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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6·4 지방선거에도 어김없이 장애인의 참정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투표소가 속출했다.
중증장애인들이 접근조차 어려운 투표소는 물론, 공간 협소를 이유로 장애인용 기표소는 투표소 바깥 복도에 설치되어 있었고, 장애인단체에 의해 사전에 지적된 바 있는 신형기표소의 문제점도 여실히 드러났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투표보조기구에는 후보 이름 없이 정당 번호만 새겨져 있었다.
장애인 참정권과 관련한 기본적인 접근권 문제는 장애인계에서 수년간 꾸준히 제기한 문제였지만, 여전히 개선되지 않아 이후 논란이 예상된다.
![]() ▲세류2동 제5 투표소(남수원초등학교). 공간 협소를 이유로 장애인용 기표소가 투표소 바깥 복도에 설치되어 있다. 투표를 하러 온 강민산 씨가 투표참관인 한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애인용 기표소에서 기표를 하고 있다. 복도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다. |
# 투표소 내 공간 협소를 이유로 장애인용 기표소는 ‘바깥’에
수원시 권선구에 사는 강민산 씨(뇌병변장애 1급)는 4일 낮 12시 세류2동 제5투표소(남수원초등학교)에서 자신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그러나 선관위 측은 투표소 내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장애인용 기표소를 복도에 설치해두었다. 강 씨는 결국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투표참관인 한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표해야 했다.
투표관리관은 “투표소 공간이 좁아 복도에 설치했다”라며 “대선 때는 한 명만 뽑으면 됐는데 이번 지방선거는 두 번에 걸쳐 7장을 투표해야 한다. 장애인분도 좁은 공간에서 두 번씩 투표용지 받아서 하는 것보다 넓은 공간에 나와 한 번에 투표하는 게 편하지 않겠느냐.”라고 답했다. 투표소 내에는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치는 데스크와 함께 일반 기표소 6개, 투표함 2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에 강 씨는 “공간 협소를 이유로 장애인용 기표소를 바깥에 빼두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며 “일반 기표소는 6개나 두고 장애인용 기표소는 안에 둘 수 없다니 정말 어이없다”라고 불쾌감을 표했다.
강 씨는 신형기표소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강 씨는 “기표하는 곳이 평평하지 않고 경사져있었다. 투표용지가 떨어질까 봐 탁자에 놓을 수 없었다. 중증장애인 대부분은 투표용지가 바닥에 떨어지면 스스로 주울 수 없다.”라며 “결국 투표용지가 떨어지지 않게 왼팔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한 장씩 빼서 기표했다. 이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라고 전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사용된 신형기표소는 장애인계의 문제제기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아래 중앙선관위)가 지난 2월에 발표한 기표소를 다시 수정한 모델이다.
중앙선관위가 2월에 선보인 신형기표소는 전동스쿠터 이용자를 기준으로 제작되어 기표탁자가 우측에만 있었다. 그 후 장애인계의 문제제기로 기표탁자가 정면에도 설치되었으나 정면에 설치된 기표탁자가 경사져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날 강 씨는 투표소까지 이동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투표소로 지정된 초등학교 정문에서부터 건물까지의 길은 울퉁불퉁한 시멘트 길이었고 바로 옆 운동장의 돌멩이와 흙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그 때문에 전동휠체어를 탄 강 씨의 몸은 심하게 흔들렸다.
이 길을 지난 후엔 나무가 심어진 정원을 지나야 했으나 강 씨는 그 앞에서 한참을 주저했다. 전동휠체어가 지나가기엔 길이 너무 좁기 때문이었다. 강 씨는 다른 길이 있는지 주변을 살폈으나 주변엔 어떠한 안내 표지판도 없었다.
강 씨는 “폭이 너무 좁아 바퀴가 낄 수도 있다. 그러면 나갈 수도 없지 않으냐.”라며 불안해했다. 한참을 주저하던 강 씨는 느린 속도로 그 길을 지나갔다. 다행히 바퀴는 끼지 않았으나 곡선으로 되어 있는 길은 전동휠체어가 방향을 바꾸며 운전하기에 아슬아슬한 폭이었다.
투표소가 있는 건물 입구 계단에는 임시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홀로 오르내리기에 경사각이 너무 가팔랐다. 출입구에는 투표안내 도우미가 있었으나 인사만 할 뿐 별도의 이동 지원은 없었다.
어렵게 투표를 마친 강 씨는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나왔다. 왔던 길을 다시 지나가기가 불안해서였다. 그러나 후문 역시 경사가 심해 뒤에서 누군가 잡아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강 씨는 “투표하러 왔으나 불편함이 너무 크니 투표하기 싫어질 때가 있다”라며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촉구했다.
![]() ▲투표소 건물 입구의 임시경사로.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홀로 오르내리기엔 경사로가 급격하다. 입구에 투표안내 도우미가 있었으나 인사만 할 뿐 별도의 이동 지원은 없었다. |
# 1층에 덩그러니 놓인 장애인용 기표소, 여전히 개선되지 않아
지난달 30, 31일 사전투표 당시 나타났던 문제점들이 6월 4일 본 투표에서 그대로 반복되기도 했다.
서울 길음동에 사는 황인준 씨(지체장애 1급)는 지난달 30일 사전투표를 하기 위해 길음2동 주민센터를 찾았으나, 투표소는 엘레베이터도 없는 주민센터 2층에 마련되어 있었고, 1층에는 장애인용 임시기표소만 설치되어 있었다.
주민센터에 파견된 선관위 관계자는 신분증을 맡기면 투표관리인이 2층에 올라가 투표용지를 받아와서 투표를 하고, 다시 이들이 투표용지를 들고 올라가 투표함에 넣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황 씨는 그 방식이 비밀투표 원칙을 침해하는 등 정당한 투표접근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며 이를 거부했다. 결국 다음날 장애인 접근권이 가능한 다른 투표소에 가서 투표를 해야만 했다.
황 씨는 “장애인도 정당한 절차를 거쳐 투표할 수 있도록 시정을 요구했지만, 선관위 관계자는 예전에도 이렇게 했고, 앞으로도 다른 장소를 찾기는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나 4일 이른 9시 경 다시 방문한 길음2동 주민센터 투표소의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날 전동스쿠터를 타고 투표하러 온 한 시민도 장애인용 임시기표소를 거부하고, 지팡이를 짚고 힘들게 2층까지 올라가 투표했다.
투표소 상황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황 씨는 “장애인의 정당한 투표 접근권을 요구해도 전혀 개선하려고 하지 않는 선관위의 불성실한 태도에 너무나 화가 난다”라고 분노를 표했다.
# 시각장애인 투표보조용구, 후보·정당명 없이 ‘정당 번호’만 점자 표기
휠체어 이용 장애인들이 건물의 물리적 접근권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면 시각장애인들은 투표보조용구가 충분히 지원되지 않아 투표권 행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날 늦은 1시께 광주광역시 북구 건국동 제1투표소(신용초등학교)에서 투표를 마친 도연(시각장애 1급) 씨는 시각장애인에게 지급되는 투표보조용구에 선거 관련 정보가 점자로 표시되지 않아 이번 투표에서 낭패를 봤다.
선관위는 점자판처럼 투표용지에 씌워 점자로 기호, 후보자 이름, 정당명 등을 읽고 투표하도록 투표보조용구를 시각장애인에게 지급한다. 그러나 교육감 투표보조용구를 제외하고 나머지 투표보조용구에는 후보 혹은 정당 기호만 점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도연 씨는 “점자 투표보조용구에는 교육감을 빼고 나머지는 기호만 쓰여 있었다. 그래서 투표 전에 다른 분에게 후보자 이름과 당을 읽어달라고 부탁하고 투표보조용구를 씌워 투표했다. 그 과정에서 원래 찍어야 하는 후보자 위 칸에 도장을 찍었다. 물론 제가 부주의했던 점도 있지만, 후보자 이름과 정당명이 제대로 적혀있었다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 표를 무효표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도연 씨는 “투표보조용구에 정당명과 후보자 이름이 쓰여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투표용지를 읽어달라고 해서 그 내용을 듣고 기억해서 찍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라며 “여러 명이 출마한 선거에서는 찍고 싶은 후보가 어디 있는지 헷갈려서 이번처럼 잘못 찍을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도연 씨는 “정당명과 후보자 이름을 투표보조용구에 표기해달라고 지난 2010년, 2012년 선거 때에도 선관위에 이야기했는데, 몇 년이 지났는데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여서 굉장히 불쾌했다”라며 “돈 드는 문제도 아니고, 기술적으로 어렵거나 오래 걸리는 문제도 아니다. 교육감 투표보조용구에는 이름이 적혀있었던 것을 보면 다른 투표보조용구에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도연 씨는 이후 국가인권위원회에 시각장애인에게 제대로 된 편의를 제공하지 않은 선관위를 피진정인으로 차별 진정을 낼 예정이다.
![]() ▲투표를 마친 도연 씨가 투표소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은 모습. ⓒ도연 |
# 장애인은 무조건 장애인용 기표소? "명백한 직접 차별"
일부 투표소에서는 장애 유형과 상관없이 장애인이라면 무조건 장애인용 기표소를 사용하게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날 늦은 2시부터 약 1시간 동안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제4투표소(노진초등학교)에서 선거 모니터링을 진행한 화성동부장애인자립생활센터 조현아 사무국장은 황당한 장애인용 기표소 운영을 목격하고 이를 바로잡으라고 요구했다.
조 사무국장은 “투표소에 가보니 장애인용 기표소가 구석에 숨겨져 있었다. 투표소 관리관은 ‘투표소가 좁아서 빼놨는데 장애인이 오면 다시 들여 놓겠다’고 했다.”라며 “이러한 처사에 항의해 현장에서 시정을 요구했더니 그제야 장애인용 기표소를 다시 설치했다”라고 밝혔다.
조 사무국장은 “관리관은 장애인용 기표소를 꺼내놓고도 비장애인이 거기서 투표하려는 것을 막았다”라며 “얼마 있다가 지역 시설에서 거주하는 정신장애인 40여 명이 투표하러 왔는데, 다 걸을 수 있는 분들인데도 장애인용 투표소에서만 투표하라고 했다”라고 설명했다.
조 사무국장은 “아마 관리관이 장애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다”라며 “관리관에게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 짓지 말라고 요청했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장호동 활동가는 “비장애인은 비장애인용만 이용하게 하고, 장애인은 장애인용만 사용하게 하는 것은 명백한 직접차별”이라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우리 단체는 지난 3월 신형기표소를 만들 때부터 장애인·비장애인 공용기표소를 만들라고 인권위에 진정했지만, 인권위는 우리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권고 사항까지는 아니라고 했다. 앞으로 투표소에 공용기표소를 도입하도록 선관위와 인권위에 제안하고, 토론회와 협의 테이블을 열어 변화를 이끌어낼 계획”이라고 전했다.
![]() ▲늦은 4시 경기도 의왕시 부곡동 제6투표소(의왕역 철도역사홍보관 2층)에서 투표를 한 정윤상(지체 1급) 씨는 투표 당일 투표소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불편을 겪었다. 투표소 관리관은 정 씨에게 '1층에 임시투표소를 마련할테니 그곳에서 투표하라'라고 했으나 정 씨가 이를 거부했으며, 이에 선거안내요원들이 정 씨의 휠체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경기장애인차별철폐연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