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에게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 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중앙일보 신춘문예당선작>(1989)-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희생적, 비유적
◆ 표현 : 자연물을 의인화(비유)하여 주제를 드러냄
시간의 흐름에 의한 시상 전개와 영탄적 어조
생명의 '탄생 - 성장'의 순환 구조를 취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밝은 피 → 원관념은 흙속에 있는 '물'을 가리키며, '생명, 희생적 사랑'을 함축함.
* 나의 사랑 → 원관념은 '뿌리'이며, '자식, 제자'등의 의미를 함축함.
* 먼우물 → 묽이 맑아 먹을 수 있는 우물물(반대말 : 누렁 우물)
*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 → 자식을 위해 아낌없이 사랑을 줌으로써 느끼는 기쁨
* 단단해지는 나의 살
→ 뿌리가 성장하면서 흙의 연한 본 바탕(기름진 상태)이 거칠어지고 척박해진 상태
* 마지막 잔 → 생명과 몸을 다하면서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
*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 뿌리에게 줄 수 있는 영양분, 사랑.
*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 뿌리가 성장해서 결실을 맺은 후에는 다시 연한 흙(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여건)으로 일구어짐.
* 흙에 대한 보조관념으로 쓰인 말 : 착한 그릇 → 껍데기 → 빈 그릇
◆ 제재 : 흙과 뿌리
◆ 주제 : 뿌리에 대한 흙의 무조건적 사랑과 희생
생명(자식)의 탄생과 성장을 위한 희생적인 모성애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흙과 뿌리의 만남 - 뿌리를 향한 흙의 첫사랑
◆ 2연 : 뿌리의 성장을 기원하는 흙
◆ 3연 : 뿌리의 성장에 기쁨을 느끼는 흙
◆ 4연 : 뿌리가 성장할수록 황폐해지는 흙
◆ 5연 : 뿌리가 성장한 후 다시 재생되는 흙의 순화적 삶.(생명 '탄생 - 성장'의 순환 구조)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흙과 뿌리의 관계를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에 설정하여, 뿌리가 성장하면서 흙이 거칠어지는 자연 현상에서 자식을 향한 희생적인 모성애를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의인화의기법으로 상징적 의미를 잘 살리고 있는 이 시는 흙이 '착한 그릇 → 껍데기 → 빈 그릇'의 과정을 거쳐 다시 연한 흙이 된다고 하여, 또 다른 생명을 탄생 · 성장시키는 순환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흙과 뿌리의 관계를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 보는 것과 함께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작가소개]
나희덕 Ra Heeduk시인, 대학교수
출생 : 1966. 충청남도 논산
소속 : 서울과학기술대학교(교수)
학력 :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데뷔 : 1989년 중앙문예 '뿌리에게' 등단
수상 : 2019년 제21회 백석문학상
경력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관련정보 : 네이버[지식백과] - 마른 물고기처럼
작품 : 도서, 공연
<약력>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창작과비평》, 《녹색평론》의 편집자문위원을 역임했다. 1998년 제17회〈김수영문학상〉, 2001년 제12회 〈김달진문학상〉, 제9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학 부문, 2003년 제48회〈현대문학상〉, 2005년 제17회〈이산문학상〉, 2007년 제22회〈소월시문학상〉, 2010년 제10회 〈지훈상〉 문학 부문, 2014년 제6회 〈임화문학예술상〉, 제14회 미당문학상, 2019년 제21회 백석문학상[1]을 수상했다.
<저서>
-시집
《뿌리에게》(창작과비평사, 1991)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창작과비평사, 1994)
《그곳이 멀지 않다》(문학동네, 2004)
《어두워진다는 것》(창작과비평사, 2001)
《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 2004)
《야생사과》(창비, 2009) ISBN 978-89-364-2301-8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 2014) ISBN 978-89-320-2530-8
《그녀에게》(예경, 2015)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
<시인의 말>
-《뿌리에게》
꽃의 향기에 비해 과일의 향기는 육화된 것 같아서 믿음직스럽다. 나의 시가 그리 향기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쓰는 이유는, 시란 내 삶이 진솔하게 육화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삶과 시에 대한 이 미더움을 버리지 않고 천천히 익어가고 싶다.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삶의 깊이를 헤아리고 담아내는 일이란 결국 그것의 비참함과 쓸쓸함을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걸 이제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비참함과 쓸쓸함이 또한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면, 느릿느릿, 그러나 쉬임없이 그리로 갈 것이다. 매순간 환절기와도 같을 세월 속으로.
-《그곳이 멀지 않다》
고통을 발음하는 것조차 소란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것이 안으로 안으로 타올라 한 줌의 재로 남겨지는 순간을 기다려 시를 쓰고는 했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은 침묵의 순연한 재가 아니었다. 끝내 절규도 침묵도 되지 못한 언어들을 여기 묶는다. 이 잔해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의 소음 속으로 돌아갈 운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두워진다는 것》
언제부턴가 내 눈은 빛보다는 어둠에 더 익숙해졌다. 그런데 어둠도 시에 들어오면 어둠만은 아닌 게 되는지, 때로 눈부시고 때로 감미롭기도 했다. 그런 암전(暗電)에 대한 갈망이 이 저물녘의 시들을 낳았다. 어두워진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밝히려는 내 나름의 방식이자 안간힘이었던 셈이다.
-《사라진 손바닥》
'도덕적인 갑각류'라는 말이
뢴트겐 광선처럼 나를 뚫고 지나갔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살의 일부가 되어버린 갑각의 관념들이여,
이제 나를 놓아다오.
- 시
나희덕 시인의 대표작으로는 땅끝, 배추의 마음, 뿌리에게, 푸른밤이있다
-<배추의마음> :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느끼는 생명의 가치를 주제로 한다. 배추를 사람처럼 대하며 자연과 인간이 서로 교감을 나누는 자연 친화적인 모습이 드러나 있으며, 독백체의 어투로 생명존중이라는 마음을 고백한 작품이다.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 말(馬)과 말의 이중의미를 한데 어우르며 표현하였으며, 지식인의 언어 또는 시인의 말이 땅끝에서 퍼져나가 다시 돌아오고 있음을 진중하게 고백하고 있는 작품이다.
-<땅 끝> :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시작되어, 힘든 삶에서 느끼는 것을 표현했으며, 또한, 절망의 끝에서 다시 찾은 희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시적 화자가 말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산문집
《반 통의 물》(창비, 1999), 《저 불빛들을 기억해》(하늘바람별, 2012)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달, 2017)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창비, 2003), 《한 접시의 시》(창비, 2012)
-편저
《아침의 노래 저녁의 시》(삼인, 2008), 《나희덕의 유리병 편지》(나라말, 2013),
《나의 대표시를 말한다》(도서출판b, 2012)
첫댓글 감사합니다
무공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녹색의 계절에 맘껏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