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네요. 다른분들은 안그런데 저는 글씨가 빼곡빼곡 붙어버리네요. ㅡ,ㅡ ;; 띄엄띄엄썼는데도 그러네요.. ㅠ.ㅠ 이해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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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년 영락제 재위중.
한창 영락제가 안남 원정을 실시하고 있는 때였다. 안남의 거친 밀림과 더위,
척박한 토지의 지배는 아직 확고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안남인들의 끈질힌
저항이 명군을 자주 후퇴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영락제는 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안남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때마침, 몽골원정도 끝난 때여서 몽골고원에 주둔하는 병력을 안남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영락제는 몽골을 견제하고자 여진족을 동맹으로 끌여들였다. 이로써 영락제는
서쪽으로는 티벳에서 동쪽으로는 여진과 조선까지 명나라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이고
안남에 대한 파병을 요구하였다. 여진인들은 3만명을 베이징을 경유해서 지나가고
조선군은 요동을 통해서 명나라에 진입했다. 그러나, 요동쪽에 해적이 침입해서
1만명의 조선군과 충돌을 일으켰다. 조선군은 의기양양하게 요동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베이징으로 입성했다. 영락제는 세종에게 감사의 뜻으로 개인적인 선물 33원을 보냈다.
한편, 호기심 높은 충복 대모험가 정화의 함대는 전투선50척 수송선50척,
총 100척을 이끌고 구라자트 해역으로 막 진입하였다. 영락제는 이들의 보급이
문제없도록 구라자트의 왕에게 통행권을 요구하였다. 구라자트왕은 이에 응하여
정화함대의 100척가운데 정화가 이끄는 6척의 탐험선은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였다.
정화의 함대는 계속 서쪽으로 나아가 호르무즈에서 보급을 받고 10원의 조공을 받은후
샤로흐가 다스리던 티무르제국의 해안지대를 탐험하였다. 티무르제국에선 낯선 방문자를
위해 10원을 주었고 정화의 함대는 아라비아 해안가를 따라 홍해로 나아갔다. 홍해에서는
맘루크왕조에게 조공을 10원받고 다른 여러 소국들에게서 조공을 여러번 받았다.
정화의 함대는 짐바브웨 해안까지 도달했다. 여기서부턴 문명국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정화는 서쪽으로 나가 세상의 끝을 보고싶은 열망때문에 이곳에 보급기지를
설립했다. 아프리카의 최남단인 테이블지역에서 보급기지를 설립후에 아프리카 해안가를
따라 한동안은 북상하였다.
영락제는 100척중에 94척만 도착하고 정화는 계속 항해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당시 안남에서 서서히 밀리고 있던 중이기에 노심초사하는 중이었다.
깊게 고심하던 영락제는 갑자기 안남의 모든 장군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대신들은 영락제가 안남을 포기하는줄로 알았지만 영락제는 생각이 달랐다.
무정부상태인 안남을 계속 지배하여 반란도 800%로 만드는 것보단 그들이 기틀이
안잡힌 초기국가를 세우도록 한후에 침공을 하여 영토는 대부분 점령하고 꼭두각시의
속국으로 만들어 버리자는 계획이었다. 또한 영락제는 남부의 마이오족들을
완전한 중국문화로 편입시키기 위해 도승들을 파견하여 개종시키도록 하였다.
명군이 퇴각한후 2년뒤에 하노이에서 Leo Cai가 국가를 세웠다. 명군이 지배한
지역들은 베트남인들이 점령해버렸고 결국은 Leo Cai에 의해 베트남인들은 결집하였다.
Leo Cai는 명군의 재침공에 대비해 4만명을 하노이에 주둔시키고 1만명은
바카오에 주둔시켰다.
영락제는 서쪽지역의 오이라트부족을 막기위한 병력 만4천명과 동쪽의 여진인들을
감시하던
만2천명까지 파병하고 남부에서 40만명을 징집하여 장군들에게 각각 분배시켜
안남인들을 북쪽에서 포위하였다. 결국 1423년 영락제는 총명령을 내리고 Leo Cai가
지휘하는 4만명은 총7만명중에서 5만명에게 대패하여 남쪽으로 도주하였고 명군은
5천명씩 공성하도록 하고 장군들은 Leo Cai를 뒤쫓았다. 결국 남쪽에서는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어 양측의 피해가 컸다.
하지만, 숫적으로 우세한 명군을 당해낼 수가 없어 결국 Leo Cai는 쫓기다 쫓겨
명군의 추격을 피해 남쪽으로 도주하였으나 곧 격퇴당해 실종되고 남은 군사들은
공중분쇄되었다.
상황파악을 한 안남정부는 땅2개조건에 200원을 제안하였지만 영락제는 무시해버리고
자기가 생각하던 방법으로 안남을 강제로 명나라 속국으로 삼고 3개지역을 할당,
300원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안남에서의 반란도도 민족성3%를 제외하곤 더이상
발생하지 않았다.
1424년, 영락제가 서거하였다. 하지만, 중국대륙과 너무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서쪽해안을
탐험하던 정화에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정화는 소식을 영락제장례식이 끝나고
홍희제에 이어 선덕제가 즉위할때서야 알게되었다.
1427년, 정화는 여러 보급문제를 안고 겨우 아프리카의 중앙해안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아프리카의 중앙해안에서 문명국을 보았고 그들은 먼북쪽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고 다양한 나라들이 있다고 귀뜸해주었다. 이에 정화는 더욱 궁금증이
생겨 아프리카서쪽해안가를 따라 계속 항해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탐험을 떠난 정화를 지원해줘야될지 않해야될지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100척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자금이 부족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육군과 백성들의
생활수준향상을 꾀하였지만 두번째회의에서는 정화를 지원해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정화가 사망한후 세번째 회의에서는 난징의 조선소를 폐쇄하고 해금정책을 피게된다.
1431년, 드디어 정화는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지중해의 입구인 모로코해안을 보았다.
그는 모로코의 항구에서 정박을 하고 그들이 현재 전쟁중임을 알았다.
정화는 북쪽으로 탐험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포르투갈함대와
조우하고 스페인의 세비야에도 정박하였다.
정화는 이곳이 예전의 아프리카인들이 말한 거대한 호수인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아프리카북쪽해안을 따라갔다. 정화는 튀니스를 발견하고 북상하여 프랑스남쪽해안을 발견하고 제노바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반도를 따라서 베니스를
발견하고 여러 이탈리아왕국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동쪽으로 계속 전진하였다.
펠레폰네소스 해협을 건너 흑해의 입구인 콘스탄티노플 해안가까지 갔다. 그들은
그전에 트라케부근에서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정박하기를 원했으나 오스만의 술탄이
거부하여 경고를 주고 모욕을 주었다.
콘스탄티노플을 발견한 정화는 중국인들의 섬세한 건물과는 다른 서양인의 난공불락의
요새를 보고 감탄을 하였다. 그리고 82원의 국가선물을 건네주고 정박을 요청하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이 수도인 동로마제국은 흔쾌히 수락하여 흑해까지 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화의 출신이 먼옛날 자신들의 조상인 로마제국과
알게모르게 서로 조금씩 고역을 한 한나라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곤 매우 놀라고
영광스러워하였다.
정화는 흑해를 탐험하였다. 그곳에서 한때 중원을 차지한 징기스칸의 후예인 바투가
세운 금장칸국의 해안지대를 탐험하였다. 정화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지나서 영국의
런던까지 가려고 하였지만 얼마 안되어서 사망하였다. 탐험대는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1453년 오스만에 의해서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할때까지 중국의 문물을
교류하였다.
정화가 사망한후, 명정부는 현재로선 해군만으로 -1400원의 압박과 10인플레이션을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커서 난징의 조선소를 폐쇄하고 육군과 인프라위주로의 향상만을
꾀하게 했다. 그리고 정부는 중국인들에게 해외로의 진출을 금지하였다. 이는 명나라가
후금의 위기를 극적으로 버텨내는 1645년까지 대양의 탐험가는 나오지 않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첫댓글 명을 AI가 플레이하면 주로 노르웨이 쪽으로 향하더군요 ㅡㅡ;
베트남을 1583년까지 쥐고 있으면 문화도 중국 문화로 바뀌고, 반란도도 사라집니다. 다만 문제는 그 때까지 반란도가 800 에서 수십년에 한번 꼴로 100 이나 150 씩 떨어진다는거죠.. -_-
명나라 기술은 좋은 편이지 않던가요? 유럽보다 나은것 같기도 하던데? (중반까지는)
명나라 처음부터 해군 기술 5에다가 돈빨로 17세기 중반까지는 거의 기술 1위를..
아, 그리고 1436년 이벤트때 C번을 선택하면 정화다음에 탐험가가 나오긴 합니다. 해보진 않았지만;; 그런데, 본문에 써놓은것과 같이 돈이 -1400원이 떨어져나가고 전지역 반란도가 18오르고 인플레4의 캐압박이 다가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