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약 9회' 14명과 9월 1일부터 9월 20일까지 19박 20일을 떠나게 될
송명숙님 의 고희를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저희 부부를 조선호텔 1층 로비에 있는 프랑스식 메뉴의 값비싼 만찬을
더불어 즐길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여 주셨음에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와 더불어 경축의 말씀을 올립니다.
2007년 6월 16일 오후 7시 아들 셋을 거느리신 모습에서 부러움이 솟구쳤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웃음을 잃지 않는 여생을 아릅답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게 보내 주셨다는 송명숙님의 글과 그림을 16일밤 늦게 집에 돌아와 찾았으나 주신 메일을 찾을 수 없어 다시 보내 주실것을 기대해 봅니다.
제 메일 주소는 ahn 을 대문자 AHN 으로 보내셔야 제가 받을 수 있답니다.
0123AHN@paran.com 입니다.
또 메일을 쓰다보니 제겐 이번 달이 좋은 일과 섭섭한 일이 중첩되어 지난날을 되새김질하는 6월의 중반을 넘기고 있습니다.
특히 6월의 24일 되면 저 (백송)의 어머님 기일이 생각 나네요.
오늘 축하 메세제를 보내는 늦은 밤에 불현듯 돌아가신 어머님의 기일을 생각하며 쓴 글이 어울리지 않지만 이왕 손에 원문을 찾은 길에 제 오래전의 수필작을 붙임으로 보내 드리니 언짢게 생각 마시고 너그러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대내무외한 가운데 폭 넓은 여유로운 생애를 보내시기 바라며
백송 올림
어머님 발걸음
1. 2. 3 약 국 안 창 식
서울 종로초등학교 소년 시절, 천연기념물 백송이 자라고 있는 종로의 조계사 담을 늘 끼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 찬거리 준비로 어머님은 어린 내 손을 잡고 동네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골목길을 따라 동네 어귀를 벗어나면 관훈동에 자리잡은 우리 집 단골 수도약방이 나오고 그 길 끄트머리에 재래 낙원시장에 도착한다.
지금도 생각하면 모자지간의 나들이였는데 그리운 소년 시절의 모습이다.
60년이 지난 지금 재래 낙원시장 자리에는 고층 빌딩이 들어섰고 정부에서는 이 주변 길을 전통 골동품 전시장으로 지정하여 나의 어린 시절 내 어머님 단골 시장 터는 온데 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서울 정동에 자리잡은 배재 중학교에 입학 후 어머님은 나를 조금 큰 시장으로 견문을 늘려 주셨다.
동네 낙원시장의 몇 십 배 되는 동대문 시장의 구석구석을 어머님과 함께 할 때 그 곳 단골 가게에 들러 나까마(판매상) 시세로 물건을 곧잘 싸게 사셨다.
흥정이 끝난 짐을 챙기는 것은 역시 내 몫이었다.
배재 중학교를 졸업하고 배재 고등학교 시절, 교복과 교모의 단정한 복장을 늘 입혀 주신 어머님은 일요일엔 필히 주일 미사 드리려 베드로라는 세례명인 나의 손을 잡으시고는 성당으로 동행하길 원하셨다.
감리교 계통의 배재 교모를 쓰고 성당에 다니는 내 모습은 어딘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이었지만 어머님은 내 의견에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중학교 때 본당은 세종로 성당이었고 고등학교 때는 가회동 이었다.
고교 시절 특활 활동으로 음악에 취미가 있어 합창부에서 활동하였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커서도 성당 성가대에서 봉사하기도 하였다.
성균관대학 약학대학 재학 중에도 가회동 성당 성가대원 활동을 하면서 한 때는 용산 미 8군 성가대에서 테너 파트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제 1회 한국음악제에서 안 익태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교향악단과 합창 연주할 때가 한참 젊은 나이였고 이 때가 미 8군 합창단원 시절이었다.
서울 종로의 견지동 집에서 성균관대학 약학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어머님은
집안 일에 항시 나와 동행하시기를 원하시어 나는 어머님의 발걸음의 그림자처럼 따르며 평생 단 한번도 어머니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자식된 도리였고 부모를 위한 봉양이었다.
내가 본 나의 어머님은, 살아 생전에 성당에서 불우한 사람을 도울 때는 금반지를 즉석에서 빼어 기증하심에 주저 없으셨고, 불우한 지경에 이른 친인척에게 자비를 베푸셨고 세종로 성당과 가회당 성당에서는 레지오 활동에 앞장서시며 불우 이웃을 도왔고 나이 드셔서는 청파동 수녀원 복자 삼회 제1회 회원이 되셨으며, 이 모든 회합과 중요한 모임에 내 손을 꼭 이끌고 발걸음을 옮기셨다.
자녀들을 모두 대학 졸업을 시키시고는 내가 태어난 곳인 조계사가 있는 종로의 견지동 집을 팔아 강남 역삼동 18평 영동아파트를 구입하시고 자녀에게 의탁하는 메인 생활을 하지 않으신다고 공포하시고는 홀몸으로 홀로 사셨는데 그 때가 어머님 나이 75세부터였다.
역삼동 성당 본당 주임 신부님의 지도를 따르며 크리스쳔 생활을 몸소 실행하신 어머님의 기도 생활은 온갖 모든 것이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다.
어느 부모가 다 그러했겠지만 살아있는 당신의 자녀들과 당신과 자녀의 신앙 밑거름을 인도하신 분 10명을 위한 찬양기도로 역삼동 주임 신부님과 함께 1년간 기도를 정성껏 바치셨던 내 어머님은 지금 생각해도 진실한 크리스쳔 이셨다.
(어머님 혼배성사를 주신 故 윤형중신부에 대한 감사 기도, 나의 세례 대부 故 장발 대부님에 대한 감사 기도, 나의 부산 피란시절에 첫영성체를 인도한 부산의 故 파밀라수녀님, 청파동 복자 삼회 원장 수녀님에 대한 감사기도, 故 오기선 신부님에 대한 감사 기도 등등)
강남 지역의 영동 아파트에 주거하시면서 강남 성모병원의 봉사자 모임에 선뜻 지원하셔서 그 큰 병원에서 80세 까지 부지런한 발걸음을 모범으로 보이신 제 1회 병원 봉사자이기도 하셨던 분이었다.
영동아파트는 18평형으로 연탄불 피는 아파트였는데 도시까스가 들어와 아파트를 개조하시며 편한 독립생활에 홀로 사시기를 85세 까지 잘도 견디셨다.
엘레베터 없는 3 층 층계를 하루에도 수 차례 오르내리시며 갖가지 궂은 일을 마다 않으신 어머님의 발걸음은 바쁘기 그지없으셨으리라.
동네 이웃 사람들도 부지런한 할머니라고 입을 모아 축복을 받던 내 어머님.
참 신앙인 이시던 내 어머니가 자녀에 의탁 않고 세상을 앞서 사신다고, 늘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으며, 입을 모아 감탄하였다.
88세 미수를 치르신 후에도 좀 더 좋은 시설의 아파트로 옮겨 홀로 사시기를 본인은 원하였는데 자식들은 연로한 어머님 거동을 불안 해 하였다.
설득 끝에 내게 결국 의탁하시고는, 나와 내 가족과 여의도 40평 삼익아파트에 자리를 잡으셨다. 부모와 함께 살다가 자식이 분가하는 것은 쉬워도 15년간 홀로 사시던 어머님께서 자식의 집으로 모셔질 때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여의도 삼익아파트에서 우리 식구와 같이 사시면서 여의도 성당과 여의도 성모병원을 오가며 매일 미사를 드리셨다. 함께 생활하는 것이 익숙하여 지신 어머님을 위하여 조금 평수가 넓은 여의도 광장아파트로 옮기며 어머님 방을 마련해 드렸을 때 참으로 흐뭇해 하셨다.
고즈넉이 나이가 드시도록 자식에게 억 매이지 않으셨고 또 일가 친척에게 짐을 주시지도 않으셨던 내 어머님.
한번도 중 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없으셨던 어머님은 한마디로 건강체였고 체질한방의 분석으로는 열 소양인이셨다.
어머님의 평소 주문이시던 “앓다가 사흘만에 주님 따르리라는 기도” 제목대로 어머님 나이 93세에 이르러 허리에 복합골절을 입으셨다. 이것이 하느님 품에 안기시는 원인이 될 줄이야?...
노환으로 점차 기력을 잃어 가고 있는 소식을 접하고 미국에 살고 있는 딸이 1998년 6월 22일에 도착하였다. 딸과 손자 영윤이는 미국으로 7월 2일 되돌아가야 하는 내 여동생의 스케줄로 고국의 병환의 어머님을 찾은 것이다. 어머님은 한동안 떨어져 살고 있던 보고 싶은 딸을 만나 보신 후 어머님의 평소 기도 지향대로 3일 만에 영원한 하느님 품으로 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6월 24일 오후 6시 어머님의 임종 시간.
딸( 안문식)이 미국으로부터 고국의 연로한 어머님을 뵈러 온지 사흘만의 일어난 사건이다.
어머님의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여의도 성모병원 영안실에서 장례 절차를 밟아 달라’하시던 말씀대로 여의도 성모병원 수술실 서정현 젬마 수녀님의 보살핌 속에서 하느님 품에 93세 나이로 영원히 안기셨다. 천수를 다하시고는 평화의 영원한 잠을 선택하신 것이다.
딸은 모든 장례 절차를 마무리하고는 원래 계획된 7월 2일 미국으로 출국하는데 아무 거리낌없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어머님과 함께 베푸신 작은 기적이 아니었을가.
비가 오면 그 이면에 해가 있음을 보셨고, 다툼이 있는 곳에 영원한 희망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해를 해 주셨고 삶 속에 죽음을 애도하는 기도 생활에 열심 하신 분이신 어머님의 ‘앓다가 사흘만에 죽음을 달라’ 시던 어머님의 청을 받아 주시고 하느님 품안으로 거두셨으리라 믿는다.
어머님 육신의 모습을 이젠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하늘 나라 본향에 입적하셨지만 어머님의 자취와 발걸음은 돌아가신 후에도 참으로 아름다우셨다.
여의도 성모병원 영안실 입관식과 여의도 성당 영결 미사때에 청파동 복자삼회 소속 수녀님께서 비디오 촬영으로 기록을 남겨 주셨다.
우리 가족이 부탁한 일도 없었는데 하느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 진 일이다.
청파동 삼회에서 전국을 순회하며 복자 삼회의 발자취를 녹화로 남기는 기록이 마감 된 다음 주에 어머님께서 타계하신 소식을 접한 것이다.
죽은자의 장례 절차를 비디오에 담아 영원한 기록으로 내 어머님 ‘장수남 마리아’를 택한 것이었다. 복자 삼회 원장이신 조 수산나와 삼회 회장이신 천안나, 박아가다 구역장, 박마리안나 서기의 마음이 합쳐졌다.
그리하여 어머님 모습을 영원한 복자 삼회 역사 기록으로 ‘죽은자를 위한 주님의 축복 절차’로 한편의 장을 장식하게 된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어머님의 영면을 영원하고도 성스럽게 인도하신 것이다.
어머님의 발걸음은 돌아가셨어도 하느님의 뜻에 의하여 성스럽게 승화되었다. 성모님께서 원하신 묵주 알의 신비처럼 ‘소망하는 이의 복 되도다’ 하신 말씀대로 장 수남 마리아의 신비의 일생이 이렇게 마감되었다.
한 인간의 소망인 ‘의에 산다’는 깊은 뜻을 하느님께서 받아 주셨고, 돌아가신 어머님의 행로 마디마디에서 찬송과 찬양이 솟구치는 것을 접할 때에 나는 그때 그때 마다 바다와도 같이 넓은 그리움으로 깊은 사색에 잠기니 어머님의 모습이 때때로 그리워진다.
내 나이 이제 이순의 60. 반평생을 살아 왔다.
지금껏 인간의 욕정을 어머님만큼 버리고 살아왔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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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6일
송명숙님의 고희 맞으심을 다시한번 축하드리며
난필을 놓습니다.
백송 드림
첫댓글 어머니. 단어 떠올리면 가슴이 찡하고 뭉쿨하지요... 잘 읽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