. 직접 영정을 보지는 못하지만 문 앞에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올렸다.
조선의 태종(太宗) 임금이 셋째 왕자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장차 세자(世子)로 책봉하려 하자 첫째 양녕대군(讓寧大君)과 둘째 효령대군(孝寧大君)은 궁궐을 나와 유랑하다가 이곳 관악산에 들어와 지내게 되었는데, 특히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오래도록 이곳에 머물면서 관악산 정상[戀主臺]에 올라 왕궁을 바라보며 수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효령대군은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승도들에게 불경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세종-문종-단종-세조-성종 대까지 살면서 불교 부흥에 이바지했다고 전해진다. 91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효령각(孝寧閣)의 좌우 기둥의 주련(柱聯)이 대구를 이루고 있다. “出自王宮通佛域 仰瞻天國上仙臺” (왕궁으로부터 나와 불교에 통달하고, 천국을 우러러 신선의 경지에 올랐다)
* [안개 자욱한 연주암(戀主庵)] — 노스님의 독경소리, 고요한 산사
연주암(戀主庵)은 관악산 정상(연주대)에서 남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다. 조선후기 기록인『연주암지(戀主庵誌)』에는 연주암은 본래 관악사로 신라 문무왕 17년(677) 의상대사(義湘大師)가 현재의 절터 너머 골짜기에 창건했으며, 1396년(태조 4)에 이성계가 신축했다. 약사여래입상(藥師如來立像)이 유명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본당인 대웅전과 금륜보전(金輪寶殿)이 있고, 연주대에 응진전(應眞殿)이 있다. 대웅전 앞뜰에는 효령대군이 세웠다는 높이 4m의 3층석탑이 있는데,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으로, 경기도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대웅전에서 독송하는 노스님의 독경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경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추적추적 겨울비가 내리고 있는 조용한 산사(山寺). 연주암 전체가 자욱한 안개에 휩싸여 있고, 오늘따라 인적이 없어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 [과천으로 내려가는 하산 길] — 자하동천(紫霞洞天) 계곡
우리는 연주암의 별채인, 조용한 공양실에 들어가 점심식사를 하고 따뜻한 차를 마셨다. 코로나가 성행하기 이전에는, 이곳에서 등산객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던 곳이었다. 비오는 날, 오늘은 산에 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식사 후, 하산 길에 들었다. 오늘은 연주암에서 그대로 계곡을 따라 내려왔다. 여전히 성긴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으나 내려올수록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연주암에서 과천향교까지 내려오는 계곡을 자하동천(紫霞洞天)이라고 한다. 비가 내려 계곡 물이 콸콸콸 흘러내린다. 계곡에 고인 물이 아주 맑았다. 시원한 물소리가 더운 가슴을 쓸어내린다. 바위에 떨어지는 하얀 물줄기 신선한 기운을 더했다.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와 계곡에 시설된 테크다리를 건너기도 했다.
계곡을 내려오는 사이, 추적이는 겨울비는 그쳤다. 비가 그치고 안개도 걷히니 주변의 산세가 시야에 들어왔다. 계곡의 우측은 케이블카 능선이요, 좌측의 능선은 용마능선이다. 산곡(山谷)의 맑은 기운이 폐부에 스며든다. 비온 뒤의 청정한 기운이 여간 상쾌하지 않다.
* [에필로그] — 자하동천(紫霞洞天)의 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오후 4시, 과천 케이블카 정류장 앞까지 내려왔다. 자하동천 길목에 아기자기 하게 꾸민 시판(詩板)이 눈길을 끌었다. ‘관악산 지킴이 이지명’의 이름으로 내건 ‘오늘의 詩’이다. 제목이 〈공수래공수거〉. 다음은 그 시의 전반부이다.
이승의 나그네여
가져갈 수 없는 그 무거운 짐에 미련을 두지 마오
빈 몸으로 와서
빈 몸으로 떠나가는 인생 또한 무겁기만 하건만
그대는 무엇이 아까워 힘겹게 이고지고 안고 가나
빈손으로 왔으면
빈손으로 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거늘
무슨 염치로 세상 모든 걸 다 가지려 하나
간밤에 꾼 호화로운 꿈도
자고 나면 다 허무하고 무상한 것
어제의 꽃 피는 봄날도
오늘의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데
그대는 지금
무엇을 붙들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치고 있나 (하략)
걸음을 멈추고 시(詩)를 끝까지 읽어 보았다. 평소에도 늘 생각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나이 탓인가. 새삼 시(詩)의 울림이 은은히 가슴에 스며든다. 오늘 내 육신이, 짙은 안개 속에서 험준한 암봉을 타고 넘어. 호젓한 산사에 잠시 머물다가 산 아래로 산 아래로 내려왔다. 지금 우리 인생(人生)이 바로 ‘아래로 흐르는 물처럼 치열한 인생의 산(山)에서 내려오는 길’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 과천향교에 도착했다. 오늘은 서울의 사당역 ‘남현동’에서 ‘사당능선’을 타고 '통천문' ― ‘촛대바위’가 있는 험준한 암봉을 치고 올라 ‘정상’에 이르고, ‘연주암’을 경유하여 과천의 ‘자하동천’으로 하산을 했다. 몇 걸음 앞이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우중운무(雨中雲霧)의 산행이었다. 천지를 분간할 수 없는 자욱한 안개 속에서도 길은 있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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