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增補] 『惕若齋學吟集』 卷之下
送全糾正赴任晉陽五倫
- 진양으로 부임하는 전규정(전오륜)을 보내며 -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지음.
綉衣驄馬赴南州
赤葉黃花九月秋
矗石樓前春水闊
也應携妓上欄舟
수의어사(綉衣御史)로 청총마를 타고 남쪽 고을을 부임하는데
붉은 잎과 노란 국화는 9월의 가을이네
촉석루 앞에 봄물이 넓어지면
또한 응당 기생을 데리고 목란(木欄)배에 오르리
[출처] 삼현실기(三賢實記) 정선전씨 채미헌공파 종회
◎ 규정 [ 糾正 ]
고려시대 사헌부는 본래 어사대(御史臺)·사헌대(司憲臺)·금오대(金吾臺)·감찰사(監察司) 등으로 여러 차례 그 명칭이 바뀌면서, 배속되었던 관직명 또한 자주 바뀌게 되었다.
1308년(충렬왕 34)에 충선왕이 감찰사를 다시 사헌부로 고치면서 종6품의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규정이라 고치고, 그 관원도 14인으로 늘리고 그 가운데 4인은 겸관으로 하여 그대로 종6품으로 하였다.
그 뒤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어사대라 고치면서 규정을 감찰어사라 하였으며, 1362년에는 다시 어사대를 감찰사로 고치면서 감찰어사를 규정으로 고쳤다. 규정은 대관(臺官)의 일원으로서 백관(百官)의 규찰(糾察)과 제사(祭祀)·조회(朝會) 및 전곡(錢穀)의 출납 등을 감찰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규정 [糾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구용 [ 金九容 ]
본관 안동. 자 경지(敬之). 호 척약재(惕若齋). 초명 제민(齊閔). 공민왕 때 16세로 진사에 합격, 그 뒤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주부(主簿)를 거쳐 민부의랑(民部議郞) 겸 성균관직강(直講)이 되었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이 중건되자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이숭인(李崇仁) 등과 성리학을 일으키고 척불숭유의 선봉이 되었다.
친명파로서 1375년(우왕 1) 삼사좌윤으로 있을 때, 이숭인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등과 함께 북원(北元)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다. 1381년 풀려나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이듬해 대사성 ·전교시판사가 되었다.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1384년에 행례사(行禮使)로서 명나라에 가던 중 요동에서 붙잡혀 난징[南京]으로 압송, 영녕(永寧)현에서 병사하였다. 사장(詞章)을 잘하였으며, 《동문선》에 8편의 시가 전한다. 문집에 《척약재문집》, 저서에 《선수집(選粹集)》 《주관육익(周官六翼)》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구용 [金九容]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직지(直指)
비단옷을 입은 어사를 간칭하는 용어다. 수의어사(綉衣御史), 직지수의사자(直指綉衣使者), 직지사자(直指使者)라고도 호칭했다. 한무제가 처음 설치하고 왕망 수의집법(綉衣執法)으로 개칭했다. 도적을 쫓아가 체포하고 큰 옥사를 심리했다. 녹봉은 6백석이다. 한무제 말년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기의하자 무제는 포승지(暴勝之) 등을 직지로 임명하여 부월을 지참하고 현지로 내려가 관군을 독려하고 2천 석 이하의 지방관을 주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사정에 얽매이지 않고 일을 처결한다는 뜻에 수의는 황제의 은총을 받은 존경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상설직이 아니고 일이 발생했을 때만 설치한 관직이다.
◎ 청총마 [ 靑驄馬 ]
푸른색과 흰색의 털이 섞여 있는 준마[駿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