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자(曾子)가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士不可以不弘毅]”라고 말하였다.
천하에 넓지 못할 사람도 없고 굳세지 못할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제 스스로 넓히지 않고 굳게 하지 않을 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렇습니다.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는 것은 곤(坤)의 체(體)이니 천하의 넓음으로 말할진댄 이보다 넓은 것이 없으며, 운행이 굳세어 쉬지 않는 것은 건(乾)의 상(象)이니 천하의 굳셈으로 말할진댄 이보다 굳센 것이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빼어난 자질을 받아 가장 신령하여 천지의 체용을 다 갖추고 있으니, 본성을 품부(稟賦)받아 태어난 처음에는 넓고 굳세지 않은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질에 구애되고 물욕에 가려짐을 보통 사람이 면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치우치고 좁아서 날로 스스로 작아지는 데로 달려가거나, 게으르고 저하되어 날로 스스로 포기하는 데로 돌아가, 역량은 중임을 감당할 수 없고 걸음은 멀리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천만 세를 지나도록 온통 이러하여 모기가 산을 지고 벌레가 황하를 달리는 꼴과 다르지 않으니, 성현(聖賢)이 중임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에 비겨 보자면 어린 꼬마와 분육(賁育.옛날 용맹했던 맹분과 하육)의 차이보다 훨씬 큽니다. 넓고 굳센 선비를 얻기가 이토록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넓음은 절로 넓어지는 게 아니라 반드시 넓힐 방법이 있으며, 굳셈은 절로 굳세어지는 게 아니라 반드시 굳세게 할 방법이 있습니다.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이에게 묻고 많이 알면서도 적게 아는 이에게 물으며, 있어도 없는듯이 하고 꽉 차 있어도 빈 것처럼 하며, 남이 범해 와도 따지지 않으면,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관대함이 넓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넓어집니다. 어린 임금을 부탁할 수 있고 작은 나라를 맡길 수 있고 큰 절조에 임해 뜻을 빼앗을 수 없다면 절조를 굳게 지키고 책임을 지는 강인함이 굳세어지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굳세어집니다.
인류가 천지의 넓음과 굳셈을 온전히 할 수 있었던 방법은 여기에 있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도량(度量)이 넓고 뜻이 굳세었던 성현도 이러한 데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니, 선비 된 자가 스스로 처신하기를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넓음이 넓다는 것만 알고 굳셈으로 행하는 것인 줄 모른다면 법도가 없어 주관을 확립하기 어려우므로 반드시 중단되고 나태해지는 병폐에 이르게 되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중임을 감당할 수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 가다가 고꾸라질까 걱정이다’ 라는 것입니다. 굳셈이 굳센 줄만 알고 넓음으로 주장할 줄 모른다면 편협하여 굳셈을 가질 수가 없으므로 반드시 편협하며 스스로 만족하는 폐단에 이르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제 자신이 한 번도 짐을 져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무거운지 가벼운지 알 수 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넓음을 말한다면 큰 수레가 무거운 짐을 싣는 것과 같이 해야 하고, 굳셈을 말한다면 건장한 말이 멀리 가는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짐을 지는 힘이 아무리 넉넉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강인하고 쉬임 없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실행이 아무리 열성적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남김없이 포괄하는 본체에 힘입은 뒤에야 비로소 참으로 중임을 감당할 수 있고 먼 길을 갈 수 있는 드넓고 굳건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또 논하건대 넓음과 굳셈은 진실로 병행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넓은 자는 굳세지 못한 단점이 있기 쉽고, 굳센 자는 넓지 못한 단점이 있기 쉬우니, 만약 실제로 검증하고 몸도 행하지 못했다면 틀림없이 하나만을 고집하다가 하나를 잃어, 제 스스로는 넓다고 여기지만 도리어 중도에 폐하고 마는 수치로 귀착될 것이며, 제 스스로는 굳세다고 여기지만 도리어 한 가지 선에 만족하는 고루함으로 흘러가버리는 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때의 넓음은 내가 말하는 넓음이 아니고, 이때의 굳셈은 내가 말하는 굳셈이 아니니, 이것이 어찌 더욱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넓음과 굳셈 가운데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짐이 무겁다는 것을 참으로 알지 못하고 길이 멀다는 것을 참으로 체험하지 못했으면서도, 자신이 몸소 등에 지고서 한달음에 천만리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그저 지고서 멀리 가지 못할 뿐만이 아니니, 한단(邯鄲.중국 하북성의 교통요충지)의 청년처럼 옛 걸음걸이까지 잊어버리고 엉금엉금 기어 돌아오는 꼴이 될까 두렵습니다. 이것을 또 배우는 자들이 경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아! 세상에 넓지 못하고 굳세지 못한 자라도 본래는 넓지 않음이 없고 굳세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또 성인이 사람들을 권면(勸勉)할 때에 그가 본디 가지고 있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적이 없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나는 매양 《주역》의 상(象)을 증험할 때마다 증자가 ‘넓음[弘]’과 ‘굳셈[毅]’ 두 글자를 집어내어 후인들에게 계도하여 보여주신 지극한 뜻에 감동하여 한번 당세(當世)의 군자와 간직했던 생각을 토론하고 싶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