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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대가 머문자리 원문보기 글쓴이: 스타
“편하게 역 근처 호텔로 잡자. 얼마 차이도 안 나잖아.”“돈 아깝게 왜 호텔을 예약해, 에어비앤비가 훨씬 싸고 시설도 좋아.”“여기 맛있어 보이네. 추운데 대충 아무데나 가자.”“여기 평점 1점대야. 이런데 막 들어가면 ‘호갱’이라고!”
네 식구가 마지막으로 함께 갔던 가족여행을 돌아보면, 두 살 위 오빠와 한 편이 돼 부모님과 맞서 티격태격 하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중에서도 갈등 핵심 인물은 아버지와 딸, 필자 본인이다. ‘자그마하던 때는 아무 대꾸 없이 하자는 대로 잘 따라다녔는데 너무 사나워졌다’며 의기소침해하는 아빠를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도, 답답한 마음에 종종 화를 내게 된다.
결국, 늘 어느 한쪽이 욕심을 내려놔야 끝나는 분쟁. 아빠가 ‘네 뜻대로 해라’라며 양보할 땐 원하는 걸 얻어냈어도 마음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아빠와 단둘이 여행을 떠나는 걸 상상해봤다. 잠깐 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나마 오빠라도 있으면 든든한 내 편이 생기는데, 아빠와 둘이서만 가면 얼굴 붉히지 않고 돌아오는 게 가능할까? 걱정은 됐지만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함께 보내는 시간도 줄어들고, 자연스레 취향도, 여행 스타일도 너무 달라진 부녀.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단둘이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본다. 이 여행,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목적지를 정해야 했다. 성별도, 세대도 다른 둘이 다 최대한 만족할 곳이어야 했다. 서울에 거주하는 부녀가 당일치기로 다녀오기 좋을 수도권 지역으로 범위를 좁혔다. 햇볕 쨍쨍한 여름에 50대인 남성과 20대 여성이 둘 다 공통적으로 많이 가는 지역이 있을지 살펴봤다.
KT가 빅데이터와 AI를 기반으로 분석하는 기법을 활용해보기로 했다. KT AI/빅데이터 사업본부가 서울시 거주자 중 2020년 6월~8월 주말에 50대 남성, 20대 여성이 각각 가장 많이 방문한 서울/경기/인천 시군구를 분석한 자료를 참고해 석 달 간 취합한 결과의 평균을 냈다. 그 결과 작년 해당 3개월 동안 50대 남성은 평균적으로 1. 경기 화성시(43만 6848명), 2. 경기 남양주시(41만 5674명), 3. 경기 부천시(40만 2953명) 순으로 많이 방문했다. 20대 여성은 강남구(82만 9995명), 마포구(66만1691명), 송파구(51만 4875명) 등 주로 서울 내에서 이동을 많이 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외의 지역으로는 경기 부천시(43만1914명)를 가장 많이 방문했다.
서울에 거주하기 때문에 서울을 벗어나고 싶어 경기권에서 공통으로 상위에 오른 부천시를 방문하기로 했다. 항상 목적지로 잘 가다가 경로를 벗어나 갑자기 꽂히는 곳으로 향하는 아빠와의 갈등 방지를 위해, 부천 내에서 가보고 싶은 곳을 미리 두 곳씩 골라 총 4곳을 방문하는 계획을 세웠다. 50대 남성과 20대 여성이 각자 원하는 곳들로 구성한 부천 당일치기 여행.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출발했다.
딸 PICK
모네정원
경기 부천시 고강동 185-3
인스타그램에 ‘부천여행’을 검색했을 때 데이지 꽃을 비롯한 수많은 예쁜 꽃들로 가득한 ‘인생샷 성지’를 발견하고 필자가 가장 먼저 기록했던 곳. 프랑스 유학 시절 파리 근교 ‘지베르니’ 여행 중 방문했던 모네 생가와 정원을 가족과 함께 가지 못해 아쉬웠던 기억에 망설임 없이 이곳을 가장 먼저 방문했다.
도시에 살아가며 지친 어른, 아이 모두 자연 속에서 체험을 즐기며 상처를 치유하고 힐링하기 위해 찾는다는 이곳. 산림청에서 주관하는 ‘2020년 아름다운 정원’으로도 뽑혔다. 예약제로 운영되며, 2시간 동안 계절별로 매실 따기, 감자 캐기, 플라워클래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기본 입장료는 5000원, 아이 체험비 1만 5000원, 어른 체험비(플라워) 2만 5000원이다.
좁은 통로를 지나 드넓은 정원으로 들어서니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 한복판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 불과 몇십 분 떨어진 곳에 이런 정원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비가 와 하늘이 흐리고 꽃이 젖어있었지만, 오히려 비내음과 울창한 정원이 잘 어우러져 주변의 꽃과 풀, 그리고 싱그러운 분위기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바닥이 흙으로 돼 있고 주변에 풀이 많기 때문에 세탁이 편리한 신발과 옷차림으로 방문하는 걸 추천한다.)
그다지 내켜 하지 않는 아빠를 옆에 앉히고, 함께 리스 만들기 체험을 해보기로 했다. 사장은 바구니와 가위를 건네주며 정원에서 원하는 꽃 몇 가지 자유롭게 골라 담아오도록 해줬다. 직접 고른 꽃과 사장이 준비해온 꽃들로 리스 만들기 체험을 시작했다.
엄마와 딸, 혹은 친구들끼리 오는 등의 조합은 많이 봤지만, 아빠와 딸이 함께 수업을 들으러 온 건 처음이라는 사장. 마치 오래 알고 지내온 것만 같은 친근함이 묻어나는 대화와 함께 줄기 다듬는 법, 꽃 모양과 크기에 따라 꽂아야 할 위치 등에 대한 교육을 상세히 받았다. 낯선 꽃의 종류와 특징에 대한 설명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설명을 마치고 사장은 아빠와 딸이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잠시 자리를 비웠다. 꽃과 가까이해본 적 없는 부녀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하며 리스를 꾸며나갔다. 완성한 줄 알고 사장에게 보여주니 ‘빈틈이 보이면 안 된다’며 퇴짜를 맞았을 땐 서로를 탓하기도 했다.
8할은 사장의 도움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리스를 완성했다. 만드는 과정에선 ‘이게 될까’ 우려했지만, 결과물을 보니 매우 만족스러웠다. 데이지꽃이 많이 시들기 전 왔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지만,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힐링+인생 사진 명소였다.
딸 한줄평: 시작 전에는 ‘벌써 잠 온다’고 해 걱정시키던 아빠가 투박한 손으로 꽃을 꼼꼼히 다듬고 집중해서 꽂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었다.
아빠 한줄평: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강제로 카네이션을 만든 이후 처음으로 꽃을 다뤄본 것 같다. 생각보다 꽃꽂이에 소질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인생 2막을 잠시 그려봤다.
아빠 PICK
정글애갑오징어경기 부천시
길주로560번길 59
우리 집 부녀는 음식 앞에서는 대동단결이다. ‘아재+초딩 입맛’인 둘은 집에서도 늘 냉장고에서 같은 음식을 두고 눈치작전을 펼친다. 따라서 메뉴 선정에는 별 갈등이 없었다. 다만, ‘검증된 맛집’을 중시하는 필자는 다양한 포털의 리뷰를 분석하고 맛집을 찾는 편이지만, 아빠는 대충 검색해 맛있어 보이면 찾아간다. 이번에 아빠가 고른 이곳 역시 평가가 포털에 따라 극과 극으로 갈리는 곳이었다. 실패의 두려움이 가득 몰려왔지만,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
시내에서 약간 벗어나 한데 모여있는 음식점들 가운데 찾은 이곳. 역시나 찾아가는 과정에서 ‘여기도 맛있겠다’, ‘그냥 저기 갈까?’ 등 보이는 곳마다 다 가고 싶다는 아빠를 말리느라 애썼다.
대표 메뉴인 ‘갑오징어 철판 볶음’(2인 3만원)과 볶음밥(2000원)을 주문했다. 아무 기대를 안 하고 오히려 걱정을 너무 해서였을까, 깔끔하고 푸짐한 구성에 맛까지 좋아 다소 의아했다. 평점만 보고 편견 잔뜩 갖고 들어선 게 머쓱해질 정도였다. 직원들이 불친절하다는 후기가 많아 매 순간 긴장하고 지켜봤지만, 별 특이점을 느끼지도 못했다. 맨날 검색창 제일 위에 뜨는 곳 간다며 큰소리치던 게 민망해질 정도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딸 한줄평: 평점이 꼭 맛집의 진위를 결정하는 요인이 아닐 수 있기에 검색에 대한 지나친 부담은 내려놔도 될 것 같다고 느끼게 됨.
아빠 한줄평: 처음 고를 때 리뷰 볼 생각은 못하고 포털에 뜬 사진과 메뉴표만 보고 찍었다. 나중에 딸이 ‘직원이 불친절하다’는 리뷰를 보여줬을 때 마음이 철렁했으나, “원래 맛있는 집은 조금 불친절한 거다”라고 우겼다. 음식점 들어설 때부터 조마조마했으나 특별히 불친절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종업원이 멀리서 다가올 때마다 조마조마했던 식사였다.
딸 PICK
스페이스작경기
부천시 까치로20번길 13-7
브런치, 카페, 루프탑, 공연, 전시회를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는 4층짜리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작’. 식사 후 커피 한잔하러 갈 카페를 찾던 중,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않아도 편하게 한 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 같아 이곳을 찾아가 봤다.
‘카페’의 역할을 하는 공간은 커피, 베이커리, 디저트를 즐길 수 있는 1층(고르작)과 2층(수작)이다. 카페 곳곳의 예술품에는 부천의 작은 가치들을 발굴하기 위해 여러 작가와의 협업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예술 작품을 전시 및 판매한다는 사장의 의도가 묻어있다.
더불어 1층에는 각종 쥬얼리를 구입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고, 로스팅룸에서 커피를 직접 로스팅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가장 맘에 드는 자리를 골라 잠시 목을 축이기로 했다. 여름에 시원하게 즐기기 좋다고 추천받은 제주한라봉쿨러(6500원)와 시그니처 메뉴인 크림브륄레 라떼(6000원)를 주문했다.
제주한라봉쿨러는 제주한라봉 알갱이가 입에 가득 들어오고 청량하고 시원해 여름과 딱 어울렸다. 진한 라떼 베이스에 슈크림 올라가고, 설탕가루로 달고나 느낌을 낸 크림브륄레 라떼는 윗층을 톡톡 깨서 한숟갈 떠먹으니 크림의 달달함이 진하게 들어왔다. 아빠는 어릴적 먹던 ‘탱’이라는 주스 맛이 생각난다며 제주한라봉쿨러를 더 좋아했고, 필자는 프랑스에서 즐겨먹던 최애 디저트가 크림브륄레였기 때문에 크림브륄레 라떼에 더 손이 갔다.
3층(예작)은 브런치 뷔페와 함께 라이브 홀이 마련돼 있다. 이곳에서 한식, 양식 등 다양한 요리로 구성된 브런치 뷔페를 1만3500원이라는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다. 비 오는 날인데도 사람이 꽉 찰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이곳에서 저녁에는 각종 공연도 이뤄진다고 한다.
이밖에도 4층(쉴작/자작)에는 부천의 아름다운 주택가가 한눈에 담기는 루프탑 가든과 라운지, B1층(시작)에서는 ‘인스타 감성’ 담은 미술 갤러리, 전시회를 관람할 수 있다. 비 오는 날이라 야외로 돌아다니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이곳에서 오래 머물며 아빠와 서로 사진도 찍어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하고 싶은 건 많지만 돌아다니기 힘들 땐,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작’을 찾아보는 건 어떨지.
딸 한줄평: 저렴한 가격의 브런치, 깔끔한 인테리어, 무료 전시회 등 전반적으로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아빠도 만족한 것 같아 뿌듯하다.
아빠 한줄평: 20대의 검색 능력을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 시간이었다.
아빠 PICK
상동호수공원
경기 부천시 길주로 16
꽃 필 때마다 사진 찍으러 갈 때 빼고는 굳이 공원에서 산책하는 걸 즐기지 않는 필자지만, 주말마다 엄마와 산책을 즐겨 가는 아빠가 고른 상동호수공원으로 여행 일정을 마무리했다. 농업 공원을 비롯한 테마가 있는 공간이 곳곳에 배치돼있다.
호숫가에 있는 다리를 건너는데, 낚시를 좋아하는 아빠가 잉어를 찍겠다고 한참을 서 있었다. 빨리 이동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잉어가 여러 마리 모여 있을 때 사진 찍었다며 흡족해하는 아빠를 보고 말없이 기다렸다. 필자에겐 매우 낯선 농업 공원의 벼나 작물에 관한 정보를 50대는 알까 싶어 물었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빠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벼도 작물도 지나치고, 본격적으로 공원 곳곳을 산책했다. 20대 딸의 ‘프사’ 건져주기 위한 아빠의 노력도 시작됐다. ‘필터 카메라 쓰면 어떡하지?’, ‘개성 넘치는 구도의 사진이겠지’ 등 별 기대 없이 포즈를 취했지만 결과물은 생각 외로 만족스러웠다.
사진을 어디서 찍어야 하나 여기 저기 둘러보던 중, 아빠가 이 공원에는 안내문과 경고문이 너무 많아 사진 찍기 어렵다고 했다. 얘길 듣고 보니 정말 공원에 유독 플래카드나 표지판 등의 형태로 쓰인 글귀를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공원을 돌아다니며 경고문이나 안내문을 발견할 때마다 사진을 찍던 아빠의 모습이 우스웠다.
딸 한줄평: ‘부천 가볼만한 곳’에 자주 등장하던 곳이라 기대가 컸지만 평범한 동네 공원같은 느낌이라 살짝 아쉬웠음.
아빠 한줄평: 서울서 가깝고 주차료도 싸 산책 삼아 갈 만하다. 공원 곳곳에 붙은 경고문을 보며 온갖 일탈이 횡행하는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어쩌다보니 잔잔한 힐링을 목적으로 방문한 이곳에서 웃음바다로 빠졌지만, 오랜만에 목적지 없이 걸으면서 아빠와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며 부천 당일치기 여행을 마무리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의 방에서 쿨쿨 잠이 드는걸 보니 매일 부정해도 서로 많이 닮긴 닮았나보다.
50대 아빠와 20대 딸, 단둘이 여행할 수 있냐고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해보려 한다. 정답은 충분히 그렇다! 또래 친구들과의 여행과는 또 다른 재미로 다가온 아빠와의 여행. 서로를 이해하고 맞춰서 함께 해보려는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즐겁게 다녀올 수 있는 것 같다. kt를 쓰는 수많은 사람들의 빅데이터와 AI가 찍어준 동네라 원활했던 걸까.
‘아빤 이럴거다’, ‘딸은 이러겠지’하는 편견에 떠나보기도 전 거부감부터 들더라도, 필자를 믿고 한번 떠나보시길. 함께 시간을 자주 보내던 시절의 추억도 떠오르며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테다.
전국의 서먹해진 부녀의 여행을 응원한다.
강예신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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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대가 머문자리 원문보기 글쓴이: 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