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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우리의 절박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이스라엘의 지형은 독특합니다. 해발 천미터 남짓되는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가 있는가 하면, 해수면 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도 있습니다. 다양한 꽃들과 식물들로 온화하고 풍성한 지역이 있는가 하면 황량하고 척박한 광야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들르신 지역도 정말이지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예리코! 지구 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자리한 도시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 예리코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심각한 시각 장애를 안고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간의 세월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비장애인인 우리는 상상도 못할 고통을 그는 겪고 살아왔습니다. 앞이 조금도 안 보이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눈 떠도 깜깜 눈 감아도 절망! 그 삶이 참으로 혹독하고 절망스러웠습니다.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그,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히 살아가던 예리코의 시각장애인에게 어느 날 뜻밖의 행운이 찾아옵니다. 해방자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코앞으로 지나가시는 소식을 전해 들은 깃입니다.
그는 직감으로 느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수많은 군중의 말소리에 파묻혔을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절박하고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의 간절함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그의 평생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 주님께서는 자상하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십자가는 자기 합리화의 도구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소경은 구걸하며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네가 뭔데 그렇게 소리를 질러?”하며 나무랍니다.
그러나 소경은 더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시고, 소경은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당시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할 일이 없었고 그러면 가난해서 구걸하는 신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요즘 그런 상황이라면, “예수님도 가난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너도 네 처지를 받아들이고 수긍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눈을 떠서 일해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려는 그에게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에도 신앙이 약간은 지금 자신의 처지에 수긍하고 안주하게 만드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어떤 신자분들은 정말 사명을 깨닫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불쌍한 처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닮았다면 위안하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신앙은 모든 것을 희망하고 모든 것을 믿고 믿는 것을 위해 지치지 않는 노력을 함을 의미합니다.
고 정주영 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은 노력, 끈기, 그리고 위험을 감수할 용기의 결과다. 성공의 열쇠는 포기하지 않고 항상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다.
성공으로 가는 여정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지만, 항상 가치가 있다. 성공한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저는 이 모습이 오늘 복음의 믿음으로 구원받은 소경의 모습과 더 닮았다고 봅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책이 있습니다.
1913년 이 책을 쓴 사람은 프랑스 한 마을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나무를 잘라 숯을 만들어 파는 동네였습니다.
당연히 산은 벌거숭이였습니다.
그리고 각자는 경쟁과 미움, 술과 향락 등에 빠져
전혀 행복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벌거숭이 산을 지날 무렵 한 양치기를 만납니다. 그는 도토리를 땅에 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1910년부터 나무를 심어왔고, 3년 동안 매일 좋은 도토리만 골라내서 심어 10만 개의 도토리를 심어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쉰다섯 살의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이름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를 잃고 이 시골로 내려와 양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도토리를 심기 시작한 이유는, 그곳에 나무가 없어서 그 땅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땅은 그에게 어쩌면 아내와 아들과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땅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밤에 매일 좋은 도토리 100개씩 골라내어 낮에는 양을 치며 곳곳에 그 도토리를 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토리 10만 개 중 2만 개가 싹을 틔웠고 그중 만 개가 조금씩 자라고 있었습니다.
지은이가 마지막으로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난 건 1945년 6월이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어느덧 여든일곱 살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전의 그 황무지가 있던 그 지역에 있었지만, 그곳은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었습니다.
버스가 빠른 속도로 지나다니고 사람 사는 냄새,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부는 소리, 샘물이 흐르는 소리가 있는 살아있는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베르공 마을에서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고, 공동작업을 한 희망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채소밭에는 열매들이 맺혀 있었고, 그곳에는 젊은 부부 네 쌍을 포함한 스물여덟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살아있는 곳이자, 살고 싶은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여전히 예전의 그 황무지가 있던 자리에서 아직도 황무지인 것처럼 그곳에 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2023년 4층에 살던 두 아이의 아빠가 아래층부터 화재가 발생하여 7개월 된 아기를 안고 뛰어내리다가 아이는 살았지만, 아빠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일이 있었습니다.
아래에서 쓰레기 분리 수거장의 푹신한 포대를 깔아놓고 큰 아이를 던졌는데 살았습니다.
그다음은 아내가 뛰어내렸고 가벼운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안고 뛰려던 아빠는 아래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고 뇌진탕으로 죽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와 같습니다.
아기에게 아빠와 같이 죽음의 십자가로 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빠가 널 위해 죽었으니, 넌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야!”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보며 그분의 가난과 희생의 삶을 내가 꿈을 갖고 노력하지 않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음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카 18,35-43: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누가 지나가느냐고 눈먼 사람이 묻자,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37절)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었다(38절). 매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구걸하던 그 사람이 이제 하느님의 선물을 받게 된다. 그는 하느님께 나아가듯 예수님께 나아간다. 이렇게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음이 구원을 주었고, 그다음에 시력을 되찾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42절). 이 말씀은 인간의 권한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보여준다. 주님은 하느님께 기적의 능력을 청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의 시력을 되찾아 주셨다. “다시 보아라!” 이 한마디가 눈먼 이에게는 그대로 빛이었다. 참 빛이신 분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43절). 그는 이중으로 눈먼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육신의 눈먼 상태뿐 아니라, 마음의 눈이 먼 상태에서도 벗어났다.
그에게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군중도 모두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오늘의 눈먼 이가 그토록 부르짖어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받았다면 우리의 눈은 어떠한가? 사물을 쳐다보는 눈은 볼 수 있다 해도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얼마나 밝은가? 우리도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자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이제 주님의 참모습을 볼 수 있고, 그 신비를 깨달아 알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식복사 없이 생활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주로 대형 할인 매장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이 안에는 없는 물건 없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카트를 끌고 다니다 보면,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라는 생각으로 카트 안에 넣게 됩니다. 특히 ‘원플러스원’ 상품의 경우는 큰 이득이라는 생각에 지금 별로 필요하지 않음에도 카트 안에 넣곤 했습니다.
산 것을 집에 와서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한숨을 짓게 됩니다. 찬장, 창고에 1년은 거뜬하게 살만한 물건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사는데 이 많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었습니다. 필요한 것이 아닌, 필요할 것 같은 것을 필요 이상으로 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너무 많아져서 때로는 골치까지 아파집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으로 집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유통기한이 지나 ‘아깝다’라는 생각을 하며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필요할 것 같은 것을 필요 이상으로 사면 안 됩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사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물건만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 감정도 그렇습니다. 필요한 감정만 가져야 하는데, 불필요한 감정까지 품고 삽니다. 미움, 원망, 판단, 걱정, 불안, 절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우리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갖는 우리가 아닌, 필요한 것만을 갖는 우리가 될 때 현명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물건도 그렇고 또 감정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필요한 것만을 가지려고 할 때, 주님께도 필요한 것만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모두 다 달라는 욕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겸손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에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사실 보통 구걸하는 사람이 주로 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자신의 빈곤함을 해결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요구를 하지 않을까요? 아마 “한 푼 줍쇼~”를 말하는 것이 정답처럼 보이는데, 그는 자비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르느냐?”라고 묻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이르셨고, 그는 즉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다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또 어떤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 채 알아서 해달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불필요한 것은 제외하고, 필요한 것만을 청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주님으로부터 응답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누구나 약점은 있다.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장점은 부각하고 약점은 줄이지만, 실패한 사람들은 종종 약점 때문에 인생을 망친다(스티븐 제이 굴드).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묵시2,4)
진정,
영의 눈을 뜨고 싶다면
날개가 부러지고
상처를 입었던
그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네.
진리의 문 앞에서
우리를 인도하는
빛을 바라보았던
영혼의 첫 경험을 기억하며
회개의 눈물로
다시 일어서야 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더욱 큰 소리로...”
그러자 걸음을 멈추십니다.
내가 낫고자 하는 열망만 있다면...
그래서 주님께 더 큰 소리로 외친다면
그분은 걸음을 멈추시고
감고 있는 제 눈과,
닫혀있는 제 귀를 열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낫고자 하는 갈망만 있다면...
삐뚤어진 제 사고와
불순한 제 마음도
너저분한 제 영혼도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더욱 큰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그냥 크게 해서는 안됩니다.
죽을 힘을 다해 외쳐야 하는 겁니다.
저도 오늘도 죽을 힘을 다해 살아보렵니다.
그럼 제 눈을 가리우던 장막이 걷히고
주님이 똑바로 보이고 들리지 않던 그분의 음성(타인의 말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겠지요.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여라.>
▥ 요한 묵시록의 시작입니다.1,1-4.5ㄴ; 2,1-5ㄱ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2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4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5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2,1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2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너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냈다.
3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