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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 공격에 어떻게 대처할지 아직은 감이 잡히지 않는다.(15일 존 커비 미 백악관 전략 소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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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러시아)는 미끼(쿠르스크 공격)을 덥썩 물지 않았다(15일 러시아 반정부 언론인 율리아 라티니나)
우크라이나 국경과 접한 러시아 쿠르스크주(州)에 대한 우크라이나군의 기습 공격이 16일로 열하루째를 맞았다. 성공한 기습 공격의 여진이 여전한 형국이다. 러시아 연방 차원의 비상사태가 발령되고, 황급히 피란길에 나선 러시아 국경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추가 피란지 소문도 흉흉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한 3개 주(쿠르스크, 벨고로드, 브랸스크주)에 대테러작전 명령을 발령하고 반격에 나설 병력과 중화기들을 쿠르스크로 이동 배치하기 시작했다. 군 당국은 군사작전의 기밀 유지를 위해 주민들에게 군 이동에 관한 영상 제작및 정보 공개를 자제해줄 것을 당부했다.
러시아 병력을 실은 군차량들이 쿠르스크로 향하고 있다/사진출처:현지 매체 영상 캡처
미국 등 서방 언론들은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지역 방어에 급급해온 우크라이나군이 갑자기 왜 쿠르스크주를 급습해 전선을 확대했는지, 그 이유와 구체적인 공격 목표를 찾지 못한 채, 계속되는 우크라이나군의 진격 주장을 주로 전하고 있다.
이에 맞서 러시아 국방부와 현지 주지사들은 우크라이나군의 잇따른 공격을 격퇴했다고 주장한다. 국경 지역 핵심 도시인 '수드자'를 놓고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점령, 러시아 쪽에서는 전투중이라고 엇갈린 발표를 내놓고 있다. 정확한 현지 전황을 파악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러-우크라 양측에서 나오는 전과 발표는 대부분 세 과시나 사기 진작을 위한 프로파간다(선전)의 성격이 짙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러시아 본토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피습되고, 12만명의 피란민이 발생했다면, 러시아군은 당장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격퇴에 나서는 게 상식적이다. 돈바스 주요 전선에 있는 최정예 병력을 이 지역으로 빼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하지만, 열흘 가까이 지난 15일까지도 그같은 조짐은 포착되지 않고 있다.
러시아 국영 리아노보스티 통신에 따르면 커비 미 백악관 전략 소통관은 15일 "러시아군의 대처 방안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 공격에 '러시아가 어떻게 대응할 것으로 보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다"면서도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또 "우크라이나군이 장악한 쿠르스크 지역을 계속 통제할 수 있을 지도 답하기가 어렵다"며 "(나는) 우크라이나군의 작전에 대해 말할 수도 없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의도와 궁극적인 목표,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 능력을 갖고 있는지 판단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커비 소통관에 비하면, 반정부 성향의 러시아 중진 언론인 율리아 라티니나는 X(옛 트위트)를 통해 현재의 판세를 똑부러지고 자신있게 짚었다. 그녀는 러시아 TV 채널 ORT(현 '채널 1'의 전신), NTV 등을 거쳐 '에흐 모스크바'(에코 모스크바) 라디오에서 일하다 당국의 탄압에 2017년 해외로 떠났으나 80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지닌 유튜브 인플루언스다.
라티니나가 곤돌리자 라이사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자유 언론인상을 받는 장면/사진출처: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 공격을 눈부신 기습작전의 성공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푸틴 대통령은 여전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수드자에 진입한 우크라이나군은 호랑이(러시아군)를 사냥하기 위해 나무에 묶어둔 새끼 염소의 역할인데, 호랑이는 미끼를 물려고 사정없이 달려들지 않았다."
그녀는 러시아군이 쿠르스크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는 대신, 에어폭탄(활공폭탄) '카브'로 우크라이나군의 길어진 보급로를 차단하고, 특수부대를 투입해 '쥐'를 잡는 '고양이' 작전을 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에 대해 "러시아군의 당면 목표는 돈바스 지역 장악"이라며 "추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미국 측에 추가 군사 지원을 요구할 때, 쿠르스크에서 쓸데없이 장갑차 등 많은 최신 장비들을 허비했다는 핀잔을 듣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라티니나의 '미끼론'과 '고양이 작전' 주장은 언뜻 바둑판 위의 '속임수'와 '역공'을 떠올리게 한다. 바둑의 묘미는 심오한 수싸움에 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고 공격과 수비 간의 수싸움을 통해 '집'(바둑에서는 빈 공간)을 확보하는 땅 따먹기 전쟁이다. 때로는 과감한 공격으로 대마를 잡기도 하고, 때로는 집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수비에 전념하기도 한다. 총과 칼을 안들었을 뿐, 치열한 전쟁의 축소판이다.
2년 6개월로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세를 바둑판 위로 옮긴다면, 우크라이나군은 중앙(돈바스 전선)에서 대마가 잡힐 위기에 처하자, 상대(러시아)의 넓은 집(쿠르스크)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었다. 러시아군은 집 속으로 들어온 상대의 수를 읽으면서, 중앙의 대마를 빨리 잡기 위해 더욱 거세게 몰아부치는 판세다.
러시아는 집 안으로 치고 들어온 상대의 수가 만만치 않다고 느끼는 순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여전히 대마를 잡는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상대의 공격은 더 확장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데 만족하는 느낌이다.
라티니나의 쿠르스크 판세 진단을 바둑판 위에서 재현한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일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기습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돈바스 공세를 늦추지 않는, 즉 대마를 잡아 상대로 하여금 돌을 던지게 하겠다(항복)는 포석이다.
크렘린의 쿠르스크 대책 회의에 화상으로 참여한 인사들의 모습/사진출처:크렘린.ru
실제로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의 15일자 전황 정리를 보면, 러시아의 그같은 전략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 매체는 이날 하루(전쟁 발발 904일째)를 결산하는 기획 기사에서 전황을 △쿠르스크 상황(Ситуация под Курском)과 △돈바스 문제(Проблемы на Донбассе)로 나눠 정리했다.
쿠르스크 전선에서는 알렉산드르 시르스키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합참 의장 격)이 이날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수드자와 다른 정착지 3곳에 대한 수색과 점령을 완료했다"고 보고했다. 지난 24시간 동안 500~1,500m를 더 전진했으며, 러시아군의 반격을 세 차례 격퇴하고, 100여명의 러시아군을 포로로 잡았다고도 했다. 또 우크라이나군은 수드자에 쿠르스크 군사작전을 총괄할 군 사령부를 개설하고, 이탈리아 방송 TG1(방송국 명칭은 MAI다)의 여기자를 쿠르스크 지역 깊숙이 데려가 현장을 취재하도록 지원했다.
우크라이나군의 장갑차를 타고 쿠르스크 영토 깊숙이 들어가는 이탈리아 TG1 여기자/영상 캡처
반면, 러시아 국방부는 쿠르스크 지역의 크루페츠 마을을 탈환하고 여러 곳에서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을 격퇴했다고 주장했다.
스트라나.ua는 또 "최근 며칠 동안 쿠르스크 지역에서 파괴된 우크라이나 군사 장비들이 인터넷에 점점 더 많이 올라오고 있다"며 '러시아의 '란셋' 드론이 전장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는 서방 언론 보도를 소개하기도 했다. 쿠르스크에서는 영국제 챌린저 전차(탱크)가, 우크라이나 국경도시 수미에서는 미국의 다연장로켓발사시스템 '하이마스'(HIMARS)가 러시아의 드론 공격을 받는 영상도 공개됐다. 쿠르스크주 곳곳에서 러-우크라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쿠르스크 지역에서는 파괴된 우크라이나 군장비들이 다수 포착됐다. 흰색 세모 표식이 우크라이나군 장비라는 뜻이다/텔레그램 캡처
그러나 돈바스에서는 우크라이나군으로부터 SOS 신호가 계속 나오고 있다고 스트라나.ua는 전했다. 가장 위급한 곳이 러시아판 '철의 삼각지대'(鐵의 三角地帶)로 불리는 '포크로프스크'다.
우크라이나 지도를 보면 한국전쟁 당시 강원도 철원군, 김화군, 평강군을 잇는 '삼각지대'와 비슷하게 포크로프스크와 차소프 야르, 아브데예프카(아우디우카)가 도네츠크시(市)의 탈환 혹은 방어를 위한 지형적 특징(삼각형)을 갖고 있다. 이중 아브데예프카는 지난 2월 러시아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차소프 야르'와 포크로프스크를 겨냥한 러시아군의 공세는 갈수록 위협적이다.
도네츠크주 삼각지대를 이루는 '차소프 야르'(표식)과 '아브데예프카'(오른쪽 맨 아래), 맨왼쪽의 '포크로프스크'의 위치. 아브데예프카 바로 왼쪽 위에 오레체티노가 보인다. 포크로프스크로 가는 길목이다./얀덱스 지도 캡처
특히 (러시아군에 점령된) 아브데예프카에서 포크로프스크 방향으로 향하는 길목의 마을들을 러시아군이 차례로 점령하고 있다는 게 스트라나.ua의 분석이다. 러시아군이 포크로프스크 10km 앞까지 들어왔다는 정보도 있다.
이 지역을 방어하는 우크라이나 제110 기계화 여단의 한 장교는 미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에 "전선의 상황이 악화됐다.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적은 양의 탄약을 받고 있으며, 러시아군은 계속 전진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제24 특수 여단의 한 장교는 "상대의 10분 1에 불과한 우리 부대는 하루 종일 적 항공기의 공격에 떨고 있다"며 "우리의 앞에는 목숨을 걸고 전선을 사수하든가, 다음 방어선으로 후퇴하든가, 2가지 선택만 남았다"고 말했다.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포크로프스크 군사행정부 최고책임자는 15일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주민들에게 즉각 대피할 것을 촉구했다. 2022년 기준, 포크로프스크의 인구는 6만명 선이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6일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공격이 가뜩이나 취약한 돈바스 전선의 방어력을 더욱 약화시켰다고 진단했다. 이 곳에 있는 부대를 (쿠르스크 공격으로) 재배치하는 바람에 전력이 분산되고, 방어 임무를 맡을 병력이 부족해졌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손실 병력의 약 20%만이 동원된 병사들로 보충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 두달간 차소프 야르에 주둔한 우크라이나군의 한 장교는 WSJ 측에 "5~6명이 있어야 할 자리(참호)에 2~3명 밖에 없어 군수 담당 인력을 보내야 했다"고 한탄했다.
우크라이나군의 참호 모습/텔레그램 영상 캡처
요약하면, 우크라이나는 돈바스 방어 병력을 빼내 쿠르스크 기습 공격으로 돌리면서, 러시아군도 주요 전선에서 공격을 멈추고 쿠르스크 방어에 주력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아직 그런 장면은 포착되지 않고 있다. '호랑이가 미끼를 덥석 물지 않았다'는 라티니나의 분석을 뒷받침하는 정황이다. 오히려 돈바스 공세를 더욱 강화하면, 우크라이나가 쿠르스크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무장한 듯하다.
이같은 해석은 쿠르스크 공격에 대한 미하일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 고문의 정치적 목표 설정에서도 부분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포돌랴크 고문은 14일 반정부 성향의 러시아 매체 '메두자'와 회견에서 쿠르스크 공격에 대한 정치적 목표를 크렘린과 러시아군 지도부의 영토 방어 실패를 입증하는 데 뒀다. 그는 "우리가 쿠르스크를 공격했을 때, 러시아 사람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보았다"며 "크렘린은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상황을 거의 통제하지도 못했다"고 주장했다. 또 "주민들에게는 그동안 피부로 느끼지 못하던 전쟁이 바로 눈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은 실감하게 했다"며 "이는 러시아에 심각한 사회적 동요를 가져오고, 그 결과에 대한 논의(평화협상)를 활발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가 단시간에 이같은 정치적 목표를 달성했다고 판단한다면, 굳이 쿠르스크에 계속 군을 주둔시킬 이유가 없다. 설립하기로 한 쿠르스크 군사령부 산하에 일부 군대만 남겨놓고 대부분 병력을 돈바스 방어로 되돌려야 한다.
우크라이나는 돈바스 전선의 대마를 살리기 위해 과감하게 쿠르스크로 쳐들어갔고, 러시아는 쿠르스크에서 (바둑의) 집을 내주더라고 돈바스 지역에서 대마를 잡으면 이긴다고 생각한다. 전세는 누가에게 더 유리할까?
바둑의 '위기십결'(圍棋十訣, 바둑에서 꼭 명심해야 할 열 가지 비결)에는 '입계의완'(入界誼緩)이라는 말이 있다. "서둘러 적진 깊숙히 들어가지 말라"는 뜻이다. 우크라이나는 더이상 쿠르스크 깊숙이 진격하지 말고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는 상태에서 재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서방의 많은 전문가들도 계속 강조하는 훈수다.